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믿습니까? (1)
팽경빈이 용건을 마치고 사라지자 소대섭이 다급히 달려왔다.
타다닥.
발걸음 소리의 울림이 사라지기도 전에 소대섭이 물었다.
“주군, 한 달이라니요?”
“한 달이면 너무 길지? 하긴 한 달이면 지루한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 저희가 어떻게 한 달 안에 강해진다는 겁니까?”
소대섭은 수호사대를 가리켰다.
수호사대를 바라보던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부분 수호사대의 굶주린 승냥이 떼 같던 눈빛은 봄날 눈 녹듯 사라진 상태였다.
그들이 눈에 담고 있는 것은 원망이었다.
한빈이 말했다.
“지금 싸우면 이길 확률은 일 할.”
“그럼, 한 달 뒤에는 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내 말을 따른다면 삼 할이다.”
“그럼, 이길 확률은 없다는 말씀 아닙니까?”
“나머지는 수호사대의 몫이지.”
“아.”
소대섭은 낮은 탄성을 흘렸다.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때가 된 것 같으니 출발하지.”
“출발이라니요?”
“우리 집으로 출발해야지, 천수장.”
한빈이 환하게 웃었다.
소대섭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귀, 아니 천수장으로 지금 간단 말입니까?”
“내가 장담한다. 거기서 살아남는다면 한 달 내로 강해질 거야. 내가 너희들이 세상에 가지는 원망을 모두 날려 주지.”
한빈이 씩 웃으며 돌아섰다.
하지만, 아무도 답하는 이가 없었다.
한빈이 사라지자 막내 조호가 어기적어기적 소대섭에게 걸어왔다.
“대주님,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게 말이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남정가까지 가세한 정예들을 어떻게 이긴다는 말입니까? 저희가 어제 하루 동안 배운 게 뭡니까?”
“그래, 미안하다.”
“대주님이 막아 주십시오.”
“…….”
소대섭은 말없이 조호를 바라봤다.
지금 문제는 싸우기도 전에 포기한 이들의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소대섭과 대화하는 조호를 향해 정체불명의 물체가 날아왔다.
핑!
조호가 눈을 크게 뜨며 물체를 피했다.
조호의 귓불을 스친 물체가 연무장 바닥에 떨어졌다.
텅!
충격음을 낸 물체가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자세히 보니 돌멩이였다.
조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주군이 우리 대화를 들으신 모양입니다. 대주, 못 들은 걸로…….”
조호가 다급히 자리로 돌아갔다.
소대섭은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돌멩이를 피할 수 있었지?’
어제의 조호라면 분명 돌멩이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녀석은 어디선가 날아오는 돌멩이를 피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빈의 뒷모습이 보인다.
돌멩이를 던진 이는 한빈이 분명했다.
“우연일까?”
혼잣말을 뱉은 소대섭은 멀어져 가는 한빈의 뒷모습을 보았다.
한빈에게 흘러나오는 묘한 기세가 느껴졌다.
소대섭은 그 속에서 묘한 희망을 찾았다.
다음 날.
천수장으로 향하는 수호사대 무사들의 눈앞에는 저승사자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천으로 입을 가린 채 산길을 뛰고 있었다.
관도로 가도 될 텐데 한빈은 천수장으로 가는 방향을 굳이 험한 산길로 잡았다.
“헉! 헉!”
장삼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토해 내고 있었다.
“후, 후.”
조호도 숨넘어갈 듯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숨소리에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이들은 한빈이 생각해도 잘 따라오고 있었다.
눈빛에는 무인다운 독기도 잘 묻어 나오고 있었다.
물론 이 독기의 원인이 원망이라는 것을 한빈도 알지만, 훈련 방식은 달라질 리 없었다.
한빈이 외쳤다.
“조금 더 빨리!”
지금 행하고 있는 훈련은 전생에 귀검대가 받았던 기초 훈련이었다.
무인에게 초식과 내공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묻는다면 세 가지를 말할 수 있었다.
첫째가 동체 시력이며 둘째는 호흡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바로 깡.
아무리 험한 전장이라도 악으로 깡으로 버티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한빈의 생각이었다.
그때 한빈이 눈을 크게 떴다.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밀려들어 왔다.
이 허기의 정체는 바로 구결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때 산길을 오르는 무사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에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하게도 그들에게 점이 보인 것이다.
“설마?”
한빈은 눈을 크게 떴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호사대의 모두에게 점이 한두 개씩 보인 것이다.
곳곳에 보이는 점의 정체는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것은 분명히 용린검법의 기본편과 응용편의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었다.
아쉬운 점은 그 점이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잘 생각해 보면 그들의 몸속에 박힌 점은 막 싹을 틔우려는 강낭콩 같았다.
이것은 키워서 채취하라는 하늘의 계시.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옆에서 한빈을 지켜보던 소대섭이 섬뜩한 느낌에 다급히 물었다.
“주군, 왜 그러십니까?”
“훈련의 강도를 높여야겠어.”
“여기서 더 올린다는 겁니까?”
“그래, 훈련은 실전이 최고지.”
“실전이라고요? 주군.”
소대섭이 눈을 크게 떴다.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소 대주는 내가 따로 가르쳐 줄 게 있어.”
한빈의 말에 소대섭이 흠칫하며 물었다.
“저, 저도 머리 박아야 합니까?”
“지금은 말고 나중에…….”
한빈이 씩 웃자 소대섭이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 * *
정확히 이틀이 지나고 그들은 천수장의 정문에 도착했다.
“헉헉.”
“죽을 것 같습니다, 대주님.”
“숨이 막힙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한빈이 뒤를 돌아보니 그들이 처음에 입었던 회색 무복은 이제 황토색이 되어 있었다.
한빈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이제 복면을 풀어도 좋다.”
그 외침과 동시에 수호사대의 무사들은 얼굴을 감쌌던 천을 풀었다.
“휴.”
“이제 살 것 같습니다.”
안도의 한숨이 주변에서 터져 나올 때 천수장의 문이 열렸다.
끼익!
열린 문틈 사이로 모습을 나타낸 한 쌍의 눈동자에 소대섭은 뒤로 물러서며 비명을 토했다.
“헉!”
소대섭의 얼굴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해졌다.
물론 뒤에 서 있던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귀곡장에 귀신이…….”
“대낮에 귀신이 나온다니!”
그들의 반응은 당연했다, 지금 한 쌍의 눈을 내놓고 있는 얼굴은 사람이라 할 수 없이 생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 눈동자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 * *
“오셨어요, 주군.”
“그래, 잘 지냈어? 심 부대주.”
“주군, 이게 잘 지낸 것으로 보이세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심미호였다. 소대섭이 한빈의 옆에서 튀어나와 물었다.
“심 부대주,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혹시 독에라도 당한 건가?”
소대섭의 질문에 심미호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주님!”
“왜, 그러나? 심 부대주.”
“지난번에 대주님도 저와 별반 다르지 않았거든요.”
“아.”
소대섭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기억을 떠올렸다.
밤이면 들려오는 귀곡성과 끊임없이 나타나는 환청과 환상.
그런데 자신의 얼굴이 저랬었다니!
소대섭은 고개를 돌려 한빈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한빈이 씩 웃자 소대섭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천수장에서 지낸다는 것은 단순한 수련이 아니라 고문에 가까웠다.
그때는 며칠을 지내다 보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지만, 처음 오는 자는 단 일각도 잠에 들 수 없다 장담했다.
소대섭은 안타까운 눈으로 수하들을 바라봤다.
모두가 천수장 정문에 정렬하고 있을 때 한빈이 외쳤다.
“이제 들어가자!”
문턱을 넘은 한빈이 주변을 둘러봤다.
이제는 제법 사람이 사는 곳처럼 보였다.
나무와 풀, 그리고 뒤뜰에 심어 놓은 무밭까지.
거기에 깔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니 이제 여기가 자신의 집이구나 싶었다.
물론 한빈의 옆을 따르는 소대섭과 심미호는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대충 식사가 끝나자 한빈이 심미호에게 물었다.
“심 부대주, 내가 준비하라고 한 재료는 준비했나?”
“네, 준비했어요. 주군.”
“그럼, 준비된 장소로 출발하지.”
“네, 이쪽으로 오세요.”
심미호가 앞장서자 소대섭과 나머지 대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는 배부른데 뭘 또 준비하신 거지?”
“그러게 말이야. 재료라고 하는 것을 보니 단단히 준비하신 것 같네.”
모두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착각은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아 산산이 깨졌다.
“저게 뭡니까? 주군!”
소대섭의 외침이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깎아지르는 절벽이 있었다.
그 절벽의 중간에는 익숙한 필체로 갈겨 쓴 현판이 붙어 있었다.
[사신대(蛇身樓)]
한빈의 필체였다.
뱀 ‘사’에 사람의 신체를 나타내는 ‘신’.
풀이를 해 보면 뱀과 사람이 얽히는 망루라는 곳이다.
얼마 전까지 귀곡장이라 불리는 천수장 뒤편에 마련된 기괴한 이름의 망루.
현판의 위쪽을 따라가 보면 그쪽에는 평범한 정자가 위치해 있다.
화산이나 무당에 있을 법한 도가적 분위기의 느낌에 당장 신선이 바둑을 두러 와도 이상치 않을 모양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사신대라는 명칭에 놀란 이들은 위쪽에 정자를 보고 안심하고 있었다.
성인 세 명 정도의 높이로 뻗어 있는 절벽과 정자 사이에는 안전을 위해서인지 밧줄을 쳐 놓았다.
수하들의 안전을 고려한 것인지 중간중간 말뚝을 박아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밧줄을 걸어 놓은 것이다.
누가 봐도 밧줄로 만든 난간이었다.
게다가 위쪽에서는 음식 냄새까지 풀풀 풍기는 게 아닌가.
꿀꺽!
위쪽을 바라보던 소대섭은 포만감도 잊고 침을 삼켰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심미호는 혀를 찼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 했던가?
잠시 뒤 벌어질 일도 모르고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정자를 올려다보는 수호사대를 본 심미호는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 * *
잠시 후, 사신대에 오른 수호사대 무사들은 눈을 크게 떴다.
운치 있는 정자에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음식 때문이었다.
누군가 외쳤다.
“주군, 감사합니다.”
“고단한 수련에 대한 보상을 이렇게 내려 주시다니……. ”
누군가는 며칠 간의 고된 수련이 생각났는지 흐느끼기도 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이 음식은 내가 내리는 포상이 맞다. 단!”
한빈이 말을 끊자 무사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시선을 받은 한빈이 감정 없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음식은 수련이 끝난 자만 먹을 수 있다.”
순간 주변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수련이요?”
“무슨 수련 말이지?”
그 웅성거림이 커질 때 한빈이 검을 들어 정자 기둥을 탁탁 쳤다.
탕!
그 울림에 웅성거림이 바로 멈췄다.
모두를 쓱 훑어본 한빈이 말을 이었다.
“조교 앞으로!”
한빈의 외침에 심미호가 앞으로 나왔다.
한빈이 지시 대신 간단하게 턱짓을 하자 심미호가 절벽 가장자리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기둥 사이에 쳐 놓은 밧줄을 넘어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모습에 소대섭이 비명을 질렀다.
언뜻 봐도 만만치 않은 높이에서 몸을 날렸기 때문이다.
“헉!”
그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심미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시했습니다.”
그 목소리에 한빈이 천천히 절벽 가장자리로 다가가자 모두가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