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26화 (26/621)

26화. 결자해지(結者解之) (6)

비급의 첫 장을 보니 공(功)이라는 글자가 아홉 개로 줄어 있다.

이것은 열두 시진이 지나면 다시 원상 복구된다는 설명까지 알고 있었다.

한빈은 앞으로 배울 초식에 대해서 상상하며 입맛을 다셨다.

잠시 후.

한빈이 접객당에서 서책을 펼쳐 놓고 차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때 무소율과 그녀의 총관이 들어왔다.

흠씬 두들겨 맞은 데 비해 무소율의 상태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게도 처음 봤을 때의 살기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참교육의 힘인가?”

한빈의 말에 무소율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아닙니다. 이제 내기를 이행해야겠지요.”

“네, 당신의 뜻대로 파혼은 없던 일로 하겠어요. 대신…….”

무소율이 말끝을 흐렸다.

파혼을 없던 일로 한다는 것은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꺾은 사내가 이제까지 있던가?

무소율은 한빈을 인정하고 자신이 양보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때 한빈이 다급하게 외쳤다.

“잠시만요. 누구의 뜻이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저하고의 약혼을 이어 나가고 싶으신 거잖아요.”

무소율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습에 한빈이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왜 그리 생각하셨습니까?”

“아닌가요? 그래서 그렇게 목숨을 걸고 저를 제압하신 거고요.”

무소율이 선심 쓰듯 팔짱을 끼며 한빈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소율의 분위기가 변했기 때문이다.

한빈은 바로 의문을 지우고 용건을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저는 무소율 소저와 파혼하고 싶습니다.”

한빈의 말에 접객당 내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웅성대는 좌중을 둘러본 한빈이 손바닥을 보이며 진정시킨 후 말을 이었다.

“저는 저보다 약한 여인은 싫습니다.”

“네? 그게 무슨…….”

무소율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건 항상 자신이 해 오던 말이다. 그녀의 눈이 단번에 보름달처럼 커졌다.

한빈은 그녀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 동생 무소위의 일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대신 무소위가 하북의 망나니란 이야기가 제 귀에 들리면 저는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무씨검가와 척을 지려고 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하북에 저보다 악명이 자자한 친구는 두고 볼 수 없습니다. 하북의 망나니는 제가 되어야 마땅하니까요.”

이 발언에 모두가 술렁였지만, 이것은 한빈의 진심이었다.

하북팽가의 수치, 하북의 최약체라는 별명에서 벗어나려면 악명을 얻는 것이 더 빨랐다.

“…….”

무소율을 아무 말 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이상한 일이었다.

남에게 무시당하면 참지 못하는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

다만, 한빈에 대해서 호기심이 일어날 뿐이었다.

그녀의 눈빛을 받은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일어나시죠, 소저. 이제부터 저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마시고 혼처를 구하시면 됩니다.”

말을 마친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한빈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가문의 도객들과 비무에서 입은 상처가 벌어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새로운 초식을 쓰며 몸에 무리가 간 느낌이었다.

한빈의 옷에 핏물이 비쳤다.

적색 무복의 밖으로 삐져나오는 피.

멀리서 봤다면 구분이 안 됐겠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이를 눈치채지 못할 이는 없었다.

한빈의 무복에 비친 피를 본 무소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검은 한빈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

‘그런데 저렇게 피가 비친다니?’

의문도 잠시 무소율은 자신의 비기인 비녀 단도가 그에게 닿았다 확신했다.

무소율은 속으로 되뇌었다.

‘내 검이 그의 심장에 닿았으니 이건 비긴 거야!’

무소율이 눈매를 좁힌 순간 상처가 더 벌어졌는지 한빈의 상의는 피로 물들었다.

적색 무복이 더욱 붉어졌다.

지금의 상처는 용린검법의 기본편에 있는 회복 구결로도 치유되지 않았다.

가문의 도객에 이은 무소율과의 비무.

연이은 대결에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한빈은 피가 물들거나 말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무소율을 향해 포권했다.

“죄송합니다. 소저.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총관님, 접대를 부탁드립니다.”

한빈의 정중한 태도에 무소율 옆에 있던 무씨검가 총관을 눈살을 찌푸렸다.

금지옥엽의 무소율을 저리 팬 남자는 한빈이 처음이었다.

그래 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저리 정중하다니!

그게 더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그때 한빈이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총관님, 이제 할 도리를 다 한 것 같습니다. 결자해지라 했습니다. 매듭은 묶은 사람이 푸는 법. 저는 매듭을 다 풀었다고 생각합니다.”

“허.”

총관 이설영은 한숨을 토해 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결자(結者)는 몰라도 해지(解之)는 전혀 아니었다.

결자에 결자를 더한 형국이었다.

하지만, 자꾸 웃음이 나오려는 것은 왜일까?

그만큼 오늘 일은 시원했다.

총관의 업무를 수행하며 쌓인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이설영이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지을 때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총관님, 손님 접대 잘 부탁드립니다.”

무소율 일행을 부탁한 한빈은 자리를 떠났다.

한빈이 자리에서 사라지자 무소율이 다시 코웃음을 쳤다.

“훗, 상처로 보면 비긴 것이 아닌가요? 제 검이 닿지 않은 줄 알았더니 의외로 심각한 상처를 입혔군요.”

자신의 총관에게 묻는 것이었다.

무씨검가 총관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의 상처는 이번 대결에서 입은 것이라 확신했다.

“맞습니다. 아가씨. 어찌 보면 아가씨가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이지요.”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그들의 모습에 하북팽가의 총관 이설영이 끼어들었다.

“말씀 중 죄송하지만, 저희 막내 공자님은 두 시진 전 팽가의 도객 다섯 명과 연속으로 비무를 벌이셨습니다.”

“…….”

무소율은 아무 말 없이 입을 벌렸다.

동시에 한빈과 자신의 비무를 복기하며 전후 사정을 기억 속에서 떠올렸다.

그는 두 시진을 늦었다.

그럼 도객과의 비무 때문에?

동시에 한 가지 가정이 자신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만약 자신이라면?’

하지만, 의문도 잠시 무소율은 해답을 찾았다는 듯 이설영을 바라봤다.

“고작 이류 도객 따위는 저도 상대할 수 있어요.”

이것이 무소율이 찾은 해답이었다.

이류 정도의 무인과 비무를 한다?

열 명이라도 두렵지 않았다.

옆에 있던 무씨세가의 총관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하하.”

그들의 모습에 하북팽가의 총관 이설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도 잠시 그는 웃음을 터뜨리려다 급하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흠.”

총관 이설영은 미안한 표정을 이었다.

총관이라는 신분도 잊은 채 손님에게 의도치 않게 웃음을 보인 것이다.

무소율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웃으시죠?”

“이류 도객이 아니라 절정을 앞둔 일류 둘에 절정 도객이 셋이었습니다.”

총관 이설영은 왼손으로는 손가락 두 개, 오른손으로는 손가락 세 개를 폈다.

“네?”

무소율이 눈을 크게 뜨자 이설영이 말뚝을 박듯 확언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무소율이 어깨를 가늘게 떨며 자신의 총관을 바라봤다.

“거짓말이겠죠?”

“…….”

무씨검가의 총관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애먼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들의 모습을 본 하북팽가의 총관 이설영은 표정 관리를 위해 차를 들이켰다.

찻잔에 담긴 물이 살짝 떨렸다.

이설영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있던 것이었다.

무소율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그녀의 시선은 한빈이 나간 문에 머물렀다.

* * *

처소로 돌아가던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근처에서 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때 철노가 달려왔다.

“공자님! 괜찮으신 겁니까?”

“왜 이리 호들갑이야? 철노.”

“무씨검가에서 공자님을 죽이려고 비무를 한다고 해서 급하게 달려왔습니다.”

“철노가 막아 주게?”

“그건 아니지만요…….”

철노가 말끝을 흐릴 때 소대섭과 심미호도 달려왔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주군!”

“그만합시다. 난 괜찮으니.”

한빈은 근처에서 느꼈던 기를 그들이라 생각하고 다시 처소로 향했다.

한빈이 접객당에서 멀어질 때 접객당의 뒤쪽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셋째, 아까 그놈 비무 봤는가?”

“네, 봤습니다. 그런데 폐관하신다고 가시지 않았습니까? 형님.”

“소란이 일어나서 한번 확인했다.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한빈이가 쓴 마지막 초식 말이다……. 아니야, 됐네.”

팽강위는 손을 저었다.

팽대위도 그에 맞춰 고개를 저었다.

무엇을 물어보려는지 팽대위도 알고 있지만, 한빈이 쓴 마지막 초식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팽대위가 고개를 갸웃하며 가주 팽강위를 바라봤다.

“형님, 녀석의 성격이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성격이라?”

팽강위가 눈매를 좁혔다.

한빈의 성취만 생각했었다.

팽대위의 말을 듣고 보니 한빈이 오늘 보여 준 모습은 마치 악귀를 생각나게 했다.

‘무엇이 녀석을 변하게 만들었을까?’

팽강위는 바로 의문을 지웠다.

강해지는 데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 * *

그날 밤 하북팽가 별채 중 한 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웃음의 주인은 가주의 둘째 부인인 정화 부인.

그녀는 뭐가 그리 좋은지 입가에 가득 웃음을 띠고 있었다.

“호호. 막내가 그렇게 복을 걷어찼다는 거지?”

“네, 어머니.”

몸을 겨우 회복한 이 공자 팽경빈이 고개를 숙였다.

“복을 그리 걷어차다니! 아직 어리구나.”

“네, 맞습니다.”

“그런데, 막내의 무위가 그리 놀랄 정도였더냐?”

“주변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내공은 그리 강하지 않으나 공격이 노련했다고 합니다.”

말을 마친 팽경빈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팔을 힐끔 봤다.

달아 놨다는 한빈의 말이 아직도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그때 정화 부인이 말했다.

“알았다. 이젠 신경 쓰지 말아라.”

“네, 어머님.”

“그만 가 보고.”

“네, 편히 쉬십시오.”

팽경빈이 조용히 처소를 빠져나가자 정화 부인은 조용히 서책 한 권을 꺼냈다.

그녀는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예쁜 난들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있었다.

이 책은 정화 부인의 화집이었다. 그녀가 그린 난을 책으로 묶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책을 넘기는 정화 부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책장을 넘기던 정화 부인의 손이 멈췄다.

그곳에는 다른 곳보다 더 많은 난이 그려져 있었다.

정화 부인은 펼쳐 놓은 난 책 위에 다시 난을 그렸다.

휙.

붓놀림이 마치 칼을 긋는 것처럼 예리하다.

정화 부인은 자신이 그린 난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사(四)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곳에 적힌 숫자는 사뿐이 아니었다.

자신의 자식을 나타내는 일(一) 이(二) 등의 숫자가 책장의 순서대로 있었다.

이것은 정화 부인의 버릇이었다.

앞으로 눌러야 할 상대를 화선지에 써 놓고 그걸 난을 치듯 긋는 것이다.

난 하나하나를 치며 그녀는 마음의 칼날을 세웠다.

이제까지는 그녀의 살생부에 이름을 올릴 필요가 없었던 한빈이었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그녀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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