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믿습니까? (3)
계산을 끝낸 한빈이 표정을 숨긴 뒤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언제든 환영입니다.”
너무도 쉽게 승낙하자 이번에는 장자명이 놀랐다.
“이렇게 쉽게 승낙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백의 무복의 장자명이 깊숙이 포권했다.
그날 이후 장자명은 이따금 천수장에 들렸다.
물론 그때마다 한빈은 몰래 그의 행동을 살폈다.
장자명의 행동에 한빈의 입꼬리가 승천한 것은 비밀이었다.
* * *
이 주 후.
수호사대 대원들이 드디어 칼을 잡았다.
휙휙!
박도를 돌리던 장삼이 눈을 크게 떴다.
평소에 쓰던 박도가 너무 가볍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휙휙!
나머지 대원들도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이상하게 무게가 느껴지지 않네.”
“내 칼이 바뀐 것 같은데.”
수호사대 모두가 변화를 체감하며 눈을 빛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흑흑.”
수호사대 대원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그곳에서는 쪼그려 앉은 조호가 울음을 참고 있었다.
놀란 장삼이 조호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느냐? 조호.”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저씨.”
“뭐, 우리끼리 거리낄 것이 뭐가 있다고…….”
“향이가 시집간대요.”
“아.”
장삼이 탄식을 흘렸다. 천수장을 출입하는 일꾼을 통해 간단한 소식을 주고받는 것은 알고 있는 일.
하필 이때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조호가 흐느끼며 말했다.
“난 그놈을 죽여 버릴 거예요.”
“흠.”
장삼이 헛기침했다.
며칠 전부터 계속 누굴 죽인다고 하는데, 그게 누군지는 장삼도 알 수 없었다.
장삼이 조호의 등을 토닥거리고 있을 때 그들의 앞에 한빈이 나타났다.
“몇 가지 전달할 사항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주군.”
소대섭과 대원들이 각 잡힌 포권을 하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첫째 오늘부터 식수는 천수장 내의 우물 두 곳만 쓴다.”
“…….”
모두가 고개를 갸웃할 때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부터 실전 훈련에 들어간다.”
말을 마친 한빈이 자신의 검 월아를 앞으로 내밀며 해맑게 웃었다.
그 미소에 대원들은 고개를 갸웃했고 소대섭은 움찔하며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한빈의 선포로 수호사대와 한빈의 실전 비무가 시작되었다.
한빈은 대원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침을 삼켰다.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겉으로 일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연무장에 선 한빈이 허리에 찬 월아를 철노에게 맡기고 연무장에 널브러져 있는 목검을 잡았다.
획. 획!
목검을 돌리다 검 끝으로 수호사대 무사들 가리켰다.
“누구부터 올 건가? 두 명씩 덤벼도 좋고.”
그 말에 철노가 달려왔다.
“공자님,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주군, 제가 생각하기에도 괜찮습니다. 장수가 꼭 병사보다 강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소대섭이 보기에 한빈의 무공 수위는 기껏해야 일류.
다만, 초식이 기괴해서 상대가 곤란할 뿐이었다.
한마디로 한빈은 까다로운 상대이지 압도적인 무위는 없다는 말이었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씩 빼 먹는 게 더 좋을 듯하군.”
“네? 빼 먹다니요?”
“아니야, 말이 헛 나온 것 같아.”
한빈이 목검을 들고 연무장 중앙에 섰다.
“그럼, 준비된 대원부터 앞으로!”
그 말에 모두가 눈을 빛냈다.
이 공자의 수하들과 할 비무는 겁이 났지만, 한빈과의 비무를 해볼 만하다 생각한 것이었다.
그중 막내 무사 조호가 가장 먼저 나왔다.
조호는 앞으로 나오며 이를 악물었다.
‘죽일 거야. 죽일 거야.’
그 모습에 무사들이 웅성거렸다.
“우리 막내가 사고 치는 거 아니야?”
“그래, 주군이 다치면 우리는 돈도 못 받잖아.”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사생결단을 내겠어?”
그들은 한빈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며 소대섭은 고개를 갸웃했다.
얼마 전에 다섯 도객과 비무를 벌였으며 무씨검가의 무소율과 일전을 치른 한빈이 아니던가.
그 모습에 반해 무공을 배우기로 한 것이고 말이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한빈을 만만하게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수하들은 이번 실전 훈련에서 한빈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조호의 목도(木刀)와 한빈의 목검(木劍)이 마주쳤다.
탕!
탕!
몇 번 칼이 오가자 한빈과 조호는 뒤로 물러섰다.
상대를 뚫어질 정도로 관찰하는 한빈.
그 시선에 더 열이 받은 조호.
둘은 다시 맞닥뜨렸다.
순간 한빈이 용린검법의 초식을 운용했다.
‘전광석화.’
쉭!
한빈의 목검이 공간을 가르고 날아들었지만, 그 검의 궤적을 본 이는 없었다.
“헉.”
여기저기 탄성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조호가 큰 대(大) 자로 연무장에 뻗었다.
모두가 입을 벌린 상황, 정작 이번 비무에서 승리한 한빈은 허허롭게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용린검법의 응용편 중 촉(觸)을 획득하셨습니다.]
새로운 구결, 그것도 응용편이었다.
한빈의 입꼬리가 승천했다.
그를 바라보는 수호사대 대원들은 섬뜩함을 느꼈다.
장삼이 나지막이 말했다.
“감정도 없는 것인가?”
“때리면서 희열을 느끼시는 것 같은데요?”
다른 대원이 의견을 추가했다.
그들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구결을 정리했다.
[기본편]
[속(速), 속(速), 속(速), 속(速), 속(速) …….]
[체(體), 체(體), 체(體), 체(體), 체(體)]
[력(力), 력(力), 력(力)]
[공(功), 공(功), 공(功), 공(功), 공(功)…….]
[복(復)]
[응용편]
[전광석화(電光石火)]
[촉(觸)]
이직 완성되지 않은 응용편의 초식이지만, 한빈의 가슴을 뛰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허공을 바라보던 한빈이 수호사대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음!”
그 외침에 반응하는 모양은 크게 두 가지였다.
뒤로 움찔하며 물러나는 자, 그리고 목도를 뽑아 드는 자.
이어서 연무장에 다시 목검과 목도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탕!
탕!
* * *
천수장의 임시 의당.
장자명은 서책을 펼쳤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서책처럼 보이지만, 펼친 서책의 중앙은 움푹 파여 약병 두 개가 들어갈 자리가 있었다.
장자명은 약병을 다시 확인했다.
그가 확인하고 있는 약은 백독문의 독이었다.
하북팽가의 이 공자에게 의뢰받은 것이 정확히 사흘 전이었다.
그가 원한 것은 사 공자의 호위대인 수호사대가 힘을 못 쓰게 되는 것이었다.
그가 새로 조직한 호위대의 압도적인 무위를 널리 알리겠다는 의도였다.
그것을 위해서는 수호사대를 종이호랑이로 만들어야 했다.
장자명은 이 임무를 위해 산공독을 가지고 천수장에 침투했다.
사실 처음에는 힘들었다. 식당에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고 임시 의당으로 오는 대원들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상황이 변했다.
사 공자 한빈이 식수로 쓸 우물을 지정해 버린 것이다.
장자명은 이때다, 하고 백독문의 특제 산공독을 풀어 넣었다. 바로 반응하는 것이 아닌 체내에 두고두고 쌓이는 산공독이기에 약속된 비무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조절했다.
이건 누워서 헤엄치기보다 쉬웠다.
선금으로 은전 열 냥을 받았고, 일이 끝나면 나머지 대금을 받기로 했다.
시간만 지나면 거금이 들어온다는 얘기였다.
뭐, 사문에 들키지만 않는다면 이보다 더 좋은 부업은 없었다.
장자명이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덜컹.
의당의 문이 열리고 수호사대 대원들이 들어왔다.
다급하게 들어오는 그들의 모습에 장자명은 잽싸게 뒷걸음쳤다.
처음에는 자신이 독을 풀어 놓은 것을 들켰다 생각했다.
“무, 무슨 일입니까?”
장자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장삼이 답했다.
“의원, 이 사람 좀 봐주시겠습니까?”
“무, 무슨 사람 말이오?”
장자명은 그제야 수호사대 대원들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떴다.
무복은 여기저기 찢기고 드러난 살갗은 벗겨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문제는 한 명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세 명이 한꺼번에 몰려와 치료를 부탁하고 있었다.
장삼이 외쳤다.
“빨리 좀 부탁드립니다!”
부탁하는 장삼의 상태도 과히 좋지 않았다.
장자명이 본능적으로 침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으로…….”
말끝을 흐린 장자명은 의술을 펼칠 도구를 가져왔다.
지혈을 할 약초를 첫 번째 환자에게 펴 바르던 장자명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습격이라도 받은 겁니까?”
“습격이 아니라 훈련입니다.”
장삼이 고개를 젓자 첫 번째 환자의 치료를 끝낸 장자명이 두 번째 환자를 살폈다.
“이 환자는 깨끗이 당했군요. 복부 쪽 혈도에 충격이 와서 기절한 것이니 그냥 둬도 한숨 자고 나면 일어날 겁니다.”
장자명은 두 번째 환자의 복부에 침을 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사실 의술은 백독문의 교양과목 중 하나.
전문적인 의생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들어온 환자에게 집중해서 치료하다 보니 기가 다 빨린 느낌이었다.
그가 막 치료를 끝낸 두 번째 환자는 바로 조호였다.
그때 장삼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의원 어르신!”
나이 든 장삼이 포권하자 장자명이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정말 감사…… 쿨럭.”
장삼은 말을 잇지 못했다. 피를 한 움큼 토해 냈기 때문이다.
“괜찮으십니까? 이리로…….”
고개를 돌린 장자명은 침상을 가리키려다 멈칫했다.
원래 있던 침상 두 개가 다 찼기 때문이다.
장자명이 바닥을 가리켰다.
“여기에 누우시죠.”
“네, 쿨럭. 감사합니다.”
장삼이 자리에 눕자 장자명이 말했다.
“인정사정없는 손속이군요. 앞으로도 이러면 제명에…….”
장자명은 뒷말을 삼켰다. 하려던 말이 무사에게는 악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다시 문이 열렸다.
덜컹.
또 한 무리의 무사가 쏟아져 들어왔다.
“허!”
장자명이 입을 벌렸다.
두 번째 무리는 어째서인지 상처가 더 심각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시작이라는 것을 장자명을 알지 못했다.
그날 밤.
장자명은 신음을 내며 몸을 뒤척였다.
침상은 환자에게 빼앗기고 지금 그는 다른 무사들과 함께 의당 바닥에 누워 있었다.
“끄응.”
신음을 삼킨 장자명은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몰랐다.
하지만,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맥을 짚어 보니 내공이 거의 느껴지질 않았다.
즉, 산공독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자신이 설계한 효과가 나타나는 시기보다 너무 빠르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장자명의 착각이었다.
수호사대 무사 대부분은 내공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공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니 말이다.
장자명이 착각을 이어 나가고 있을 때 침상 위에 누군가가 깨어났다.
조호라 불리는 젊은 무사인 것 같았다.
“아저씨!”
그는 누군가를 불렀다. 장자명은 모른 척 눈을 감고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누군가 조호의 목소리에 답했다.
“괜찮은 것이냐. 조호.”
“네, 아저씨, 그런데 이게 뭐예요, 무복에 웬 피칠갑을 하시고…….”
“충격에 몸이 못 견뎌서 그런 것 같다.”
“아저씨, 우리 튀어요.”
“또 그 소리를 하는 게냐?”
“이대로 맞다가는 우리 죽어요.”
조호가 장삼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