33화. 싸움의 법칙 (1)
“허허.”
장삼이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웃었다. 그도 조호의 말에 동의했다.
호기롭게 수련을 받아들이겠다고 서명까지 했지만, 나이 때문인지 체력이 따라 주지를 않았다.
일류를 넘는 무인이라고 한다면 나이를 먹을수록 내공을 쌓아 강해진다지만, 내공이 없는 이류 무인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빨 빠진 호랑이, 아니 이빨 빠진 고양이가 되기 때문이다.
조호가 말을 이었다.
“아저씨,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강해졌다면 사 공자한테 복날 개 맞듯 쥐어 터졌겠어요?”
“흠.”
정확한 조호의 지적에 장삼이 헛기침했다.
그때 여기저기서 끙끙대는 신음이 튀어나왔다.
모두가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신음은 조호의 말에 동의한다는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모두 자는 척할 뿐, 실행에 옮길 이는 없었다.
장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장삼도 결심한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현생이 낫다고 이대로 있으면 며칠 안에 저승사자를 마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말을 끝으로 스르륵 의당 문이 열렸다.
장삼과 조호가 탈출을 위해 자리를 뜬 것이다.
그들의 뒷모습을 본 장자명이 혼잣말을 뱉었다.
“어차피 이류 인생, 여기 있으나 밖에 있으나…….”
장자명의 말에 다시 여기저기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끙.”
장자명은 재빨리 입을 막았다.
그때 무사 하나가 장자명에게 속삭였다.
“모른 척해 주쇼.”
“흠.”
장자명이 헛기침으로 말을 받았다.
힐끔 무사들의 얼굴을 보니 후회가 한가득 보였다.
장자명은 안 보이게 미소를 지었다.
저런 표정을 가진 무인들이 비무에서 승리할 수 있던가?
이번 의뢰는 무조건 성공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장자명이 막 잠이 들려 할 때였다.
휘힝!
휘칭!
오늘도 어김없이 천장에서 귀곡성이 새어 나왔다.
여기에 와서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저 귀곡성이었다.
장자명은 잽싸게 귀를 틀어막았다.
그때 의당의 문이 다시 열렸다.
덜컹.
귀곡성을 배경으로 열린 문.
뒤에 한없이 짙은 어둠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은 섬뜩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아마 바람에 열렸을 터, 장자명이 문을 닫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문틈 사이로 시커먼 형체가 나타났다.
“헉!”
장자명이 놀라 엉덩방아를 찧자 시커먼 형체가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시커먼 형체가 질문을 던지며 안으로 들어왔다.
불빛에 드러난 얼굴.
장자명을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다름 아닌 수호사대의 대주 소대섭이었다.
“아, 대주님, 이 시간에는 무슨 일로…….”
“급한 환자가 생겨서 데려왔습니다.”
장자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환자라니요? 어디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장자명이 소대섭의 오른손을 확인했다.
그의 오른손에는 멱살이 잡힌 채 널브러져 있는 무사가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소대섭이 손에 든 무사를 툭 던졌다.
장자명은 반사적으로 쓰러진 무사에게 다가갔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쥐어 터진 것이 낮에 당했던 무사들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장자명이 빠르게 붕대를 감고 약초를 으깨 얼굴에 발랐다.
응급 처치를 마친 장자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체구가 조금 전 탈출한다고 나간 조호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때 다시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여자 무인이 누군가를 질질 끌고 온다.
물론 여자 무인은 심미호였다.
“헉.”
장자명이 비명을 토했다.
지금 끌려 들어오는 것은 다름 아닌 장삼이었다.
탈출한다고 빠져나간 두 명의 무사가 반 시진 만에 넝마가 되어 들어온 것이다.
장자명이 소대섭에게 물었다.
“대주가 이렇게 만든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습니까?”
“제가 아닙니다.”
소대섭이 고개를 흔들었다. 장자명의 시선이 심미호에게 향했다.
“부대주가 그러셨습니까?”
“저도 아니에요.”
심미호가 고개를 젓고는 뒤쪽을 보며 눈짓했다.
장자명의 시선이 자연스레 문 뒤쪽 어둠 속으로 향했다.
순간 어둠 속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고 있는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흠칫.
착각일까?
사내의 눈은 전장에서 수많은 적의 목을 벤 아수라 같았다.
물론 사내의 정체는 한빈.
한빈이 천천히 걸어와 장자명 앞에 섰다.
“의원님. 우리 대원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알겠습니다.”
장자명은 자신도 모르게 한빈에게 포권했다.
한빈이 나가자 장자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자가 천수장에서 첫날 마주한 어수룩한 사 공자가 맞던가?
그때 장삼과 조호가 정신이 들었는지 신음을 뱉었다.
“끙.”
“아이고!”
그들의 앓는 소리에 장자명이 재빨리 달려갔다.
그 상황은 며칠이 지나도 같았다.
며칠 후.
장자명의 얼굴은 강시처럼 변해 갔다.
핏기도 없었고 피부는 전쟁터에서 닳고 닳은 소가죽처럼 거칠기만 했다.
장자명을 이렇게 만든 것은 수호사대의 실전 훈련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자가 실려 오니 장자명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산공독을 우물에 풀었는데도 이상하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사들의 내공이 미세하게 회복되고 있었다.
이 비밀을 풀어야 의뢰를 성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 * *
일주일 후.
약속한 비무 날짜가 다가오자 한빈과 수호사대는 천수장을 떠났다.
산등성이를 타고 행군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개미가 먹이를 나르는 모습과 흡사해 보였다.
그 개미 중 유독 뒤처진 개미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장자명이었다.
장자명은 산공독이 왜 효과가 없을까 하는 의문 때문에 이렇게 뒤를 밟게 된 것이었다.
그는 험한 산길을 타는 수호사대 대원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장자명이 숨을 죽이며 미행하고 있을 때 앞서가던 한빈이 외쳤다.
“다들 여기에서 쉰다!”
“존명.”
복명복창이 울려 퍼지고 산자락 공터에 대원들이 짐을 풀었다.
모두가 죽통을 꺼내 물로 입술을 축이고 있을 때 심미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빈에게 물었다.
“주군, 이번 비무에서 저희가 이길 확률은 얼마나 되나요?”
“이 할!”
“네, 이 할이라고요? 지난번에 소대섭 대주에게 말했을 때는 삼 할이라고 하셨다면서요?”
“확률은 변하는 거니까?”
“이렇게 열심히 훈련을 했는데, 확률이 왜 줄어든 거죠?”
“그건…….”
“아, 알고 있어요. 이것도 비밀이죠.”
“그래, 이제 심미호 부대주가 날 잘 아네.”
“그런데, 진짜 이 할이에요? 주군도 아시잖아요. 이번 비무에 지면 저 죽어요.”
“다 방법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 심 부대주.”
“무슨 방법이요? 혹시 그것도 비밀인가요?”
“부대주 본인에게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지. 방법은 간단해.”
“주군, 뭔데요?”
“지면 튀는 거지.”
“아!”
심미호가 허탈하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때였다.
누군가 터덜터덜 한빈에게 다가왔다.
그는 바로 막내 무사 조호였다.
조호가 포권하며 말했다.
“주군, 비무를 요청드립니다.”
정중한 태도에 비해 조호는 죽일 듯 한빈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호의 눈에는 한빈은 향이와 자신을 갈라놓은 원흉이었다. 잘난 척하는 한빈의 몸에 칼침 한 방은 넣어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공이 약해진다는 점이었다.
칼도 가볍게 느껴지고 몸도 가벼워졌지만, 한빈과 맞붙으면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처음에는 옷깃 정도는 스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옷깃을 스치기도 힘들었다.
한빈의 무위가 단시간에 올라갔을 리는 없었으니 조호는 자신의 무공 수준이 내려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조호의 눈빛을 살핀 한빈이 말했다.
“좋지. 그럼 복면을 벗어라. 그래야 공평하지.”
조호가 얼굴을 감쌌던 천을 벗어 던지며 한빈의 앞에 섰다.
“얍!”
기합 소리와 함께 조호가 번개처럼 달려왔다.
퍽!
단 일 합에 조호가 허물어졌다.
너무나 허무한 광경에 입을 벌리고 있을 때 더 황당무계한 일이 일어났다.
조호가 일어난 것이었다.
그가 다시 달려들자 한빈의 검은 더욱 빨라졌다.
팍!
팍!
한빈의 검이 말린 복어를 두드리듯 조호를 강타했다.
퍽! 퍽!
모두는 입을 벌렸다. 조호가 계속 일어날 수 있는 것이 한빈이 힘을 조절했기 때문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한빈은 구결을 캐고 있었는데, 캐내는 방식에 있어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정신을 잃은 상대에게서는 구결을 캐기가 더 힘들다는 것이었다.
오뚝이처럼 일어나던 조호가 허물어졌다.
털썩!
한빈은 쓰러진 조호는 보지도 않고 허공을 바라봤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력(力)을 획득하셨습니다.]
천수장에 와서 한빈은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
속과 공은 열 개가 가득 차 더는 늘지 않고 체와 공이 눈에 띄게 늘었다.
[기본편]
[속(速), 속(速), 속(速), 속(速), 속(速)…….]
[체(體), 체(體), 체(體), 체(體), 체(體), 체(體)]
[력(力), 력(力), 력(力), 력(力), 력(力), 력(力)]
[공(功), 공(功), 공(功), 공(功), 공(功) ……]
[복(復)]
[응용편]
[전광석화(電光石火)]
[촉(觸)]
다만, 아쉬운 것은 응용편의 구결에 진척이 없다는 점이었다.
“쩝.”
한빈이 입맛을 다시자 수호사대 무사들은 고개를 돌렸다.
비무에서 수하를 저리 패놓고 눈길조차 주지 않는 주군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입맛까지 다시고 있다. 변태가 분명했다.
그때 무사 하나가 일어나 나왔다.
터벅터벅 걸어오는 이는 바로 장삼이었다.
나이 차는 있지만, 조호와 죽이 잘 맞던 그였다.
조호가 맞는 것을 보니 분이 치밀었다.
장삼도 자신의 무위가 시간이 지날수록 퇴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도 비무를 청하겠습니다.”
“허락한다.”
이어서 산중에 수련용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챙!
챙!
물론 결과는 같았다.
털썩!
몇 차례 비무가 끝나자 공터 구석은 정신을 잃은 대원들로 쌓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장자명이 눈에 담고 있을 때였다.
한빈이 말했다.
“의원님 나오시죠.”
“헉.”
장자명이 헛숨을 토했다. 기척을 최대한 숨겼는데 들켜 버린 것이다.
장자명이 머리를 긁적이며 수풀 속에서 나왔다.
그 모습에 대원들이 함성을 질렀다.
“의원님이 우리를 구해 주러 오셨다!”
“그래, 믿을 건 장 의원님밖에 없지.”
“장 의원님, 감사합니다.”
달려가 포권을 하는 대원도 있었고 장자명을 끌어안는 대원도 있었다.
독을 풀기 위해 뒤를 밟은 장자명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하하. 아닙니다.”
그 웃음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한빈이 말했다.
“제 수하들 좀 돌봐 주시지요. 훈련이 좀 과한 것 같습니다. 아끼는 수하들입니다.”
한빈에 말에 모두는 다시 입을 벌렸다.
아낀다는 한빈의 말과 이제까지 보여 줬던 그의 행동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때 심미호가 말했다.
“지금은 몇 할인가요?”
“지금은 일 할.”
“아.”
심미호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것은 심미호의 진심이었다.
만약 수호사대가 진다면 이 공자에게 고문을 받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탄성을 지르던 심미호가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의 표정에는 어떤 긴장감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한빈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놓이는 심미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