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월아(月牙) (3)
“무가비룡이 맞고 있잖아.”
“어떻게 무가비룡 무소위를 잡은 거지?”
웅성대는 누군가가 석화교 위에 떨어진 바둑알을 발견했다.
“저기 바둑알인데.”
“그럼, 저 바둑알 때문에…….”
바둑을 두던 두 노인들은 그제야 자신의 바둑돌이 사라졌음을 알아채고는 석화교로 달려와 바둑알을 주웠다.
석화교는 그야말로 경극판이 되어 버렸다.
한빈은 주변의 소란에 아랑곳하지 않고 허공을 올려다보며 글귀를 확인했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속(速)을 획득하셨습니다.]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속(速)을 획득하셨습니다.]
이건 대박이었다.
뽑히는 구결의 양으로 봐서는 놈은 천재가 맞았다.
물론 그럴수록 한빈의 손은 빨라졌다.
속이 두 개가 더 붙은 상태였다. 구경꾼들이 보기에도 한빈의 손은 번개처럼 빨랐다.
한빈은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속도를 높였다.
퍽! 퍽!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력(力)을 획득하셨습니다.]
순간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건 구결의 화수분이었다.
한빈은 잠시, 놈을 옆에 두고 구결을 빼먹을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것은 불가능.
빼먹을 수 있을 때 더 빼먹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
한빈은 쓱 시선을 돌려 허공을 바라봤다.
[속(速), 속(速), 속(速), 속(速), 속(速), 속(速)]
[체(體), 체(體), 체(體)]
[력(力), 력(力), 력(力)]
[공(功), 공(功)]
이제는 제법 기본이 갖춰진 것 같았다.
체력이나 힘도 평균 이상은 되었고 특히 속도에서는 일류를 뛰어넘은 느낌이었다.
한빈은 마지막 구결을 뽑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이를 보던 구경꾼들의 입이 벌어졌다.
상대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주먹을 내리꽂는 한빈의 모습은 야차와도 같았다.
구경꾼 중 누군가가 말했다.
“구타에도 예술이 있네.”
“허허.”
“그런데, 너무 잔인하지 않아?”
“그러네. 무소위의 호위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구경꾼들의 시선이 뒤쪽으로 물러나 있는 무씨검가의 호위들을 향했다.
무씨검가의 호위대장은 무소위와 한빈을 바라봤다.
호위대장은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그동안 무소위의 일에 나서면 질책을 받기 일쑤였다.
그래서 멀찌감치 떨어져 모른 척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사고 치는 것은 항상 무소위였다.
말이 호위지, 무소위가 사고 치면 그것을 수습하는 해결사였다.
때로는 힘으로.
때로는 돈으로 무소위가 벌인 일을 무마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지금도 무소위가 사고를 치는 것이라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구경꾼들의 말에 자세히 보니 무소위가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하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에 호위대장이 다급히 다가섰다.
그때 한빈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재빨리 뒤쪽으로 물러났다.
다가오는 무씨검가의 호위대장 때문은 아니었다.
이제 더는 뽑아 먹을 것이 없었다.
이 사건은 소녀를 괴롭히는 무소위를 혼내 준다는 의미보다는 구결을 얻고 싶은 갈망이 한몫했다.
한빈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다.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회색 무복의 사내 다섯 명이 무소위와 한빈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중 호위대장이 외쳤다.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말을 마친 그는 검집을 움켜잡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구경꾼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한빈이 무소위가 떨어뜨린 서찰을 줍고 나서 말했다.
“누가 내 구역에서 장사하래?”
한빈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모두가 고개만 갸웃할 때 한빈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석화교는 내 구역이야. 여기서 통행세를 받았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한빈의 억지에 무사가 눈매를 좁혔다.
“누구십니까?”
“나? 팽가의 잠룡, 팽한빈.”
호위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순간 주변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팽한빈이면 하북 최약체 아니야?”
“팽가의 수치잖아.”
“그 겁쟁이가 설마?”
“그런데, 자칭해서 잠룡이라는 건 또 뭐래?”
주변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천천히 쓰러진 무소위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앞에 멈춘 한빈이 무사를 무시하고 쓰러진 무소위를 바라봤다.
“강호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방심하면 안 된다. 천재면 뭐 하냐, 목이 붙어 있어야 어디다 써도 쓰지.”
정신을 차린 무소위가 죽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넌 누구냐? 대체…….”
“매형의 마지막 충고라고 생각하고 잘 곱씹어.”
“매형이라고?”
무소위의 눈이 커졌다.
그를 호위하던 무사들도 한빈의 신분을 알고는 검을 뽑으려던 오른손을 주춤거린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뽑으려면 뽑아도 돼. 물론 다시는 검을 들지 못하는 몸이 될 걸 각오하고.”
웃으면서 내뱉은 한빈의 말에 무씨검가 무사들은 묘하게 한기를 느꼈다.
잠시 침묵이 한빈과 호위무사 사이에 맴돌았다.
구경꾼들도 그들의 기세에 입을 열지 못했다.
모두가 일촉즉발의 상황에 침을 삼키고 있을 때 가장 앞에 선 호위대장이 입을 열었다.
“공자님 모셔라. 우린 돌아간다.”
동시에 호위무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호위대장의 판단은 이것이 호위무사가 처리할 일이 아닌, 가문 대 가문의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무씨세가 무사들이 퇴장하자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튀어나왔다.
“휴.”
“역시 무인들이라 그런지 살벌하네.”
“간 떨어지는 줄 알았지 뭐야.”
한빈 뒤에 있던 심미호도 마찬가지로 참았던 숨을 뱉었다.
“휴, 다행이에요. 그런데 어디…….”
심미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한빈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때 옆에서 철노가 손가락으로 다리 건너편을 가리켰다.
한빈은 벌써 석화교를 건넜다.
심미호가 철노의 소매를 잡고 다급하게 한빈의 뒤를 따랐다.
구경꾼들은 사라져 가는 한빈의 뒷모습을 보며 속삭였다.
“속이 시원하네.”
“무슨 속이 시원해.”
“그런데, 그 겁쟁이가 대체 무슨 일이래?”
“무슨 일이긴. 아까 하는 행동 보니 망나니 하나가 더 출현한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그러네. 아까는 꼭 악마 같았어. 실신한 사람을 그리 패도 되는 건가?”
“천하의 망나니 무소위가 동정을 받다니!”
“그렇지, 그런데 진짜 불쌍하긴 불쌍했어.”
한빈은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에 씩 웃었다.
하북의 겁쟁이보다는 하북의 망나니가 더 듣기 좋았다.
겁쟁이라는 선입견을 지우는 데는 망나니만큼 좋은 단어는 없었다.
한껏 미소 짓는 한빈의 귀에 떨리는 심미호의 목소리가 울렸다.
“주군, 대체 어쩌시려고 이런 대형 사고를…….”
“괜찮아. 어차피 파혼할 거 조금 앞당기는 게 나한테는 유리해.”
이번에는 철노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왜 파혼할 거라고 장담하세요? 공자님.”
한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철노 같으면 나 같이 허접한 사람한테 시집오겠어? 무소율이 누구야? 학식, 미모, 무공까지 후기지수 중에는 모두 하북에서 최고잖아.”
“…….”
철노는 답하지 못했다.
한빈의 말이 사실이긴 해도 그걸 차마 인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철노의 표정을 본 한빈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더 중요한 건 무소율이면 하북에서 제일 야심이 큰 여자라는 점이지. 그런 여자가 나한테 시집을 온다? 그건 말도 안 되지.”
한빈의 말에 철노가 못 참겠다는 듯 한 발짝 나오며 따지듯 물었다.
“아, 공자님. 공자님이 뭐가 어때서 그렇습니까?”
“네, 맞아요. 주군.”
심미호가 맞장구치자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됐어. 너희들의 말은 어쨌든 고맙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모기 우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해요. 대협.”
고개를 돌려 보니 그곳에는 서찰을 들고 있는 여자아이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까 무소위에게 희롱을 당하던 아이, 정소연이었다.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신경 안 써도 돼, 나는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
한빈은 고개를 돌리고 앞서 걸었다.
그 모습에 철노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떤 것이 주군의 얼굴일까요?”
철노의 물음에 심미호가 작게 속삭였다.
“영웅의 기질을 숨기고 계시는 거지요. 자신의 처남이 될 사람도 저리 응징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철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에게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용린검법에 적힌 글귀를 바라보며 다음 편에 대한 추측을 이어 나갔다.
글자 수가 늘어나며 휑하던 기본편도 어느 정도 틀을 갖췄다.
기본편을 채운다면 비급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다음 편이 나타날까?
기본편 다음에는 과연 어떤 구결이 기다리고 있을까?
한 무더기의 의문이 한빈의 머릿속을 채웠다.
“흠……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
뒤쪽에서 따라오던 철노는 한빈의 뜻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 * *
석화교에서 십 리 밖에 있는 허름한 대장간.
겉으로는 평범하게 보이는 대장간 입구에 현판이 붙어 있었다.
[명장(名匠)]
이 대장간에 국가에서 현판을 내린 것이 송나라 때라고 한다.
이것은 대대로 명장의 칭호를 지키고 있는 명가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현세대의 명장인 정철민은 자신의 실력에 만족할 수 없었다.
선대의 찬란한 명성을 찾으려면 갈 길이 멀었다.
탕.
탕.
정철민은 힘껏 두드리던 망치를 내려놨다.
그때였다.
정철민의 제자가 다가왔다.
“스승님,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하북팽가에서 왔습니다.”
“하북팽가라?”
살짝 의문을 띄운 정철민은 작업장에서 나왔다.
정철민이 하북팽가의 현재 가주에게 약속한 것은 총 세 자루의 칼이였다.
“마지막인가?”
혼잣말을 뱉으며 간 곳에는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다.
딱 보기에도 어려 보이는 데다가 하북팽가의 직계치고는 체격도 볼품없었다.
훤칠하긴 했지만, 기생오라비 같은 생김새에 정철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지?’
정철민이 눈매를 좁힐 때 상대가 정중하게 포권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하북팽가의 넷째 팽한빈이라고 합니다.”
한빈이 마주 포권했다.
“아, 사 공자시구려.”
“네, 늦게나마 명장님께 인사 올립니다.”
한빈의 정중한 모습에 정철민이 눈매를 좁혔다.
대부분 이곳에 처음 오면 대장장이라고 무시하며 혀를 함부로 놀리기 마련이었다.
하북팽가의 첫째도 그랬고 둘째도 그랬다.
정철민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제자에게 말했다.
“차를 내오너라.”
어느새 통나무로 만들어진 탁자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올려졌다.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시던 정철민이 한빈의 요모조모를 살폈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에 닿은 곳은 한빈의 손.
유심히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한빈의 손을 보며 어떤 도(刀)가 좋을지를 고민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던 그가 결심하고 손을 내밀었다.
“주시지요.”
“여기 있습니다.”
한빈이 품 안에서 서찰을 꺼냈다.
서찰을 확인한 정철민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몸 좀 풀겠군요. 그럼 준비된 묵철도 주시지요. 공자에게 맞는 도를 만들어 드리리다.”
“없습니다.”
“없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묵철은 오는 길에 잃어버렸습니다.”
“허허.”
정철민은 헛웃음을 뱉으며 한빈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