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월아(月牙) (1)
객잔에서 한빈 일행이 나가자 호위가 급히 물었다.
“방주님, 혹시 귀곡장에서 황금이라도 발견된 게 아닐까요? 그러지 않고서 그 짐을 떠맡겠다고 하는 게…….”
“낙장불입. 내 손을 떠난 땅이야.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아까 보낸 놈들은 왜 이리 느려?”
이세명이 주변을 둘러봤다.
때마침 객잔의 문이 열리고 무사 몇 명이 달려왔다.
“방주님, 알아봤습니다.”
“그래, 그 애송이가 귀곡장을 관리할 자금은 있는 건가?”
“묵철을 저희 전당포에 맡겼다고 합니다.”
“묵철이라면 하북팽가 소가주 후보의 신물을 만들 재료인가?”
“저희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하하. 재미있군. 놈의 말이 맞긴 맞았어. 하북에 골 때리는 놈이 등장했군.”
“어떻게 할까요?”
“은밀하게 팽한빈에 대해서 더 알아봐.”
“존명.”
무사가 포권을 하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세명이 호위를 바라봤다.
“그런데 장 호위는 이상한 거 못 느꼈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국주님.”
“팽한빈 말이야. 그놈, 피만 보면 기절한다고 장 호위가 그랬잖나.”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직접 알아보겠습니다.”
“그냥 놔둬, 제 피에는 기절 안 하나 보지.”
“아, 생각해 보니 저도 이상한 게 있습니다.”
“말해 보게, 장 호위.”
“국주님의 내공에 몸속이 들끓었을 텐데, 어떻게 음식까지 추가 주문해서 먹고 나간 걸까요?”
호위의 말에 이세명이 웃음을 토했다.
“풋.”
“왜 그러십니까?”
“놈이 멀쩡했던 이유는 오늘 숙제이니 곰곰이 잘 생각해 봐, 장 호위.”
말을 마친 이세명은 나무 의자에 몸을 맡기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잠깐 한빈의 완맥을 짚었던 이세명은 어찌 된 일인지 대충 상황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연기였다.
그 연기는 절실함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했고 말이다.
‘소가주가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인가?’
한참 동안 상념에 잠겼던 천리 표국주 이세명의 입꼬리가 뜻 모를 호선을 그렸다.
* * *
객잔을 나가서도 소대섭과 심미호는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못했다.
“하북성 관아에 줄을 대시려는 의도로 귀곡장을 관리하시려는 건가요?”
한빈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런 것도 있고……. 그런데, 귀곡장이라고 부르지 말래도. 이제부터는 천수장이야.”
“네. 주군.”
“다 좋은데, 천리 표국과 이런 거래를 한다는 자체를 가문에서 안 좋게 보지 않을까요?”
심미호의 질문에 한빈이 나지막이 불렀다.
“심 부대주.”
“네, 주군.”
“부대주는 쥐 잡는 데 하얀 고양이를 쓸 거야, 아니면 검은 고양이를 쓸 거야?”
수수께끼와도 같은 말에 심미호는 답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소대섭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이왕이면 깨끗한 하얀 고양이가 좋지 않겠습니까?”
“땡.”
이번에는 심미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럼, 어둠 속에서 잘 안 보이는 검은 고양인가요?”
“땡. 그것도 아니야.”
한빈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젓자 심미호와 소대섭이 고개를 기울였다.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쥐 잡는 데 색깔이 뭐가 필요해? 쥐 잘 잡는 놈을 쓰는 거지.”
“아.”
심미호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소대섭은 의미를 곱씹는 표정이다.
한빈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적아를 구분할 때 이름표를 볼 필요는 없잖아. 소대섭 대주.”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주군.”
“나한테 잘해 주는 놈, 내가 이용할 만한 놈이 내 편이야.”
“아. 주군…….”
소대섭은 그제야 의미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궁금한 것이 있었다.
구렁이 서너 마리, 아니 배 속을 구렁이로 꽉 채운 것 같은 한빈의 모습은 대체 뭐란 말인가?
궁금함에 소대섭의 입술이 꿈틀댔다.
그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린 한빈이 말했다.
“이제부터는 수호사대는 발 뻗고 자도 돼.”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팽가 외부에 숙소를 얻었으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네?”
“원래 소가주 후보는 외부에 훈련장을 얻을 권한이 있잖아.”
“혹시?”
“그 혹시가 맞아.”
“……천수장이 저희 훈련장이라고요?”
“당연하지. 준비되면 거기서 먹고 잔다고 생각하고 있어.”
“주군, 설마 귀곡장에 우리를…….”
“소 대주, 자꾸 왜 귀곡장이라고 그러는 거야! 땅값 떨어진다니까? 이제 가야지.”
“어디를요?”
소대섭이 묻자 한빈이 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천수장.”
“아!”
서쪽을 바라보는 소대섭의 표정은 좌불안석, 그 자체였다.
* * *
잠시 후.
한빈은 천수장의 현판 아래 서 있었다.
뒤쪽에서 한빈을 따라오던 소대섭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주, 주군. 정말 여기에서 훈련을 해야 합니까?”
“훈련뿐이 아니라 정리되면 여기가 수호사대의 숙소라니까.”
“…….”
소대섭이 아무 말도 못 하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한빈은 몸을 돌려 아무렇지도 않게 천수장의 커다란 문을 열었다.
덜컹!
풀썩!
활짝 열린 문 하나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문이 썩어 문드러졌다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관리가 안 됐다는 것이다.
안을 살펴보니 어떤 인기척도 없이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이건 낮에도 귀신이 나올 것 같았다.
한빈이 뒤를 돌아봤다.
“거기서 뭐 해? 어서 들어오지 않고?”
한빈이 손짓하자 소대섭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애처롭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 비해 철노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와서 두리번거린다.
“공자님, 뭔가 분위기가 당장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긴 한데 묘하게 따뜻한 느낌도 듭니다.”
철노의 말에 심미호가 펄쩍 뛰었다.
“철노, 이게 따뜻해 보이는 곳 같다고요?”
“저는 그런데…….”
철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한빈은 철노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휘적휘적 걸어 천수장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잡초조차 남아 있지 않다.
천수장을 둘러보던 심미호가 한숨을 쉬었다.
“이 땅은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겠다는 저주에라도 걸린 걸까요?”
“그러게, 아무래도 귀신이 들렸다는 게 맞는 것 같아. 아무래도 주군께 이 계약을 물리자고 충언을 드려야…….”
맞장구치던 소대섭이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의 행동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한빈은 만족스러운 듯 바닥의 흙을 만지더니 냄새까지 맡고 있었다.
물론 한빈이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다.
땅의 기운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천수장이 들어선 이곳은 매우 험악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운의 정체가 극양지기라는 점이다.
철노가 따뜻하다고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양기가 너무 강하다 보니 대부분의 식물이 버티지 못하고 죽는 것이었다.
덕분에 주변 농가마저 풀 한 포기 남지 않고 폐가가 되어 버렸다.
물론 사람이라고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멀쩡하다면 이곳을 철전 다섯 닢으로 얻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한빈은 몇 시진 전 이세명과의 거래를 떠올렸다.
나중에 이곳의 값어치를 알아본다 하더라도 황금 세 냥을 준 이상 물리지도 못할 것이었다.
원금의 열 배라는 위약금 조항도 훌륭한 무기였다.
이것이 한빈이 황금 세 냥을 이세명에게 건넨 이유였다.
사실 세 개의 의뢰는 이세명이 들어주면 좋고 안 들어줘도 관계없었다.
그런데 상황을 보면 이세명의 마음까지 덤으로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한빈이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렸다.
상념에서 깬 한빈이 기지개를 켰다.
“자, 한 바퀴 둘러봤으니 이제 준비를 해야지!”
내부를 대충 둘러본 한빈은 대청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더니 다시 행낭 속의 지필묵을 꺼냈다.
한빈의 행동에 철노가 물었다.
“공자님, 뭐 하세요?”
“천수장의 도명을 그리는 거잖아.”
“그런데 이게 뭐예요?”
철노가 가리킨 곳에는 빗금이 쳐 있었다.
“비밀이야.”
“아, 공자님. 저한테도 비밀입니까? 요즘 들어 비밀이 너무 많아지신 거 아닙니까?”
“다 철노를 위해서야.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어.”
“그래도 궁금한데…….”
“심심하면 무공이라도 배워 볼래?”
“사양입니다, 공자님. 저는 원래 익히고 있던 무공이 있어서 다른 무공은 익히지 못해요.”
무공 이야기가 나오자 철노는 뒷걸음치며 사라졌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한빈은 아무 말 없이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한빈은 그림을 조심스럽게 햇볕에 말렸다.
그림이 완성되자 한빈은 소대섭을 불렀다.
“소 대주. 이거 받아. 그리고 이것도.”
한빈이 전한 것은 천수장을 그린 도면과 남은 자금 중 일부였다.
대충 뜻은 알고 있었다.
이곳을 훈련장으로 삼으려면 각종 집기와 비품이 필요할 터.
한빈이 전한 것은 그 자금이 분명했다.
하지만, 소대섭도 도면 위에 표시한 빗금들이 궁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소대섭이 물었다.
“이게 대체 뭡니까? 주군.”
“여기에는 여기 적힌 나무와 작물을 심어.”
쓱.
한빈이 종이 한 장을 더 내밀자 소대섭이 훑어본 후 물었다.
“대나무에 등나무, 거기에 무까지요?”
“그래. 그 옆엔 빽빽하게 심어.”
“심어 봤자 다 죽을 텐데요.”
“이놈들은 버틸 거야. 왜, 궁금해?”
“이젠 궁금하지 않습니다. 비밀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소대섭이 웃으며 포권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일단 따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더욱이 딸 아이의 치료비를 아무런 조건 없이 내준 주군이 아니던가?
소대섭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대청에 벌러덩 누윘다.
자신이 그린 천수장을 도면을 머릿속에 그려 봤다.
한빈이 빗금을 친 곳은 양기가 강하게 뻗치는 곳.
그곳의 양기를 제어하기 위한 방법으로 한빈이 택한 몇 가지 나무와 작물이었다.
등나무와 대나무는 음기를 머금은 나무.
담장 밖으로 양기가 뻗치는 것을 막아 줄 것이었다.
계획대로 조경만 완성되면 양기가 밖으로 흘러가는 일은 없다. 즉, 유지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거기에 내부의 양기는 무가 흡수한다.
아마 양기를 머금은 무가 정상적으로 자란다면 백년하수오나 백년설삼 정도의 영약이 될 터였다.
무력을 단숨에 끌어올리려면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뭐, 정답은 없지만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본다면.
영약, 비급, 병기라 말할 것이 분명하다. 한빈은 그중 하나를 손에 넣은 것이다.
폐가로 남아 있는 천수장의 비밀을 한빈이 어떻게 아냐고 누가 묻는다면 답은 간단하다.
전생의 귀검대를 여기에서 훈련시켰으니까!
“뭐 무나 백년설삼이나…….”
한빈의 뜻 모를 말에 옆에 있던 철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한빈이 웃었다.
* * *
천수장에 대한 정리는 소대섭이 맡기로 했다.
“소 대주, 이것도 받아.”
“천수장의 관리에 대한 비용은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건 주변 폐가를 사들일 비용이야.”
“폐가요?”
“임자 없는 폐가는 관아에서 관리하니 이 정도면 꽤 접수할 수 있을 거야.”
“진짜 관아에 줄을 대시게요?”
“뭐, 뒷배가 있어서 나쁠 건 없지.”
한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뒷배의 문제가 아니었다.
극양지기로 황폐해진 땅들은 몇 개월이면 복구될 것이고, 천수장을 중심으로 약초꾼들의 성지가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