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월아(月牙) (4)
이제껏 이런 일은 없었다.
선대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일이었다.
정철민이 허탈하게 웃자 한빈이 말했다.
“저는 평범한 검이면 족합니다. 만들어 줄 수 있으실는지요. 재룟값은 별도로 드리겠습니다.”
한빈의 말에 정철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도가 아니라 검(劍)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검이라고 했습니다.”
“하북팽가에서 검이라고요?”
“검이든 도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날만 잘 서 있으면 장땡이지요.”
천연덕스러운 한빈의 말에 정철민이 다시 웃었다.
“허허.”
하북팽가에서 검을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일반 무사의 검이야 근처 대장간에서 만들면 되고 이곳에 들어온 의뢰는 모두 하북팽가의 직계가 쓸 도였으니…….
검을 만들든 도를 만들든 관계는 없지만, 하북팽가와의 관계가 거슬렸다.
긴 웃음의 끝에 정철민이 결심한 듯 말했다.
“공자. 미안하지만…….”
그때였다.
정철민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할아버지.”
고개를 돌린 정철민의 눈이 커졌다.
지금 달려오는 아이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신의 손녀 정소연이었다.
정철민은 한빈과의 대화도 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연이 왔느냐? 얼마나 컸는지 보자. 하하.”
“할아버지!”
달려오던 순간, 정철민에게 달려와 안기려던 정소연이 멈췄다.
그 모습에 정철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손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뜻밖에 한빈이 자리한 곳이었다.
정철민이 물었다.
“소연아, 무슨 일이냐?”
“저, 그게…….”
정소연은 석화교에 있었던 일을 털어놨다.
다 듣고 난 정철민의 입에서 다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허허. 그놈이 우리 소연이를 건드렸다고? 이제부터 무씨검가와의 거래는 없다.”
“할아버지 무씨검가 망나니가 저를 괴롭힌 게 아니라 저 대협님이 저를 도와주신 게 중요한 거잖아요.”
“그래. 무씨검가…….”
대화 도중 뭔가 생각났는지 정철민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려 한빈을 바라봤다.
“어쩌자고 그런 일을 저지르신 겁니까? 무씨검가면 사 공자와…….”
“저와의 관계보다는 강호의 정의가 먼저입니다.”
물론 강호의 정의는 안중에도 없고 모든 것이 구결을 위해서였다.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미소 짓자 정철민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강호의 도의를 위해 자신의 약혼녀가 있는 집안과 척을 질 각오를 하는 이가 무림에 누가 있겠는가? 그런 이는 중원 어디에도 없을 것이었다.
그 은혜를 입은 것이 바로 자신의 손녀라고 하니, 정철민의 가슴은 더욱 뛰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감정을 수습한 그가 다시 물었다.
“제가 만든 검이 필요하십니까?”
“네, 필요합니다. 명장님. 그리고 말씀 낮추시지요. 명장님은 대대로 저희 가문을 도와주시는 은인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하북팽가의 이 총관님과 막역한 사이 아닙니까? 그분은 저에게 할아버지와 같은 분입니다. 말씀 편히 하시지요.”
한빈이 빙긋 웃자 정철민이 턱을 매만지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럼 편하게 대하겠네.”
“네, 저도 그게 편합니다.”
“그럼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게.”
뒤돌아선 정철민은 정소연에게 받은 서찰을 펼쳤다.
서찰을 읽고 있던 정철민의 눈이 커졌다.
정철민은 며칠 전 선대의 주조 비급을 발견해서 그 해석을 정소연의 아비에게 맡겼다.
그 해석본이 지금 손에 든 서찰이었다.
[전설의 도검은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인의 손길에 따라…….]
제작 비급을 읽어 나가던 정철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비급에 맞춰, 묵철을 잃어버린 하북팽가의 직계가 왔다? 우연일까?’
정철민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닌 인연이었다.
서찰을 다 읽은 정철민이 평온한 표정으로 작업장으로 걸어갔다.
모두가 그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했다.
정소연도 고개를 갸웃하다가 작게 외쳤다.
“할아버지!”
정소연이 불렀지만, 정철민은 귀신에라도 홀린 듯 작업장으로 향했다.
정철민의 뒤를 정소연이 따르자 자리에 남은 한빈은 차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에 심미호가 물었다.
“혹시 아셨습니까?”
한빈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뭘 말하는 거야? 심미호 부대주.”
“저 아이가 정철민 명장의 손녀라는 걸요?”
“내가 어떻게 알겠어. 심 부대주는 그거 알아?”
“…….”
“강호에서는 도리를 지키다 보면 운은 따라오는 법이야.”
한빈의 말에 심미호와 철노가 서로를 바라보며 눈짓했다. 종잡을 수 없는 한빈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들이 눈빛을 교환하고 있을 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지금 한 말 농담이니 가슴에 절대 새기지 마. 그 도리라는 거 지키다가 등에 칼 맞기 십상이니까. 알았지?”
“…….”
심미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한빈을 바라봤다.
그때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철민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명장 정철민.
전생의 기억으로 그는 평범한 대장장이가 아니었다.
당시 검성이라 불리던 서문무결의 애병, 월아를 만든 것이 정철민이었다.
당시 강호 제일의 시인인 제갈위가 검성의 비무를 보고 월아라는 명칭을 썼다.
실전에서의 월아의 위력은 한빈도 잘 안다.
그 검에 당해 봤으니까.
한빈은 훗날 전설로 남을 천하제일검인 월아를 만들 대장장이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탕.
탕.
어느새 시뻘겋게 달궈진 쇳덩이를 정철민이 두드리고 있다.
한빈은 눈매를 좁히며 그 작업 과정을 살폈다.
전생의 한빈은 대장장이 흉내를 낼 정도의 기술을 익혔었다.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장장이로 위장하기 위해 익힌 기술이었다.
그 기억이 한빈을 움직이게 했다.
한빈은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작업장 입구에 얼굴을 들이밀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작업장에는 문이 없기에 안쪽이 훤히 보였다.
먼저 간 정소연도 정철민이 작업하는 모습을 턱을 괴고 바라보고 있었다.
탕.
탕.
망치질 소리가 심장이 뛰듯 규칙적으로 울렸다.
한빈은 정철민의 망치질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망치질의 궤적은 군더더기 없었다.
달리 명인이 아니었다.
그의 손길에서 잊혔던 전설의 대장장이인 간장과 막야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지금 정철민의 손에서 탄생할 것은 단순한 병기가 아닌 태고의 전설을 담은 예술품일지도 몰랐다.
망치질 한 번에 쇠에 생명을 넣고 다음 망치질 한 번에 날카로움을 담아냈다.
그때였다.
한빈이 헛숨을 들이켰다.
“헉.”
뒤쪽에서 같이 지켜보던 철노가 물었다.
“공자님,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조금 더워서 그런다.”
“그럼, 제가 물 좀 가져오겠습니다.”
철노가 재빨리 어디론가 달려갔다.
한빈은 정철민이 두드리는 쇳덩이에 눈을 떼지 못했다.
쇳덩이 속에 일렁이는 황색 빛.
쇳물 때문에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용린검법의 구결이 담겼다는 표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정철민의 망치질이 멈췄다.
탕.
마지막 망치질 소리의 긴 여운이 끝날 때 정철민은 망치를 힘없이 옆에 팽개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돌아선 정철민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터벅터벅.
작업장을 나오던 정철민이 자신을 바라보는 손녀 정소연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소연아. 여기서 뭐 하니?”
“할아버지 일하는 모습 구경하고 있었어요.”
정소연이 답하자 정철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할아비는 늙었나 보다.”
“왜 그러세요?”
“아니다. 오늘은 좀 쉬어야겠다.”
정철민은 손녀 정소연을 안아 들었다.
그때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명장님, 죄송하지만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몸이 선조들의 속도를 못 따라간다는 게 한이네.”
정철민의 말에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속도라니요?”
“그것이…….”
정철민은 말을 하려다 잠시 멈췄다.
그 모습에 한빈이 재빨리 말했다.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어르신 가문의 비법을 물어봤습니다.”
“아닐세, 공자.”
“그럼 명장님께 다른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한빈이 눈을 빛냈다.
정철민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해 보게.”
“제 검 말입니다. 제가 직접 만들면 안 되겠습니까?”
“자네가?”
“네.”
정철민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무공과 쇠를 다루는 건 전혀 다른 일이라네.”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제가 평생 들고 다녀야 할 애병에 제 숨결을 불어넣고 싶습니다.”
정철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인의 입이 아닌 장인의 입에서 나올 말이었다.
그래도 자신의 대장간을 사용하게 할 수는 없었다.
제자 중에도 도검을 만드는 것을 허락받은 이는 딱 둘이었다.
그때 누군가 정철민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의 손녀 정소연이었다.
정소연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허락해 달라는 의미였다.
정철민이 잠시 애먼 천장을 올려다봤다.
정소연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도 아까 놀라셨잖아요.”
“흠.”
정철민이 헛기침했다.
정소연의 말대로 한빈의 솜씨는 몇십 년을 구른 대장장이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정철민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허락하겠네.”
“감사합니다, 명장님.”
그의 허락에 한빈이 작업장 안으로 들어섰다.
쇠를 녹일 듯한 열기에 한빈은 눈을 찌푸렸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까 확인했던 황색 점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한빈은 집게로 쇳덩이를 잡고 화로에 넣었다.
쇳덩이가 흐물흐물해지자 한빈은 재빨리 빼내어 틀에 부었다.
그러고는 다시 확인했다.
한빈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아까 봤던 황색 점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문제는 한껏 달궈진 쇳덩이 때문인지 어디 있는지 감이 안 잡힌다는 점이다.
위쪽인지, 아래쪽인지.
안인지 밖인지조차 확인이 안 되었다.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
혼잣말을 뱉은 한빈은 재빨리 망치질을 시작했다.
탕!
탕!
여러 번의 망치질에도 용린검법의 구결은 묵묵부답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쇳덩이를 뒤집어 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황색 점이 다시 나타났다.
탕! 탕!
망치질 소리에 맞춰 심장이 뛰었다.
쿵. 쿵.
하지만, 좀처럼 황색 점을 맞출 수 없었다.
황색 점이 변화무쌍하게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앞을 치면 뒤로 이동하고.
위를 치면 아래로 이동했다.
마치 머리를 내미는 두더지를 잡는 모양새였다.
문제는 그 두더지의 속도가 절정 고수 버금간다는 점이었다.
한빈은 포기할 수 없었다.
탕! 탕!
이를 악물고 망치를 내려쳤다.
한빈의 머릿속에 검을 만든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검은 뒷전이고 용린검법의 구결이 먼저였다.
그때였다.
한빈의 눈앞에 글귀가 떴다.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속(速)을 획득하셨습니다.]
‘드디어!’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감탄도 잠시 한빈은 다시 쇠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하나 더 늘어난 ‘속’.
그것의 효과 때문인지 다음 구결을 획득하는 것은 전보다 쉬웠다.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속(速)을 획득하셨습니다.]
속도가 더 빨라진다.
이제 황색 점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따라잡을 것만 같았다.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속(速)을 획득하셨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노다지였다.
운만 좋으면 용린검법의 기본편을 이곳에서 다 채울 수 있을 것이었다.
한빈은 더 바삐 손을 놀렸다.
한빈의 작업을 바라보던 정철민은 낮은 탄성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