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먹힐 것이냐 먹을 것이냐? (3)
절정검 이무명.
지금은 강남 지역에서 차기 신진 오룡에 거론될 만큼 무위가 출중한 무인이다.
정씨는 아니지만, 어릴 때 하남정가에 거둬져 그들의 핵심 세력이 된 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상황.
문제는 한빈이 전생에 강호에서 활동할 당시 이무명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들어 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이름을 듣지 못했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였다.
무위가 낮은 무명소졸이거나, 눈먼 칼에 맞아 이승을 떠났거나 말이다.
한빈의 표정을 본 철노가 물었다.
“공자님, 표정이 왜 그러세요? 혹시 무서우신 겁니까?”
“내가 무서워해야 하는 대목인 거야? 철노.”
한빈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요. 심미호 부대주가 맡았을 때보다 더 위협적인 호위조가 됐잖아요.”
“알았어, 철노. 내가 신경 쓸게. 고맙다.”
“네, 가능하면 처소에서…….”
철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휘적휘적 걸어갔다.
다급한 철노가 물었다.
“공자님, 어디 가십니까?”
“내 호위들이 훈련 잘하고 있나 확인해야지.”
“에이, 처소에 계시기로 했잖아요.”
“수호사대의 훈련장이 내 처소잖아.”
말을 마친 한빈은 가벼운 걸음으로 철노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공자님!”
철노도 다급하게 뛰어갔다.
한참을 쫓아가던 철노는 훈련장 옆 나무 뒤에 기대어 있는 한빈을 발견했다.
“공자…….”
“쉿!”
한빈이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철노의 말을 끊었다.
철노는 그 의미를 깨달았다.
지금 수호사대는 끼니도 거르고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물론 끼니를 거른 것은 그들의 자의가 아니었다. 한빈이 시험을 통과하기 전에는 밥도 먹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칼을 눈앞에 들이대고 있었다.
하지만, 한빈이 원하던 경지에 이른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움찔하며 눈을 깜빡이기 일쑤였다.
그때였다.
지나가는 하북팽가의 무리가 발길을 멈추고 수호사대가 하는 훈련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봐, 저거 뭐 하는 거야?”
“저거 사 공자가 시킨 거라잖아.”
“허, 호위들만 불쌍하네, 저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러게 말일세. 저 시간에 초식 한 번 더 수련하는 게 남는 거지. 지난번에 사 공자 호위조 모집할 때 안 들어간 게 천운이었어.”
“하하, 나도 천운이라고 생각하네. 덕분에 이번에 인원이 빈 이 공자의 호위조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 천운이 맞지. 그러고 보니 자네는 하남정가에서 왔다고 했지?”
“그렇다네.”
고개를 끄덕인 무인은 검을 차고 있었다.
그 검집에는 하남정가의 상징인 화려한 구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소대섭의 바로 뒤에서 떠들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들은 소대섭은 손에 쥔 도(刀)를 부르르 떨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파공성이 울리며 검 하나가 소대섭의 눈앞으로 날아왔다.
팡!
소대섭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검 끝이 불과 자신의 한 뼘 앞에서 멈추자 소대섭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것도 잠시, 소대섭은 재빨리 눈을 떴다.
지금 눈앞에서 예기를 발하고 있는 검의 주인이 누군지 알았기 때문이다.
소대섭이 급히 포권하며 말했다.
“주, 주군.”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지금도 시험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빈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박아!”
“네. 따르겠습니다.”
소대섭이 포기한 듯 허리를 숙이자 한빈이 그의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
“소 대주 말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주군.”
소대섭에게는 눈길도 안 준 한빈이 새로 이 공자의 호위조에 편입된 무사들에게 시선을 멈췄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이 공자의 무사 중 하남정가에서 온 무사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포권했다.
“사 공자님을 뵈옵니다.”
“인사는 됐고, 실시.”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지금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 것인가?”
“잘못이라니, 저희는 잘못한 일이 없습니다. 공자님.”
무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한빈이 검지를 곧게 펴서 흔들며 말을 이었다.
“아니지, 아니야. 내가 하나 묻겠네.”
“말씀하십시오.”
“언제부터 하북팽가에서 타인이 수련하는 것을 훔쳐보게 되어 있었나?”
“수련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하남정가에서는…….”
“잠깐, 여기가 하남정가인가?”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타인이 수련하는 것을 절대…….”
무사는 말끝을 흐렸다.
한빈이 흔들던 검지가 수호사대의 무사 하나하나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남정가에서 온 무사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수호사대 호위들의 눈빛은 정파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수호사대 무사들의 눈빛은 며칠은 굶은 승냥이의 그것이었다.
그중 장삼과 조호의 눈빛이 가장 사나웠다.
사실 이 공자의 무사들이 정확히 본 것이었다.
그들은 어제부터 오늘까지 한 끼도 못 먹었으니까.
한빈이 말했다.
“자네들은 소가주 후보가 제시한 수련 방법을 부정하는 죄를 범했지. 그 죗값이 뭔지 아는가?”
말을 마친 한빈은 검을 뽑았다.
스르릉.
그 검은 무사의 팔을 향했다.
동시에 이 공자의 무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한빈이 다시 말했다.
“내 말 못 알아들었나? 나는 무릎을 꿇으라 하지 않았다. 박으라 했지!”
말을 마친 한빈이 그의 팔을 가볍게 그으려 할 때였다.
어디선가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막내야!”
뒤를 돌아보니 이 공자 팽경빈이 멀리서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었다.
한빈은 잠시 검을 멈췄다.
그때 한빈의 앞까지 온 이 공자가 말했다.
“어렵게 구한 호위인데 흠집 내면 그건 도리가 아니지.”
한빈은 이 공자를 살폈다.
자신에게 당하고 끙끙 앓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한빈을 깔보는 듯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웃고 있었다.
표정과는 달리 팽경빈은 흉흉한 기세를 뿜고 있었다.
그의 기세를 담담히 받던 한빈이 그가 앞에 오자 말했다.
“형님, 저는 지금 팽가의 법을 집행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요?”
“팽가의 법이라? 내가 멀리서 듣자 하니 저걸 수련이라고 말하더구나.”
이 공자 팽경빈이 턱짓으로 수호사대를 가리켰다.
그들은 서로의 코끝에 칼을 겨누고 석상이 된 채 노려보고 있었다.
한빈이 물었다.
“저게 수련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저런 것을 광대놀음이라 하지. 그러니 우리 호위가 본 것은 수련하는 모습이 아닌 광대놀이를 본 것이 아닌가?”
순간,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무장에 울렸다.
탕!
탕!
이후 들려오는 생경한 소리.
드드득.
한빈은 힐끔 고개를 돌려 연무장 쪽을 바라봤다.
수호사대의 무사들은 이제 한계를 넘어섰는지 칼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칼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지금 소리는 수호사대의 떨림으로 칼이 청강석 바닥을 긁으며 울리는 소리였다.
한빈은 이 소리가 수호사대가 이제까지 겪은 설움이 폭발한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대주인 소대섭은 그들이 떠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소대섭의 시선이 가장 나이 많은 무사인 장삼에게 향했다.
역시나 그의 칼이 가장 많이 떨리고 있었다.
장삼은 대주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렸는지도 모른 채 이를 악물었다.
장삼이 한빈을 믿고 자신을 맡긴 지 딱 하루.
그런데 한빈이 알려 준 것이라고는 칼이 들어와도 눈을 깜빡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끼니까지 거르고 칼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빡 안 할 담력을 기르는 중이었다.
장삼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난 이 공자가 말한 광대라는 단어에 동의한다.”
“맞아요, 아저씨. 이게 강해지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러다가 저는 향이한테 차이겠습니다.
조호도 입 모양으로 장삼의 말이 동의했다.
드드득.
칼이 청강석을 긁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지금의 소리는 이 공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주군인 한빈을 향한 무언의 항변이었던 것이다.
한빈에게 강해지는 법을 가르쳐 달라던 어제의 말을 후회하지 않는 무사는 없었다.
그들의 속마음과는 달리 한빈은 말없이 웃고 있었다.
그들이 표현하는 분노가 흡족했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그들이 이제야 무인다운 집념을 갖추었다 생각했다. 그게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는 관계없었다.
‘녀석들이 원하니, 아무래도 강도를 올려야겠어!’
한빈이 말없이 웃자 팽경빈이 물었다.
“막내도 인정하는 건가?”
“제가 인정을 한다고요? 무엇을 인정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 표정이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라는 말이냐?”
“저는 저들의 수련이 강해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증명해야지.”
“솔직히 제가 증명할 이유는 없지만, 형님이 원하신다면 보여 드리죠. 제가 어떻게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한빈이 씩 웃으며 팽경빈을 바라봤다.
“증명이라…….”
한빈의 여유로운 눈빛을 받은 팽경빈은 불안감에 말끝을 흐렸다.
그것도 잠시, 팽경빈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하남정가에서 데려온 정예를 바탕으로 구성된 수호이조였다. 거기에 시간이 흐르면 그들을 호위대로 편성해서 명실상부한 세 번째 무력대로 만들 생각이었다.
지금의 전력으로도 누구한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팽경빈이 한빈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옭아맬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한빈이 말을 이었다.
“한 달 뒤 호위끼리 비무로 증명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오호라!”
팽경빈이 눈을 빛냈다. 이번에야말로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걸을 한빈이 대신 말해 주니 팽경빈은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그 표정, 승낙하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번에는 무엇을 걸 것이냐?”
팽경빈은 입맛을 다셨다. 지난번의 빚을 갚을 절호의 기회였다.
팽경빈의 표정을 본 한빈이 말했다.
“지난번처럼 많은 인원을 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호위 한 명을 걸죠.”
“흠, 호위 한 명이라?”
팽경빈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어루만졌다. 그것도 잠시 팽경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어중이떠중이는 이제 필요 없으니까 말이야.”
팽경빈이 수호사대 모두를 깔보듯 바라봤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전 사건의 배신자라 확신하고 있는 딱 한 명이었다.
즉, 심미호를 말함이었다.
이렇게 한 달 뒤 호위대끼리의 비무가 결정되자 연무장에 칼 긁는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드르륵.
드르륵.
몸을 지탱하기도 힘든 그들의 속마음은 하나같았다.
자신들이 이 공자의 정예 무사들과 비무를 벌인다면 승패는 분명했다.
게다가 이 공자는 사 공자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상황.
한 달 뒤 비무에서 자신들의 몸이 찢겨 나갈 것은 자명한 사실.
지금 이런 광대 같은 놀음으로 한 달 동안 강해지리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드드륵.
드드득.
이것은 수호사대의 원망이 담긴 무언의 아우성이었다.
그들의 모습에 한빈이 외쳤다.
“서러워 말아라.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주겠다.”
“…….”
드디어 떨림이 멈췄다. 수호사대 무사들은 어이가 없어 원망까지 사라진 것이었다.
‘빌어먹을!’
‘진짜 뭐 됐네!’
그들은 속으로 각기 다른 푸념을 늘어놨다.
한빈과 수호사대가 교감하는 동안 팽경빈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