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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22화 (22/621)

22화. 결자해지(結者解之) (2)

그에 맞춰 이세명도 잔을 들었다.

통보까지 했으니 친우에게도 빚은 없었다.

그런데 손해 보는 기분은 왜일까?

게다가 얼마 전 보았던 하북팽가의 막내 한빈이 눈에 밟히는 것은 왜일까?

술잔을 기울이던 이세명이 말했다.

“자네가 부럽군.”

“무슨 시답잖은 소린가? 그럼 지금이라도 장가를 가든가.”

“장가가기엔 딸린 식구가 많은 거 알잖나.”

“낭인들을 말하는 겐가?”

“…….”

이세명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 * *

다음 날 오후, 하북팽가 가주전.

한빈은 검 한 자루를 들고 가주전에 도착했다.

“가주님, 일을 마치고 왔습니다.”

한빈의 외침에 태사의에서 가주 팽강위가 천천히 내려왔다.

한빈에게 걸어오던 팽강위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정 명장이 만든 도(刀)는 대체 어디 있느냐?”

“여기 있습니다.”

한빈은 조심스럽게 허리에 찬 검을 풀었다.

검을 본 팽강위의 눈썹이 꿈틀댔다.

“이게 대체 무엇이냐?”

“저의 애병(愛兵)입니다.”

팽강위의 눈이 한없이 커졌다.

“그럼 도가 아닌 검(劍)을 만들었다는 말이더냐?”

팽강위가 눈을 가늘게 뜨자 한빈이 물었다.

“송구하지만, 제가 답하기 전에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아라.”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가주의 마음을 녹이려면 쉽지 않을 것이었다.

심호흡한 한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팽가의 힘이다.”

“가주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황제는 검을 들어야 합니까. 도를 들어야 합니까? 그리고…….”

한빈은 잠시 말을 끊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한빈의 질문은 가주 팽강위에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에게 던지는 화두였다.

팽강위가 말했다.

“계속 말해 보아라.”

“그럼 장군은 도를 들어야 합니까? 검을 들어야 합니까?”

“…….”

가주가 말없이 빙긋 웃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한빈이 이번에는 좌중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황제의 힘은 장군에게 나오고, 장군의 힘은 군사에게 나옵니다. 그 힘에 모양이 있습니까?”

한빈의 질문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뒤쪽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껄껄.”

한빈이 고개를 돌렸다.

팽강위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팽강위가 만족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한빈이 소가주 경합의 의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인과 무인의 경쟁이 아닌 가문과 문파, 가문과 가문의 경쟁을 이끌어 가야 하는 것이 가주의 자리였다.

그것은 경쟁이 아닌 전쟁.

팽강위의 웃음은 한동안 이어졌다.

그의 웃음에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한빈이 검을 가지고 온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팽가의 이름 아래 합법적으로 검을 쓰는 것을 허락받기 위함이었다.

이십 년 가까이 검을 다루었다.

물론 도를 못 쓴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검이 쓰기에 편했다.

언제 목에 칼이 들어올지 모르는 강호에서 그 차이라면 대놓고 검을 쓸 수 있도록 허락받는 것이 맞았다.

게다가 지금 익히고 있는 것이 용린검법.

기본편이 끝나면 이제부터 초식이 나올 텐데, 그때는 꼭 검을 써야 했다.

한빈의 목표는 일단은 팽가.

그 목표를 이루게 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했다.

한참을 웃던 팽강위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럼 네가 만든 애병 좀 보자.”

팽강위가 손을 내밀었다. 묵철이 빠진 검이 얼마나 엉망인지를 보기 위함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한빈이 두 손으로 공손히 검을 내밀었다.

말없이 받아 든 팽강위가 바로 검을 뺐다.

스르릉!

검이 뽑히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실내에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팽강위가 뽑은 월아에 집중되었다.

수군대는 원로와 무사들.

“역시 묵철을 섞으면 보검이 된다는 이야기가 맞았어.”

“그런데, 첫째 공자와 둘째 공자가 만든 칼하고는 조금 다르지 않아?”

“그러고 보니 날이 서 있다는 게 여기서도 보이네.”

“역시 묵철이군.”

모두가 수군대는 가운데 팽강위는 눈매를 좁혔다.

묵철을 팔았다더니 이건 어찌 된 일인가?

묵철로는 이런 검을 만들 수 없다.

날에 서린 예기와 검신에 담긴 청아한 기운.

이건 강북, 아니 중원을 통틀어서도 찾아보기 힘든 명검이었다.

묵철을 판 사실은 일단 덮기로 했다.

이제는 모든 것을 한빈에게 넘겨야 했다.

소가주 후보로서 자격이 있는지를 정하는 마지막 단계.

그것은 하북팽가의 일원들을 설득하는 것이 될 것이었다.

팽강위가 검을 한빈에게 다시 건넸다.

“다시 가져가거라.”

“네, 가주님.”

한빈이 받아 들었다. 지금 가주의 눈빛에서 한빈은 그 뜻을 알았다.

‘내가 설득하라는 말이지?’

한빈이 보이지 않게 웃었다.

팽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팽가를 이용해야 했다.

그를 위해서는 지금은 팽가 내부에서 미친 존재감을 보여야 했다.

일단 그런 판이 지금 마련되어 있었다.

한빈은 주위를 둘러보며 원로와 당주, 각주들의 눈빛을 살폈다.

역시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못 할 것도 없었다.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검집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작게 웃었다.

그때 마침 팽강위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런데 가주 팽강위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재빨리 표정을 지운 한빈이 그의 웃음에 답하듯 포권했다.

“가주님, 허락을 부탁드립니다!”

“무엇을 말인가?”

“제가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때 옆에 있던 원로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가주, 이건 아니라 보오.”

그를 이어 다른 목소리도 끼어들었다.

“소가주가 되고 그가 가주가 된다면, 팽가의 신물이 될 병기입니다. 그 병기가 검이라면 팽가의 녹을 먹는 이들이 수긍하겠습니까?”

“맞습니다, 가주님!”

가주전에 있던 원로와 각주들이 목에서 피가 나오도록 외쳤다.

한빈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토해 냈다.

한빈이 도가 아닌 검을 들고 온 것은 잘못된 것이 맞았다.

하지만, 얼굴이 벌게지도록 열을 높일 이유는 없었다.

한빈이 모두를 보며 말했다.

“도객이 아닌 검객이라 인정 못 하시겠다고 하시면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한빈의 말에 다시 소란이 일어났다.

“검객이라고?”

“막내 공자가 언제 검술을 익혔어?”

“팽가에 검술이 있던가?”

“팽가의 수치라 불리는 게…… 흠.”

대놓고 수군대는 소리에 가주 팽강위는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재미있다는 듯 아수라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빈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팽강위의 눈에는 이것도 소가주 경합의 일부분인 것 같았다.

한빈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제가 어떻게 하면 원로와 각주 여러분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내공은 실리지 않았으나 기세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수군대던 원로와 각주들의 시선이 한빈에게 모였다.

조용히 바라볼 뿐 아무도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

그때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검이 장신구가 아니라면 인정하겠소.”

모두가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그는 하북팽가의 정보를 담당하는 주작각의 젊은 각주 가기군이였다.

그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팽가를 지탱하는 것은 역시 힘의 논리였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가주 팽강위가 입을 열었다.

“비무를 허락한다.”

짧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두가 알았다.

그때 한빈이 손가락을 펴며 외쳤다.

“다섯 명!”

한빈의 외침에 실내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다섯 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점점 소란이 커지자 한빈이 폈던 손가락을 튕기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딱!

모두가 한빈을 보며 침을 삼켰다.

잠시 뜸을 들인 한빈이 말을 이었다.

“내 검이 장신구가 아니라는 것을 도와줄 사람은 나오시오. 선착순 다섯 명!”

한빈의 말을 간단했다.

다섯 명과 비무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명백한 무리.

하북의 최약체로 소문난 한빈이 다섯의 도객을 상대한다?

그것은 섶을 지고 불로 뛰어가는 것, 아니 그 위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모두는 다섯이 아닌 첫 번째 도객을 상대하는 것만으로 한빈은 뼈도 안 남을 것이라 상상했다.

그 모습에 군중이 속닥이기 시작했다.

“저래 놓고 다섯 도객한테 졌다고 변명하는 거 아닌가?”

“뭐, 첫 번째 도객에서 무너질 텐데.”

“역시 삼 공자와 이 공자를 꺾은 것은 암수였어.”

상황은 묘해졌다.

그들이 보는 한빈은 약해도 너무 약했다.

지나가다가 나뭇가지 하나 꺾는 행위가 자랑할 일이던가?

그들이 생각하는 한빈과의 비무가 그랬다.

가장 먼저 비무의 시초를 제공한 주작각주 가기군만이 멀뚱거리며 한빈을 바라보고 있다.

계속 웅성대는 군중의 목소리에도 한빈은 작은 미소를 피워 냈다.

한빈이 군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비무 신청은 여기까지 받겠습니다. 더 없습니까?”

한빈은 주변을 쓱 훑으며 모두를 눈에 담았다.

그중 가끔씩 보이는 점에 주목했다.

한빈이 다시 외쳤다.

“그럼 여기까지 하고 비무를 청해 주신 가기군 각주와 일전을 치르겠습니다.”

한빈이 가기군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받은 가기군이 팽강위를 향해 말없이 포권했다.

한빈과 겨루겠다는 말이었다.

이제 모두의 시선이 한빈에게 향했다.

한빈도 검집을 든 채 깊숙이 포권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동시에 원로와 각주들이 탁자를 밀어 비무 공간을 만들었다.

가기군과 마주 선 한빈의 눈빛이 반짝였다.

무대가 펼쳐지자 일렁이는 점이 또 나타났다.

주작각주 가기군의 복부에서 일렁이는 점.

꿀꺽.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 모습을 본 좌중이 다시 웅성대기 시작했다.

“뭐야? 저 표정은?”

“혹시……. 주화입마?”

말도 안 되는 추측 속에 한빈은 상대와 자신의 초식만을 떠올렸다.

주작각의 가기군은 절정을 앞둔 젊은 도객이라 불린다.

아직은 일류라는 이야기였다.

정보 수집과 사람 다루는 데 능한 군사 역할을 하는 무인이었다.

이것은 한빈에게 유리한 점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빈과 지금의 한빈은 전혀 다른 인물이라 할 수 있으니까.

그때 가주 팽강위가 거도(巨刀)로 바닥을 찍었다.

쾅.

내공이 실린 가주의 칼 소리가 비무의 시작이었다.

한빈의 판단은 빨랐다.

가기군과의 거리는 고작해야 세 걸음.

한빈은 재빨리 뒷걸음쳤다.

동시에 다음 검을 뻗었다.

쉭.

한빈의 검이 쏜살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동시에 검집 그대로 내뻗은 검 끝이 가기군의 복부를 향했다.

상대가 검을 뽑기를 기다리는 가기군은 아직 허리에서 도를 뽑지 못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한빈의 공격에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파파팍!

재빠른 보법으로 세 걸음 이상 물러선 가기군은 눈을 크게 떴다.

아직도 한빈의 검 끝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누가 보기에도 한빈의 검술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처음 보는 초식에 만만치 않은 내공이 느껴졌다.

가기군은 의문이 해결되기도 전에 복부에 통증을 느꼈다.

퍽!

가기군이 배를 잡고 숨을 몰아쉴 때 한빈은 쓰러진 가기군을 눈앞에 두고 활짝 웃고 있었다.

쓰러진 가기군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허공을 올려다보는 한빈의 모습은 오만하기까지 했다.

[용안(龍眼)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공(功)을 획득하셨습니다.]

공(功)이라는 글자에 한빈의 가슴은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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