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결자해지(結者解之) (1)
정철민은 월아에 버금가는 명검은 없었다고 전생에도 말했었다.
예상 못 한 한빈의 태도에 정철민이 물었다.
“자네, 괜찮은가?”
“네, 괜찮습니다. 검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잠시 흥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하하. 자네와 내가 만든 거니, 나에게는 반만 고마워해도 된다네.”
“…….”
한빈은 아무 말 없이 검을 바라봤다.
달빛을 벨 것 같은 예기가 검날에 흐른다.
탁한 기운을 흡수할 것 같은 청아한 분위기까지.
분명 월아가 맞았다.
물론 지금은 갓 태어난 이름 없는 검이지만 말이다.
훗날 검성으로 불리게 될 서문무결에게 가지 않고 한빈에게 왔다는 것은 미래가 변했음을 뜻한다.
그것도 한빈에게 유리한 쪽으로.
한빈은 검집을 더 움켜쥐었다.
한빈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정철민에게 포권했다.
그때 정철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말일세…….”
말끝을 흐리는 정철민.
묘한 표정에 한빈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만든 물건 중에 최고라 자부하지만, 뭔가 빠진 느낌이야. 그런데 그게 뭔지 모르겠네.”
“허전하다고요?”
“용을 그려 놓고 눈을 안 찍은 느낌이랄까? 허허, 내가 괜한 말을 했군.”
정철민의 말에 한빈은 검신을 빠르게 훑었지만, 어느 곳에도 부족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한빈이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완벽합니다.”
“그리고, 내가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자네의 검무를 보고 싶네.”
“…….”
“무리한 부탁인가?”
“아닙니다. 지금 보여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한빈은 월아를 허리에 차고 대장간 앞마당으로 나왔다.
달빛을 한 번 바라본 한빈이 검을 뽑았다.
스릉.
월아가 달빛 아래 자태를 드러냈다.
여인의 나신을 연상시키는 매끈한 검신.
하지만, 요염한 느낌은 전혀 안 들었다.
월아는 선기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휙.
한빈이 달빛을 가르듯 허공을 그었다.
허공에 검을 놀리던 한빈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바로 이게 천하제일검의 손맛이었다.
물론 월아가 천하제일검이 되려면 자신이 천하제일인이 되어야 했다.
휙.
한빈은 몸을 돌려 동서남북의 방위를 밟아 나가며 검법을 펼쳤다.
이 검법은 전생에 익혔던 일검팔식.
하나의 움직임에 여덟 가지 변화를 담고 있는 검법이었다.
대장간 공터 한쪽에서는 정철민과 심미호 그리고 철노가 한빈의 검술을 보고 있었다.
한빈의 검술을 보던 심미호가 입을 딱 벌렸다.
비록 내공은 부족하지만, 한빈의 검술은 군더더기 없었다.
팽가 내에서 한빈이 검을 수련했던 적이 있던가?
심미호가 입을 벌리고 한빈의 검술을 바라보자 철노가 그녀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심 부대주, 저게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그럼요. 저런 움직임은 저도 처음 봅니다. 내공은 이류지만, 초식은 절정 무인도 부럽지 않다고 생각해요.”
“허, 그 정도예요? 역시 제가 공자님을 잘 보살핀 성과가 지금 나타나네요.”
그들이 수다를 이어 나갈 때 한빈의 검이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찔러 들어가자 파공성이 공터에 울렸다.
팡!
그 동작을 마지막으로 한빈은 월아를 갈무리했다.
그때 정철민이 천천히 걸어왔다.
“이제야 내가 허전하게 느꼈던 것이 뭔지를 찾았네.”
“그게 무엇인지요?”
“검을 사용할 사람인 게지. 자네의 검무를 보니 이제야 용의 눈을 찍은 것 같군그래.”
“……칭찬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 숙인 한빈은 이번에는 심미호와 철노를 바라봤다.
철노는 눈을 반짝이고 있고 심미호는 넋이 나간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다.
한빈이 다가가자 심미호가 물었다.
“지금 그 검법의 이름이 무엇인가요?”
“왜, 배우고 싶어?”
“부탁하면 가르쳐 주실 건가요? 혹시 이번에도 비밀인가요?”
“아니, 이번에는 비밀이 아니야. 가르쳐 줄 테니 걱정 마.”
“아, 생각해 보니 저는 검이 아닌 도를…….”
“괜찮아. 원래 이건 도법이었으니까. 기대해도 좋아. 돌아가는 대로 내가 확실히 전수해 줄게.”
이건 진심이었다.
일검팔식은 원래에는 도법에서 유래했다.
일도팔식이란 도법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귀검대만의 무공이었다.
이 도법은 수호사대에게 잘 어울릴 것이었다.
뭐, 배우는 데 고통이 좀 따르겠지만 말이다.
한빈이 피식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한빈의 뒷모습을 본 심미호는 묘하게 한기가 들었다.
“왜 그러지? 몸살 기운이 도나?”
“저도 이상합니다, 심 부대주.”
철노도 이상한 한기에 어깨를 살짝 떨었다.
* * *
한 시진 후.
한빈은 대장간 입구를 나섰다.
“자네, 왜 이 야밤에 떠나는 건가?”
“죄송합니다. 제가 급히 확인할 게 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야밤에 떠나다니 서운하네.”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한빈은 깊이 포권한 후 대장간을 떠났다.
그때 한빈의 귓가에 정철민과 정소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나 팽 오라버니랑 결혼할래요.”
“그래, 내가 어떻게든 여기 데려다 놓으마.”
정철민이 답했다.
그들은 마치 한빈이 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떠는 것 같았다.
그들의 대화에 한빈은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다급히 움직이는 한빈의 모습에 심미호가 급히 따라갔다.
한침을 따라가던 심미호가 물었다.
“주군, 왜 지금 가시는 거예요?”
진작 물어봤어야 하지만, 비밀이 많은 한빈이기에 참다 참다 이제야 물어본 것이다.
한빈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확인해 볼 게 있어서 그래.”
“귀곡, 아니 천수장에서요?”
“맞아, 심 부대주.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야 할 것 같다.”
말을 마친 한빈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심미호도 한빈에게 더는 정보를 들을 수 없을 것 같자 같이 속도를 높였다.
다만, 철노만이 조금씩 뒤처졌다.
“같이 가요!”
철노의 외침을 뒤로한 채 한빈은 서둘러 움직였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천수장 앞에 섰다.
밤에 보니 더욱 으스스하게 느껴지는 풍경이 그들을 맞았다.
떨어져 나간 문은 소대섭이 보수했는지 제대로 붙어 있었다.
한빈이 대문을 열었다.
덜컹.
그 소리에 안쪽에 있던 소대섭이 뛰어나왔다.
헐레벌떡 달려온 소대섭이 한빈에게 포권했다.
“주군!”
“그래, 고생했어. 소 대주.”
한빈이 소대섭의 어깨를 토닥이자 소대섭이 고개를 들었다.
순간 달빛에 드러난 소대섭의 얼굴.
그의 얼굴을 본 심미호와 철노가 놀라 뒷걸음쳤다.
“앗.”
“헉.”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둘 다 왜 그래?”
“저, 저기 대주님의 얼굴이 왜 저래요?”
심미호가 소대섭의 얼굴을 가리키자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소대섭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누가 보면 강시라 해도 믿을 정도로 눈 주위는 푹 꺼져 있었고 피부는 푸석푸석해 보였다.
마치 며칠 밤을 새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극양지기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다.
거기에 더해 밤만 되면 흘러나오는 귀곡성에 잠을 못 이뤘을 것이었다.
바람 소리인지 귀신 소리인지 구분 안 가는 소리가 천수장을 가득 채웠다.
흐흐-윽!
휘이-잉!
순간, 심미호의 얼굴이 파래졌다.
“앗, 저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저 소리 때문에 며칠 밤을 꼬박 새웠잖아. 하북에서 제일 유명한 폐가가 된 이유가 다 있었어. 정말…….”
소대섭이 원망 어린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심미호도 한빈을 바라봤다.
알고도 수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는 원망 서린 눈빛이었다.
물론 소대섭을 혼자 놔둔 이유는 간단했다.
호위대의 수장이라면 담력도 그중 최고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것을 견딘다면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눈빛을 받은 한빈이 말했다.
“교대!”
“…….”
모두는 아무 말 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소대섭은 날 따라 본가로 가고 이번에는 심미호 부대주가 여기에 남아 관리한다. 지금 보니 반 정도는 정리된 것 같고 나머지 일은 믿고 맡겨도 되겠지?”
“조, 존명! ”
포권한 심미호의 주먹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하북 천화루.
한빈이 이세명과 거래했던 바로 옆 전각.
그곳은 하북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천화루였다.
한 층씩 올라갈수록 곱절로 뛰는 음식 가격 때문에 평소에 오 층 이상은 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가장 높은 층인 구 층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주향(酒香)이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날아가던 새도 취해 쓰러질 정도로 독한 화주의 향기는 천화루의 구 층과 어울리지 않았다.
주르륵.
다시 화주가 잔에 담기자 거구의 사내가 그것을 한 번에 털어 넣는다.
꿀꺽.
아무도 없는 천화루 구 층에 술 따르는 소리와 마시는 소리만이 번갈아 울릴 때 문이 열렸다.
스르륵.
문을 열고 누군가 천천히 걸어왔다.
화주를 입에 털어 넣은 이가 시선을 돌렸다.
다가오는 이는 점소이도 기녀도 아닌 희끗한 머리에 백의 서생의 복장 남자였다.
그는 바로 낭인왕 이세명.
이세명이 자리에 앉았다.
그가 앉은 자리에는 안주와 하얀색 도자기의 병에 담긴 술이 있었다.
뚜껑을 열자 청아한 향기가 사방을 덮는다.
이세명이 자신의 잔에 술을 부었다. 그러고는 음미하듯 살짝 입술을 적셨다.
그때 상대방이 말했다.
“낭인왕이라는 별호가 부끄럽지 않나? 그렇게 깨작깨작 술을 마시다니.”
“하하. 자네가 내 술값을 대신 내준 적이 있던가, 도왕?”
이세명이 주향이 날아갈까 재빨리 도자기의 마개를 덮었다.
이세명과 마주한 이는 바로 하북팽가의 가주, 팽강위였다.
둘은 세간에 앙숙으로 소문났지만, 실제로는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우였다.
둘은 조용한 자리를 갖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은밀한 거래도 가끔 오갔지만.
팽강위가 말했다.
“자네가 날 불러낸 건 오랜만이군. 대체 무슨 일이지?”
“자네 아드님 때문이라네.”
“내 아들놈 때문이라?”
팽강위가 고개를 갸웃하자 이세명이 술잔을 매만지며 상대를 응시했다.
눈빛을 받은 팽강위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간만에 만나서 속내를 감추고 나를 떠보는 건가?”
“역시 모르는군.”
“뭘 모른다는 말인가?”
“마지막 소가주 후보가 나를 찾아왔더군.”
“흠.”
“뭐, 나와 계약 하나를 하고 갔어. 나한테 득인지 실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나? 내가 소가주 후보로 세운 걸 보면 결정권은 그놈한테 있는 것을…….”
“득인 것 같으면서도 뭔가 속는 느낌이 들어서 그러네. 심계가 깊은 놈이 손해 볼 짓을 한다라? 말이 안 되거든.”
“나는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떠난 새끼 호랑이를 말릴 생각이 없네.”
“자네, 그거 아나?”
“무엇을 말인가?”
“내가 관리하는 점포에 묵철이 들어왔더군.”
“흠.”
팽강위의 눈썹이 꿈틀대자 이세명이 놀리듯 말했다.
“내가 말해 줘야 할 것 같아서 그러네. 나중에 물리자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팽강위는 바로 표정을 수습하고 답했다.
“그것도 그놈이 한 일. 나는 관계없으니 알아서 하게. 그 일이 전부라면 술이나 마저 하지.”
팽강위는 화주를 병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