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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5화 (15/621)

15화. 흑묘 백묘 (5)

한빈이 당당히 손가락 다섯 개를 폈다.

그 모습에 이세명이 기분 좋게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한참을 웃던 이세명이 말했다.

“큰 거라는 건가? 황금 다섯 냥이라…….”

“아니, 작은 겁니다.”

고개를 흔든 한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 천수장 때문에 속이 썩어 가는데도 값을 올리려는 이세명은 진정한 장사꾼이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헐값이라고 해도 은전이라면 조금…….”

“아닙니다. 조금 더 작은 겁니다.”

“뭐라?”

이세명이 놀랄 때 한빈이 이세명에게 다가갔다.

순간 이세명이 손을 저으며 기막을 펼쳤다.

“됐다. 거기서 얘기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한빈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이세명을 바라봤다.

검보다 붓을 더 잘 쓴다 하는 이세명이 기막을 펼친다라?

한빈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전생에도 경험한 일이었으니까.

한빈이 기다렸다는 듯 귓속말로 속삭였다.

“철전 다섯 닢입니다.”

“철전이라?”

“저는 귀곡장 때문에 산을 사는 게 아니라 산에 대한 책임을 떠안겠다고 제안드리는 겁니다. 앓던 이를 뽑으실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남들이 들을 수 없는 은밀한 속삭임.

이세명은 그제야 한빈이 왜 귓속말로 전하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세명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함이었다.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한빈이 옆에 끼고 있던 행낭을 풀어 지필묵을 꺼냈다.

일필휘지로 계약서를 써 나가는 한빈.

이세명은 눈을 크게 떴다.

계약서 조항 하나하나가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한빈의 붓놀림은 상계에서 몇십 년은 굴러먹은 듯 거침없었다.

막 금액을 적으려던 한빈이 붓을 멈추고 이세명을 바라봤다.

마치 비 맞은 강아지처럼 불쌍한 표정으로 말이다.

이세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느냐?”

“국주님,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을는지요. 그렇다면 천수장의 값을 더 높이 쳐드리고 싶습니다.”

“하북팽가에서 내게 부탁을 한다고?”

이세명의 눈이 가늘어지자 한빈이 재빨리 답했다.

“하북팽가가 아니라 제 개인적으로 드리는 부탁입니다.”

“말해 보게.”

“세 개의 의뢰를 미리 하고 싶습니다.”

“나에게 부탁할 일이 세 개라…….”

“대금은 귀곡장의 금액에 얹어서 드리겠습니다.”

“흠, 계속해 보게.”

이세명의 말에 한빈은 지체 없이 행낭에서 꾸러미를 꺼냈다.

이건 묵철을 맡기고 받은 돈 중 반이었다.

쓱.

묵직해 보이는 전낭에 이세명의 눈이 커졌다.

한참을 바라보던 이세명이 다시 답했다.

“팽가의 자제가 천리 표국에게 의뢰를 맡기는 게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나? 그게 어떤 의뢰인지도 모르고 내가 수락할 것이라고 보나?”

탁!

이세명이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장력이 한빈에게 전해졌다.

한빈은 이를 악물고 이세명의 장력을 받아 냈다.

미리 준비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빈의 경지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담담한 표정으로 이세명을 바라봤다.

그때 한빈의 눈이 커졌다.

뭐지?

이세명의 어깨에 황색 점이 일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용린검법의 구결!

한빈이 입술 사이로 작은 신음을 흘렸다.

“음.”

그 모습을 오해한 이세명이 웃으며 말했다.

“천수장은 넘길 것이지만, 다른 부탁을 하려면 그 자격을 갖춰야 할 것이다.”

“그 자격이 뭡니까?”

“내 몸에 닿으면 인정해 주지.”

이세명이 지그시 웃으며 내공을 더 불어 넣었다.

순간 탁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트트득.

한빈은 치열하게 머리를 굴렸다.

몸에 닿으라는 조건은 구결을 가져가라고 내어 주는 것과 같았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버틸 수는 있지만, 공격하기에는 몸에 무리가 있었다.

한빈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포기할 거면 차라리 죽지!’

이것은 한빈의 진심이었다.

한빈은 입의 볼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느새 입에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이런 한빈의 행동은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했다.

이세명이 내공을 거두려 할 때였다.

한빈이 피 분수를 뿜었다.

푸아악!

옆에 있던 호위가 이세명의 앞을 막아섰다.

파팍!

그의 호위가 한빈이 뿜은 피를 뒤집어썼다.

모두가 놀랄 때 이세명이 호위를 제치고 재빨리 한빈에게 다가가 완맥을 짚었다.

한빈이 다치는 것은 이세명이 원한 바는 아니었다.

그때였다.

한빈은 손이 이세명의 어깨를 때렸다.

내공은 실리지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공격.

이세명이 날듯이 재빨리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이게 무슨 짓이냐?”

이세명의 서슬 퍼런 기세에도 한빈은 웃었다.

“닿았습니다.”

“지금 뭐라 했느냐?”

“분명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국주님의 몸에 제 공격이 닿으면 다음 말을 들어 주시겠다고 말입니다.”

“…….”

이세명이 아무 말 못 하고 한빈을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그의 웃음이 주변을 덮었다.

“하하. 고얀 놈.”

“그럼 계속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때 한빈의 시야에 문구가 떴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공(功)를 획득하셨습니다.]

한빈은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 이세명은 기가 찼다. 자신에게 일장을 가하고 저리 웃을 수 있는 후기지수가 강북 무림에 몇이나 될까.

물론 이세명의 착각이었지만, 그건 한빈에게 기회로 작용했다.

이세명의 주름이 다시 요동쳤다.

“말해 보거라.”

“제가 부탁드릴 일은 천리 표국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입니다.”

“부족한데.”

“그럼 이건 어떨까요? ……강북 오대세가를 엿 먹이는 일이 될 겁니다. 물론 하북팽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강북 오대세가라는 말에 이세명이 먹잇감을 발견한 호랑이처럼 눈을 빛냈다.

강북 오대세가라면 하북팽가, 산동악가, 모용세가, 황보세가, 서문세가였다.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그럼 대금을 받으시겠습니까? 물론 대금은 귀곡장의 금액에 포함되는 겁니다. 의뢰는 국주님과 저만의 비밀이고요.”

한빈이 전낭을 다시 내밀자 이세명이 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전낭을 살짝 풀어 확인했다.

안을 들여다본 이세명이 헛웃음을 지었다.

“허, 황금 석 냥은 족히 되어 보이네.”

“네, 그렇습니다.”

“진작 말하지 그랬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진작 말했으면 간단히 해결되었을 것을……. 쯧쯧.”

“헉.”

한빈이 탄성을 질렀다.

물론 이것도 연기였다. 황금을 보여 줬다고 해서 의뢰를 바로 들어주지 않았을 거란 것을 한빈은 알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한빈의 표정을 살피는 이세명.

역시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 의뢰에 대한 조건부는 진심인가?”

“네, 진심입니다.”

이세명은 한참 동안 한빈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씩 웃음 한빈이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제 얼굴 닳겠습니다, 국주님.”

“허허.”

이세명이 마치 도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잠시 침묵이 오간 후 이세명이 계약서를 받아 들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계약.

모두가 얼떨떨할 뿐이었다.

이세명은 하나의 의문만이 남았다.

“귀곡장을 인수하려는 속뜻을 알 수 있겠나?”

한빈은 앞에 놓인 차로 입술을 적신 후 답했다.

“사실, 귀곡장만큼 좋은 훈련 장소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훈련 장소라니, 거길 훈련 장소로 쓴다고?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네.”

“그러니까요. 제 수하들이 담력이 너무 약해서요.”

물론 반만 사실이었다.

귀곡장의 가치는 그 정도가 아니었으니까.

뭐, 이세명은 조금은 납득하는 눈치였다. 아마 지금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일 것이었다.

“흠, 그런 용도라면…….”

말끝을 흐린 이세명은 멀리서 멀뚱거리고 있는 한빈의 일행을 바라봤다.

고생길이 훤하다는 안타까움을 담은 눈빛이었다.

그 시선을 받은 소대섭과 심미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심계가 깊은 이세명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세명과 한빈 사이에 심각한 대화가 오간 건 알겠는데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가 않았다.

물론 다른 낭인들도 둘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아마도 천리 표국 중 누군가가 기막을 펼친 것이 분명했다.

모두가 그들의 모습에 고개만 갸웃하고만 있었다.

하지만, 계약서가 오가고 돈이 오가는 것은 분명히 보았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을 때 드디어 기막이 걷혔다.

순간 이세명과 한빈 사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껄걸.”

“하하.”

웃음소리가 잦아들 때 한빈이 절도 있게 포권했다.

“국주님, 아니 대협. 감사드립니다.”

한빈은 계약서를 다시 확인했다.

작성된 계약서는 모두 세 부.

각각 한 부와 나머지 한 부는 관아에 제출할 것이었다.

그 모습에 낭인들이 칼을 손뼉을 치며 축하했다.

짝짝.

자리에서 일어난 한빈은 모든 일이 끝났다는 듯 허공을 바라봤다.

물론 한빈이 보고 있는 것은 구결이었다.

[속(速), 속(速), 속(速), 속(速)]

[체(體), 체(體), 체(體)]

[력(力), 력(力)]

[공(功), 공(功)]

하나 더 늘어난 공, 즉 내공이 그만큼 늘었다는 이야기였다.

한빈은 허허롭게 허공을 바라보며 자리로 돌아갔다.

낭인들은 썰물처럼 한빈의 주변에서 물러났다.

낭인왕과 마주 보며 편히 대화를 나눌 이는 이 객잔에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한빈은 예의를 지켜야 할 이였다.

뜻밖의 전개에 철노와 소대섭, 심미호는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천천히 돌아오고 있는 한빈을 본 심미호가 말했다.

“지금 주군이 사고 치신 거 맞죠?”

“뭔가 불길한데.”

소대섭이 맞받아치자 옆에 있던 철노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꼭 불길한 예감은 점쟁이처럼 잘 맞더라고요.”

그들이 소곤대고 있을 때 한빈이 도착했다.

“지금 뭐 해? 갑자기 내 귀가 간지럽던데 혹시…….”

“아니에요, 주군.”

심미호가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한빈이 자리에 탁 앉은 후 탁자에 계약서를 펼쳤다.

순간 모두가 헛숨을 토해 냈다.

소대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헉. 주군!”

“귀곡장을 왜 사신 거예요?”

심미호가 다급히 물었지만, 한빈은 그저 웃기만 했다.

심미호는 한빈을 다시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건 한마디로 철부지의 치기였다.

세 시진 전 소대섭 대주에게 치료비를 줄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후 이루어진 행동에 심미호는 고구마 한 자루를 먹은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심미호가 몇 시진 동안 일어난 일을 더듬고 있을 때 한빈이 입을 열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귀곡장이라니?”

“지금 귀곡장 사신 거잖습니까?”

이번에는 소대섭이 나섰다.

소대섭이 가슴을 두드리자 한빈이 표정을 굳히며 답했다.

“귀곡장이라고 하지 마.”

“네?”

“이제부터는 귀곡장이라고 하지 마. 땅값 떨어지게시리.”

“…….”

한빈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고 음식이나 마저 먹자고, 이거 다 이세명 국주님이 내는 거야. 그러니까 부족한 거 있으면 더 주문하라고.”

한빈은 씩 웃으며 손을 들어 점소이를 불렀다.

“여기서 제일 비싼 요리로!”

“네, 알겠습니다.”

점소이가 자리를 뜨자 심미호가 옆에 바싹 붙어 물었다.

“주군, 계획은 있으신 거죠?”

“당연히 있지.”

“대체 무슨 계획인가요? 저는 도저히 감을 못 잡겠네요.”

“비밀이야.”

씩 웃은 한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로 부채질을 했다.

그 모습에 심미호와 소대섭, 그리고 남은 음식을 먹던 철노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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