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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7화 (17/621)
  • 17화. 월아(月牙) (2)

    그때 소대섭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주군, 그런데…….”

    “왜, 소대섭 대주?”

    “저, 여기서 자야 합니까?”

    소대섭이 천수장의 대청을 힐끔 돌아봤다.

    “그럼, 앞으로 여기가 우리 집인데 어딜 가려고. 혹시 귀신이 무섭나?”

    “아닙니다.”

    “그래, 귀신이 병마보다 무섭지는 않지?”

    “아, 그건 그렇습니다.”

    소대섭이 어색하게 웃었다. 병마와 싸우는 딸 아이를 생각한다면 귀곡장에서 자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았다.

    물론 이건 생각만이고 소대섭은 살짝 어깨를 떨고 있었다.

    모두가 떠나고 혼자 남은 소대섭의 귓전을 바람 소리가 때렸다.

    휘히잉.

    휘이잉.

    “헉.”

    소대섭이 자신도 모르게 칼을 빼 들었다.

    바람 소리가 마치 귀신 소리 같았기 때문이다.

    해가 질 때부터 음기가 강해지고 그 음기는 땅에서 나오는 극양지기와 충돌한다.

    귀곡성의 정체가 그 충돌음이었다.

    그 사실을 알 길 없던 소대섭은 자신의 칼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덜덜 떠는 소대섭의 모습을 상상한 한빈은 웃음을 머금었다.

    뒤쪽에서 쫓아오던 심미호가 바짝 붙어 다급히 물었다.

    “주군,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한빈이 발길을 멈췄다. 생각해 보니 그들에게 목적지도 말해 주지 않았다.

    “이제 대장간으로 가야지.”

    “아, 저도 모르게 깜빡하고 있었네요.”

    심미호가 어색하게 웃었고 옆에 있던 철노는 넋 나간 표정이다.

    그만큼 오늘 하루는 정신이 없었다.

    심미호가 철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철노.”

    “왜 그럽니까? 부대주.”

    “철노는 주군의 성격을 알고 계셨어요? 어떻게 저리 숨기신 거죠?”

    “뭐, 제가 잘 보필한 거 아니겠습니까.”

    둘이 정신없이 수다를 떨고 있을 때 한빈은 벌써 앞서 나가고 있었다.

    철노가 길게 드리워진 한빈의 그림자를 밟고 쫓아갔다.

    “공자님, 같이 가시죠. 왜 저리 성격이 급해지신 건지…….”

    투덜대긴 해도 철노는 웃음을 참는 듯 입가를 실룩였다.

    철노는 자신이 모신 주인이 이리 변할 줄은 몰랐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기분 좋은 변화라는 점이다.

    * * *

    하북성 근처 석화교.

    “내놔!”

    양 갈래 머리의 여자아이가 누군가를 쫓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여자아이는 멈춰 숨을 헐떡였다.

    “헉. 헉!”

    여자아이의 이름은 정소연.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가던 중 석화교에서 하북의 망나니에게 물건을 빼앗긴 것이다.

    하북의 망나니는 무씨검가의 막내 무소위였다.

    무씨검가는 하북팽가와 함께 하북 강호를 지탱하는 명문가였다.

    무소위는 무씨검가에서 백 년 만에 나왔다는 무공의 천재였다.

    정확히 말하면 게으른 천재였다.

    무가비룡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그는 경공술만큼은 하북 최고였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고 치켜세우니 무소위는 안하무인이 되어 버렸다.

    최고의 경공술.

    약간의 무력.

    그리고 최악의 인성이 그를 설명하기에 적당한 문장이었다.

    무소위가 정소연의 서찰을 높이 든 후 외쳤다.

    “이걸 가져가려면 통행세를 내야지.”

    “석화교가 당신 거예요? 왜 통행세를 받아요?”

    “내 거 맞아. 그러니까, 통행세 내. 아니면 내 볼에 입 맞추고 지나가든지.”

    “그거 빨리 내놔요!”

    “이거 버릴까?”

    무소위가 서찰을 석화교 아래 강물로 던지는 시늉을 했다.

    “안 돼!”

    정소연이 비명을 지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구경꾼들이 석화교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 백성이 무씨검가의 망나니를 거스른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만큼 불가능한 것이었다.

    * * *

    한빈 일행이 서찰에 써 있는 대장간으로 향할 때였다.

    석화교에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자세히 보니 한 사내가 조그마한 여자아이를 놀리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아무도 그 일에 끼어들지 않고 혀만 끌끌 차며 안타까워한다는 점이었다.

    한빈은 그곳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때 심미호가 조용히 속삭였다.

    “주군, 저희가 돕는 것이 어때요? 제가 나설까요?”

    “심 부대주. 시간이 남아? 강호에서 일어나는 일에 사사건건 끼어들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걸.”

    차가운 한빈의 태도에 심미호는 고개를 숙였다.

    어쩔 때는 영웅처럼 보이는 한빈이었지만, 지금처럼 정의를 외면할 때는 여전히 겁쟁이에 가까웠다.

    소미호는 어떤 게 주군의 진짜 모습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때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무소위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한빈이 앞으로 한 발짝 나가며 말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군. 왜 그래요?”

    심미호가 묻자 한빈이 씩 웃었다.

    “원래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는 거잖아.”

    “무슨 싸움이요?”

    “이제부터 좋은 구경거리가 생길 거야.”

    한빈이 입맛을 다셨다.

    동시에 심미호와 철노가 입을 벌렸다.

    그들은 한빈의 이 표정이 의미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빈이 눈을 빛내며 여자아이를 희롱하는 사내 쪽으로 걸어갔다.

    불안한 예감이 든 심미호가 눈매를 좁혔다.

    그러고는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는 재빨리 뛰어가 한빈의 소매를 잡았다.

    “주군, 저자는 무씨검가의 무소위예요.”

    한빈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내를 바라봤다.

    자세히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지만, 그건 한빈과 관계없었다.

    한빈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주군의 처남이 될…….”

    “그럴 일 없어!”

    한빈이 단호하게 외치고 무소위를 향해서 걸어갔다.

    한빈은 걷다가 옆을 힐끔 봤다.

    그곳에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 둘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물론 무소위가 펼치는 난장판을 구경하느라 바둑을 멈춘 지는 오래였다.

    한빈은 조용히 바둑판 위에 바둑알을 한 움큼 집었다.

    판이 엉클어졌지만, 노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걸었다.

    스슥.

    한빈의 움직임은 묘하게 은밀했다.

    계속 보고 있던 심미호도 한빈의 움직임을 놓쳤다.

    군중 속으로 사라진 한빈이 나타난 것은 석화교 끝에 멈춘 무소위 옆이었다.

    무소위 옆에 불쑥 나타난 한빈이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대협! 재미있습니까?”

    “너, 뭐야?”

    깜짝 놀란 무소위가 소리쳤지만, 한빈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불쑥 나타나 죄송합니다, 대협.”

    대협이라는 단어에 무씨검가의 무소위가 반응했다.

    그는 안심한 표정으로 한빈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누구신지?”

    “그냥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대협의 경신술이 하도 뛰어나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한빈이 해맑게 웃자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 미친 거 아니야? 망나니보고 대협이래.”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유유상종이라더니 망나니 같은 놈이 또 하나 있었네.”

    모두가 웅성댈 때 소녀가 다시 뛰어왔다.

    무소위가 몸을 날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무소위는 석화교 건너편에 가 있었다.

    한빈은 그의 보법에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소녀를 놀리다가 다리 난간을 딛고 달려온 무소위가 다시 한빈의 앞에 멈췄다.

    무소위가 말을 이었다.

    “누군진 몰라도 식견이 대단하시구려. 내 오행보를 알아보다니 말입니다.”

    그때 뒤쪽에서 여자아이가 다시 뛰어왔다.

    “내 물건 내놔요.”

    무소위가 씩 웃더니 다시 몸을 날려 다시 여자아이를 놀리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를 멀찌감치 떼 놓은 무소위가 다시 한빈 옆에 돌아왔다.

    그 모습을 관찰하던 한빈이 말했다.

    “아, 대협의 경신술이 오행보였군요. 오행보라면 곤륜의 속가 제자이십니까? 역시 호부(虎父) 아래 호자(虎子) 없다더니 거짓이 아니군요.”

    “보는 눈이…….”

    대꾸하던 무소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주변에서 킥킥대는 웃음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구경꾼 중 누군가가 외쳤다.

    “크크, 저게 무슨 말이야.”

    “호자가 아니라면 견자(犬子)라는 거잖아.”

    “똑같은 망나니인 줄 알았더니 지나가는 협객인가 봐.”

    사람들의 반응에 무소위가 눈매를 좁혔다.

    “듣고 보니 지금 한 말 좀 이상한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이 무소위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휙.

    하지만, 한빈의 손은 허공을 쳤다.

    무소위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멀리 거리를 벌린 무소위가 외쳤다.

    “이 비겁한 새끼 같으니라고. 실력에 자신이 없으니 암수를 써!”

    “실력은 대봐야 아는 거 아닌가?”

    한빈이 씩 웃으며 답하자 무소위가 약 올리듯 외쳤다.

    “자신 있으면 잡아 보든가!”

    한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닥!

    하지만, 무소위의 움직임을 따라잡기는 힘들었다.

    그만큼 무소위의 경공술은 독보적이었다.

    무소위의 뒤를 따르며 한빈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천재라는 족속은 자신을 착각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신의 무위가 천하제일이라고 말이다.

    아무리 천하제일의 무공을 가져도 약점은 있는 법.

    무소위의 경공술에는 큰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너무 정확하다는 점이었다.

    그가 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화원에서 다량으로 찍어 내는 판화처럼 일정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정확함.

    그것은 가장 큰 장점이자 약점이었다.

    석화교 위에 바둑판을 그려 놓는다면, 한 번 놓은 수를 계속 놓는 것과 같았다.

    과연 누가 그렇게 정확하게 보법을 펼칠 수 있을까.

    아마도 강북에서는 무소위가 유일할 것이었다.

    탁.

    제자리로 돌아온 무소위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한빈을 바라봤다.

    그 웃음만으로 주변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역시 무가비룡이야. 경공술이 마치 구름을 밟고 지나가는 것 같잖아.”

    “저 망나니를 어떻게 잡아.”

    “맞아. 염라대왕이 오면 몰라도.”

    모두가 웅성거릴 때 한빈이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무소위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시 한빈이 뛰어갔다.

    한빈은 뛰어가며 석화교를 바둑판 삼아 바둑알을 놓기 시작했다.

    그 동작은 은밀했다.

    툭. 툭.

    한빈과 무소위의 추격전은 석화교 위에서 계속 이루어졌다.

    사람들의 눈에 한빈의 모습은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 같았다.

    계속된 추격전에 철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도저히 못 보겠네.”

    그때 심미호가 철노의 팔을 잡았다.

    “잠시만 기다리죠, 철노.”

    “저걸 어떻게 보고만 있습니까? 심 부대주.”

    철노가 이를 악물자 심미호가 손을 흔들었다.

    “잠깐 기다려 봐요. 공자님이 묘수를 쓰신 것 같으니 말이에요.”

    “지금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데 묘수라뇨?”

    “저길 보세요, 철노”

    심미호가 무소위를 가리켰다.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무소위가 갑자기 휘청이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가 눈을 크게 뜨며 웅성대기 시작했다.

    가장 당황한 것은 무소위 본인이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발밑에 이질감이 드는 동시에 경공술을 펼치는 데 힘이 들었다.

    발아래를 바라보니 흑색의 돌이 놓여 있었다.

    다음 발이 닿을 곳에는 백색의 돌.

    ‘왜 여기에 바둑알이?’

    혼란스러운 무소위는 바둑알 하나를 정확히 밟고는 미끄러졌다.

    그때 한빈의 손바닥이 무소위의 뒤통수에 적중했다.

    빡!

    얼떨결에 뒤통수를 맞은 무소위가 낫처럼 꺾였다.

    동시에 주변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무소위는 움직임이 둔해지며 동시에 다리 꺾인 다람쥐가 된 듯 석화교 위에서 꼬꾸라졌다.

    한빈은 그러거나 말거나 무소위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퍽!

    밟을 때 밟아야 한다는 강호 속담대로 한빈의 손속은 가차 없었다.

    한빈은 무소위를 올라탔다.

    빡!

    찰진 타격음과 함께 주변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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