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먹힐 것이냐 먹을 것이냐? (2)
한빈이 말했다.
“쉬어라.”
“네?”
“쉬라고.”
무사들이 의아함에 서로를 바라보자 소대섭이 대표로 물었다.
“쉬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군, 분명히 강해지는 첫 번째 방법을 가르쳐 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쉴 때 쉬는 것이 첫 번째 방법이다. 지금은 쉬어라! 다만…….”
한빈이 말끝을 흐렸다.
말끝을 흐리는 한빈의 모습에
가장 앞에 선 소대섭이 눈을 빛냈다. 지금부터 나올 말이 핵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눈빛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한빈이 말을 이었다.
“내가 집합을 걸면 수련 시작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네, 명에 따르겠습니다.”
소대섭이 각 잡힌 포권으로 답하자 뒤쪽에서도 똑같이 복창했다.
“존명!”
“존명!”
그들의 외침에 무심하게 뒤돌아선 한빈이 몇 걸음 가다 멈췄다.
하늘을 올려다본 한빈이 혼잣말을 뱉었다.
“오늘따라 달이 밝군.”
한빈은 뜻 모를 미소를 띠었다.
* * *
새벽, 수호사대 숙소.
달빛이 창문 틈으로 들어가 침상을 비추었다.
그곳에서 모두는 고단함에 시체처럼 뻗어 있었다.
하나 막내 무사 조호만은 밤새 잠을 못 자고 있었다.
한빈이 가르쳐 준다는 강해지는 법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일류 무사가 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앞날에는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이 확실했다.
미래를 약속한 아랫마을 향이와 오순도순 살 집을 장만하는 것도 먼일은 아닐 것이었다.
조호는 자신도 모르게 한빈에게서 받은 은전을 어루만졌다.
그것도 잠시, 신체가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일까?
그의 호기심을 본능이 덮었다. 조호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막 꿈에서 방글방글 웃는 향이의 모습과 마주했을 때였다.
딩!
딩!
갑자기 머리맡에서 징 소리가 울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인의 본능이 조호를 깨웠다.
번쩍 눈을 뜬 조호는 이상한 광경에 멍해졌다.
누군가가 수호사대의 숙소에 들어와 징을 치며 누비고 있던 것이다.
“대체…….”
소대섭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징을 치고 있는 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철노였던 것이다.
딩!
딩!
“연무장으로 집합하십시오. 공자님의 명입니다.”
순간 앉아서 멍하니 철노를 바라보고 있던 소대섭이 물었다.
“주군이 왜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혹시 주군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막내 무사 조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호대의 무사들이 술렁이자 철노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공자님께서 집합이라는 말만 남기셨습니다.”
순간 모두가 눈을 빛냈다.
집합이란 단어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내 무사 조호만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잠이라도 자 둘걸……. 이러다 쓰러지겠네.’
조호는 습관적으로 무복을 입고 연무장으로 뛰어갔다.
아직 휘영청한 달이 비추고 있는 연무장은 조용하기만 했다.
마치 화선지 위에 그려 놓은 풍경화 같았다.
소대섭이 가장 앞에 섰고 조호는 졸지에 앞줄에 섰다.
그들은 싸늘한 새벽바람을 맞으며 한빈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모두는 수군대기 시작했다.
“뭐지? 철노가 장난친 건가?”
“아니면 주군이 장난을 친 거던가?”
“쉿,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게 말이야.”
그들이 수군대고 있는 동안에도 조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바닥을 바라봤다.
요 며칠 무리를 하며 피로가 축적된 데다가 오늘 너무 들떠서 한숨도 못 잤기 때문이다.
조호는 오늘 뜬눈으로 새운 것을 후회했다.
이제는 너무 피곤해서 눈도 감기지 않는 상태. 꿈이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그때였다.
연무장에 선 무리 가운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게 장난으로 보이나?”
분명 한빈의 목소리였다.
조호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붉은 무복을 입은 한빈이 팔짱을 끼고 모두를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다.
모두가 놀란 가운데 한빈이 말했다.
“동료가 몇 명인지도 모르고, 동료들 틈에 누가 끼어 있는지도 모르고…….”
한빈은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려다가 수호사대를 매섭게 바라봤다.
그들은 한빈에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위장을 하기 위해 같은 색 무복을 입은 것도 아니고 저리 튀는 무복을 입었는데 발견을 못 하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 상황은 기척을 지우는 데는 중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한빈의 능력 때문이었다.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을 때 한빈이 한숨을 끝으로 말을 맺었다.
“……휴.”
묘하게 날이 선 한숨 소리에 수호사대의 무사들은 침만 꼴깍 삼켰다.
터벅터벅.
한빈이 소대섭의 앞으로 걸어가 멈췄다.
“대주는 열외!”
그 말에 소대섭이 후다닥 한빈의 뒤로 섰다.
소대섭을 열외시킨 한빈이 가장 앞줄에 선 조호에게 다가갔다.
수호사대의 무사들이 눈을 빛내고 있는 반면, 막내 조호는 다 죽어 가는 생선처럼 생기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한빈이 건수를 잡았다는 듯 씩 웃었다.
조호의 앞에 선 한빈이 용린검법 응용편의 구결을 떠올렸다.
‘전광석화!’
동시에 한빈이 검을 뽑았다.
명장이 만든 검이 새벽 찬바람보다 더 차가운 예기를 뿜으며 소대섭의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어찌나 빠른지 주변에서 구경하던 무사들의 눈에는 한빈의 검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슝!
순식간에 조호의 눈앞에서 멈춘 검.
하지만, 조호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결코 담력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한숨도 잠을 못 잔 그는 지금 서 있기도 힘든 상태였다.
사실 이것은 조호에게 행운이었다.
조호의 멍한 표정을 본 한빈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한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조호는 통과!”
그 외침에 조호가 어기적어기적 대열에서 앞으로 나왔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막내가 통과했는데 통과 못 하는 이가 있다면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 말에 겨우 눈을 뜨고 있던 조호는 자신의 뺨을 찰싹 때렸다.
상황의 심각성을 알았기 때문이다.
쓩!
한빈의 검이 다시 앞줄 무사의 눈앞에서 멈췄다.
무사는 눈을 찔끔 감으며 뒤로 물러났다.
나머지 무사들은 침을 삼키며 한빈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 한빈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한빈이 검을 거두며 외쳤다.
“칼에 겁을 먹는 너희들이 도객이라 할 수 있나? 통과 못 하는 자는 일단 박는다!”
순간 연무장이 술렁였다.
어젯밤 분명 한빈은 그들을 강하게 만들어 준다고 했다.
싸움에서 지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박으라니!
그들은 입을 벌리고 한빈을 바라봤다.
물론 가장 긴장한 것은 맨 처음 시험을 통과하고 이를 구경하고 있던 조호였다.
그의 심정은 좌불안석 그 자체였다.
막내인 자신이 운으로 통과하는 바람에 선배 무사들이 더 혼나는 모양새였다.
게다가 뒤에서 지켜본 바로 한빈은 예측불허, 그 자체였다.
첫 번째 무사에게 뻗은 검은 그리 빠르지도 않았고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검 끝이 들어오는데 눈을 깜빡이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저 행동!
서슬 퍼런 한빈의 눈빛에 첫 번째 무사가 털썩 머리를 박았다.
한빈은 지체 없이 두 번째 무사에게 검을 뻗었다.
역시나 똑같은 상황.
조호에게 펼친 전광석화는 나머지 대원들에게 쓰지 않았다.
나머지 대원을 배려해서는 아니었다.
훈련하는데 용린검법의 공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연무장에 정렬한 무사들이 움찔할 때 한빈은 물러나 있던 소대섭을 불렀다.
“소 대주.”
“네, 주군.”
소대섭은 목소리에도 각이 잡혀 있었다. 한빈은 표정에 변화 없이 물었다.
“무사가 칼을 앞에 두고 눈을 깜빡이나?”
“아닙니다.”
“눈꺼풀로 칼날을 막을 수 있나?”
순간 연무장이 조용해졌다.
눈꺼풀로 칼날을 막는다라? 그것은 불가능한 일.
하지만, 칼날이 눈앞에 오는데 어떻게 눈을 깜빡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잠시 어색한 침묵이 연무장에 맴돈 후 소대섭이 외쳤다.
“아닙니다.”
“칼이 들어올 때 눈을 감는다는 의미는?”
“자살행위입니다.”
그들의 대화에서 정답은 밝혀졌다.
한빈의 의도는 칼날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대답에 한빈이 말했다.
“너희들이 칼날에 겁을 먹는다는 것은 무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뜻. 통과 못 한 이는 오늘 밥도 없다.”
한빈의 말에 연무장이 술렁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빈의 검이 다시 공간을 갈랐다.
슝! 슝!
한빈의 시험에 통과한 이는 가장 먼저 시험을 치른 조호뿐이었다. 조호는 차라리 저 대열에 합류에 머리를 박았으면 하며 자책했다.
그만큼 멀쩡히 서 있는 것이 불편했다.
한빈의 뒤를 따르는 소대섭도 마음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한빈의 장단에 맞춰야 하는 법.
소대섭은 한빈이 지나간 자리에 멀뚱히 서 있는 수하들에게 외쳤다.
“다들 박아!”
툭!
알아서 굴리는 소대섭을 본 한빈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첫날 훈련이 시작되었다.
* * *
훈련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간 무사들의 눈은 실핏줄이 다 터져서 시뻘게져 있었다.
옷을 갈아입을 그들은 하나같이 불만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연장자인 장삼이 말했다.
“아, 너무하는 거 아니야?”
“그러게 말입니다.”
다른 무사가 맞장구쳤다. 뒤쪽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던 조호도 끼어들었다.
“제가 보기에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리 주군이라지만…….”
“그래. 네 마음 불편한 건 아니, 그렇게 소리 높이지 않아도 된다.”
장삼이 조호의 등을 토닥였다.
가장 연장자인 장삼이나 막내인 조호나 이곳에 온 것은 돈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강해지고 싶은 것도 돈 때문이고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것도 돈 때문이었다.
오늘 갑자기 기회가 찾아와 잠시 설레었다. 그런데 이렇게 수련을 마치고 보니 이 길이 맞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장삼은 여차하면 튀기로 결심하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 옆에 있던 조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오후.
한빈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여유롭게 서책을 들고 있었다. 물론 한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허공에 뜬 용린검법이었다.
그때 철노가 다급히 문을 열고 달려왔다.
덜컹.
“공자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큰일?”
“이 공자가 다시 호위대를 꾸렸답니다.”
“흠.”
한빈은 관자놀이를 톡톡 쳤다.
아무래도 정화 부인의 입김이 작용한 것 같았다. 호위조야 돈만 있으면 언제든 꾸릴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호위조를 빼앗긴 공자가 다시 호위조를 꾸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돈을 써야 한다.
이 돈은 분명 정화 부인에게 나왔을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새로운 수호이조에는 하남정가의 고수가 다수 끼어 있다고 합니다.”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하남정가의 고수라면 검객일 것이었다.
팽가에 검을 쓰는 호위?
아마도 한빈이 명분을 만들어 준 느낌이었다.
소가주 후보가 검객이니 검객을 호위로 뽑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정에서 데려오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그게 아니라 절정검 이무명도 왔답니다. 칼을 간 거죠.”
“흠.”
헛기침한 한빈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