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믿습니까? (2)
심미호는 가장자리에 쳐 놓은 밧줄을 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한참을 보던 한빈이 다시 외쳤다.
“조교 제자리!”
동시에 심미호가 밧줄을 잡아당겼다.
출렁이는 밧줄의 반동을 이용해 다시 복귀한 심미호를 본 한빈이 흡족한 표정으로 소대섭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소 대주 봤나?”
“네, 봤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대섭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이 말했다.
“다들 밧줄을 잡아라.”
“…….”
소대섭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한빈과 밧줄을 번갈아 바라봤다.
물론 뒤쪽에 있는 무사들도 소대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소대섭에게 속삭였다.
“소 대주, 수하들한테 물어봐?”
“네?”
“밧줄 잡을 건지 머리를 박을 건지?”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수호사대 무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밧줄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대주인 소대섭도 한빈의 명에 따라 뛰어가려 할 때였다.
“소 대주는 잠시만 기다려!”
“주군, 왜 그러십니까?”
소대섭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한빈이 답했다.
“소 대주는 책임자잖아.”
“네, 그럼 저는 열외입니까?”
“대주를 위해서는 좀 더 다른 걸 준비했어.”
한빈은 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더 튼튼해 보이는 밧줄이 기둥 사이에 묶여 있었다.
소대섭은 한빈을 보며 울먹이는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저의 안전을 위해 이리 신경을 써 주시다니…….”
“신경 쓰지 말고 수련에 열중해, 소 대주.”
소대주가 달려가 절벽에서 밧줄에 의지했다.
그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 것은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날 무렵이었다.
문제는 밧줄의 굵기였다.
다른 대원들에 비해 굵은 밧줄은 소대섭을 더 지치게 만들었다.
손에 딱 감기는 밧줄과 굵어서 한 손으로 잡기 불편한 밧줄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지금 소대섭은 수하들에 비해 몇 배의 힘을 소모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들 힘이 부치는지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한빈이 말했다.
“정확히 한 시진을 버텨야 한다.”
“…….”
모두는 말할 기운도 없는지 한빈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한빈이 그들의 의문을 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전쟁에서 칼을 놓친 병사가 살아남을 확률은?”
“…….”
“지금 그 밧줄이 너희들의 칼이고 목숨 줄이라 생각해라.”
“…….”
모두는 아무 말 없이 이를 악물었다.
그 모습에 활짝 웃은 한빈이 다시 말했다.
“아래에 떨어져도 다치지 않게 안전장치를 해 놨으니 다칠 걱정은 안 해도 된다. 포기하고 싶은 자는 손을 놓아도 된다.”
말을 마친 한빈은 심미호에게 손짓했다.
재빨리 다가온 심미호가 말했다.
“주군, 하명하실 일이라도……?”
“내가 말한 대로 독사는 뺐지?”
“아, 죄송해요. 뺀다고 뺐는데 몇 마리 섞여 들어갔을 수도 있어요.”
“뭐, 그 정도는 괜찮아.”
한빈이 씩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들의 대화에 소대섭은 아래를 바라봤다.
절벽 아래에는 있는 것이 그물이라 생각했는데, 이제야 정체를 안 것이다.
“헉!”
꿈틀대는 뱀들이 그들의 발밑에 한가득 있었다.
소대섭은 사신대라는 의미를 이제야 알았다.
그리고 올라오면서 말한 재료도 음식 재료가 아닌 저 뱀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밑에 우글대는 뱀을 확인한 수호사대 대원들은 더 악착같이 밧줄을 잡았다.
그 모습에 심미호가 작게 물었다.
“주군, 이 수련이 효과가 있는 거 맞아요?”
“당연하지, 내가 몸소 경험해 봤으니까.”
“언제요?”
“그건 비밀이야.”
한빈의 말은 사실이었다.
물론 전생의 경험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한참을 수다를 떨던 한빈이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심 부대주, 내가 말한 것은 준비됐어?”
“아, 그게……. 아직.”
“하북에서는 구하려면 좀 힘들 거야. 그래도 열심히 알아봐. 여기 일은 끝났으니, 나가서 수소문해 봐.”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심미호가 포권을 하며 물러났다.
한빈이 지금 심미호에게 부탁한 것은 산공독이었다.
말이 독이지 산공독은 사실 중화제에 가까웠다.
산공독은 음기를 되돌리고 양기도 되돌린다.
모든 무공은 음양의 이치를 기본으로 하는 법이기에 산공독에 당하면 무공을 못 쓰는 것이 이치였다.
하지만, 양기가 넘쳐흐르는 이곳 천수장에서는 달랐다.
산공독은 극양지기를 정화시켜 순양지기로 바꿀 수 있는 영약이나 다름없었다.
무가 양기를 흡수해서 영기를 머금은 영초가 되려면 적어도 삼 개월.
약조한 비무까지는 날짜가 모자란다.
며칠 내로 산공독을 구하지 못한다면 낭인왕에게 약속받은 세 가지 도움 중 하나를 써야 할 것 같았다.
* * *
그날 밤, 천수장에 마련된 수호사대의 숙소에서는 모두가 멀뚱히 눈을 뜨고 있었다.
히히힉.
히히익.
그들은 천장에서 울리는 귀곡성에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모두가 눈만 멀뚱히 뜨고 있을 때 막내 조호가 옆을 보며 속삭였다.
“장삼 아저씨, 자요?”
“왜 그러냐?”
장삼도 잠을 못 청하는지 답했다.
“우리 탈출합시다.”
“탈출하자고?”
“뭐, 미리 받은 은전도 있으니 그냥 여기서 튀어요. 이러다 죽겠어요. 아랫마을 향이도 도망갈 것 같고요.”
“나는 여기서 나가면 갈 데도 없다.”
“그러지 말고 우리 장사나 해요.”
“장사 밑천은 있고?”
“막일을 해도 여기보다는 좋겠죠. 그건 차차 모으면 되고요.”
“아니다. 나는 버티다가 돈을 받고 나가련다.”
장삼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 모습에 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삼은 수호이대와의 비무에서 이기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버틸 때까지 버텨 은전을 받겠다는 말이었다.
“네, 그럼 저 혼자 갈게요.”
말을 마친 조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리기라면 누구보다 자신이 있는 조호였다.
그는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슬그머니 숙소를 빠져나왔다.
장삼은 그렇게 빠져나가는 조호를 못 본 척했다.
숙소를 빠져나온 조호는 최대한 기척을 숨기며 담장으로 향했다.
불과 오십 보 앞에 담장이 보였다.
번개처럼 달려서 담장을 넘으면 자유의 몸.
수련을 마치면 받기로 했던 은전 열 냥이 눈에 아른거렸지만, 그걸 생각하다가는 인생이 종 치게 생겼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타다닥.
담장으로 달려간 조호는 벽의 중간을 밟고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너무 손쉬웠기에 이제까지 긴장했던 것이 허탈하기까지 했다.
툭툭 하의를 털고 일어난 조호는 깜짝 놀라 뒷걸음쳤다.
조호의 눈앞에 얼굴만 둥둥 떠다니는 것이었다.
“귀, 귀신.”
“뭘 그리 놀라는 것이냐?”
그 목소리에 뒷걸음치던 조호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의 목소리는 분명 한빈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자신이 얼굴이라 생각한 것은 호롱불이었다.
호롱불을 든 한빈이 다가왔다.
“혹시 튀려는 것이냐?”
한빈의 말에 움찔한 조호가 품에서 은전을 꺼냈다.
“여기 돌려주겠소. 그리고 오늘부로 수호사대에서 탈퇴하겠소.”
이것은 진심이었다.
아무런 효과도 없는 이런 훈련을 받느니, 낭인 시장에 나가 일거리를 찾아보는 게 좋다 생각했다.
호롱불 뒤 한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는 계약을 물로 보고 있는 것이냐?”
한빈이 계약서를 내밀었다.
하지만, 조호는 글씨를 읽을 수 없었다.
“돈을 돌려주면 그만 아닙니까?”
살짝 공손해진 조호의 말투.
한빈이 웃으며 답했다.
“여기 써 있지 않으냐? 위약금은 선금의 열 배라고.”
“헉!”
조호가 눈을 비비며 계약서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한빈은 씩 웃으며 계약서를 회수해 자신의 품에 넣었다.
* * *
다음 날 점심 천수장의 식당.
꽈직!
조호가 식사를 하다 말고 분이 못 이겨 젓가락을 부러뜨렸다.
그 모습에 장삼이 말했다.
“나는 젓가락 들 힘도 없는데, 젊음이 좋긴 좋구나.”
“놀리지 마세요, 아저씨.”
“그런데 탈출한다면서 여긴 왜 온 것이냐?”
“탈출은 안 하기로 했어요. 난 강해져서 그놈을 죽여 버릴 거에요.”
“누굴?”
“몰라도 돼요, 아저씨.”
조호는 미간을 좁히며 어젯밤 만났던 한빈을 떠올렸다.
계약서를 본 조호는 조용히 물러서는 척했지만, 숙소로 돌아가는 척하며 다시 탈출을 시도했었다.
그렇게 시도한 횟수만 무려 여섯 번.
그때마다 한빈이 앞에 나타나 계약서를 펼쳤다.
조호는 그제야 자신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힘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분할 줄은 몰랐다.
그때 한빈이 식당에 들어왔다.
한빈의 모습을 본 수호사대가 동시에 일어났다.
“주군!”
“주군, 오셨습니까?”
한빈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다들 앉아. 수련 기간에는 나도 조교에 불과하니 그리 예의 차릴 필요는 없어. 참, 생각해 보니 젓가락도 밥줄이잖아. 밥줄이 곧 목숨 줄이니, 앞으로는 젓가락도 밧줄이라 생각하고 놓치지 마. 지켜보겠어.”
동시에 모두가 젓가락을 소중히 집었다.
그때 철노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공자님.”
“왜 그래, 철노?”
“손님이 왔습니다.”
“내가 초대한 사람이 없는데?”
“삼 공자가 왔습니다.”
“셋째 형님이 왔다는 거지, 지금 어디 있지?”
“접객실에 모셨습니다. 이쪽으로…….”
철노가 앞장서자 한빈이 뒤를 따랐다.
접객실에 도착한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삼 공자 팽무빈 옆에는 처음 보는 무인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빈을 본 팽무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는가? 아우.”
“네, 형님. 오랜만입니다. 이쪽은 누구신지요?”
시선을 받은 백의 무복의 사내가 포권했다.
“저는 장자명이라 합니다. 의술을 연구하는 의생입니다.”
“아, 의생이시군요.”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한빈은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장자명이라면 전생에 익히 들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백독문의 후계자였지만, 개인적으로 외부 의뢰를 받아 독을 쓰다가 파문된 후 천하를 떠돌며 독을 팔던 그였다.
당시 별호는 만독상인.
강북을 대표하는 독문인 백독문이나 강남을 대표하는 독문 사천당가에 모두 공적으로 찍힌 인물이었다.
지금 밝힌 장자명이란 이름은 가명이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 이름으로 강호에 알려진다.
어찌 보면 기구한 인생을 살다가 간 천재.
지금은 파문을 당하기 전.
이곳에 그가 왜 왔는지가 관건이었다.
한빈이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굴리고 있을 때 팽무빈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아우를 괴롭힌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네. 둘째 형님의 겁박도 한몫했으니 이제부터라도 잘 지내 보자는 의미에서 인사를 온 것이니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말았으면 좋겠어.”
“네, 알겠습니다.”
일단 한빈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잘 지내 보자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해결될 것이면 그전에 한빈에 대한 괴롭힘을 멈췄을 것이었다.
팽무빈이 입을 열었다.
“내가 장자명 의생을 소개해 주려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곳에 기이한 현상이 많이 일어난다고 해서…….”
팽무빈의 설명은 간단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에 대해 장자명이 관심을 갖고 있으니 이곳에 머물겠다는 말이었다.
물론 그가 가진 의술로 수호사대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순간 한빈의 눈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