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흑묘 백묘 (4)
입구에서 술을 마시던 흑도의 무인 중 하나가 재빨리 일어났다.
“낭인왕께서 오셨다!”
“낭인왕을 뵈옵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울렸다.
그 목소리에 맞춰 머리 희끄무레한 백의 서생이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그 광경에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낭왕 이세명.
이십 년 전 홀연히 강북에 나타나 강북 낭인을 하나로 묶은 사내였다. 강북의 낭인들은 그를 낭인왕이라 부른다.
강호에서 주목하는 것은 이세명의 무력이 아니라 지략이었다. 그는 붓을 칼처럼 휘두르며 낭인들을 규합해 강북 최대 표국인 천리 표국을 세웠다.
그의 붓만큼이나 그의 검도 매섭다는 것은 측근만 아는 비밀.
이세명이 오늘 발길을 내디딘 이곳은 낭인들에게 휴식처와 같은 낭인 객잔이었다.
그는 한 달에 하루 이곳에 들러 낭인 중 쓸 만한 인재를 뽑아 간다.
지금 이 객잔에 모인 이들은 모두 이세명의 눈에 들기 위해 온 자들이다.
경외심 어린 눈빛을 뒤로한 채 이세명은 수하들과 구석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세 명의 호위가 점소이에게 턱짓한다.
점소이가 부랴부랴 주방에 쪽지를 전한다.
평소 내오던 음식을 미리 준비하는 것 같았다.
전생에서 익숙히 보던 광경에 한빈이 피식 웃었다.
한빈이 이세명을 바라보자 심미호가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속삭였다.
“주군, 이제 그만 나가시죠.”
“왜?”
“그러니까…….”
심미호가 곁눈질로 낭왕 이세명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이세명과 마주쳐서는 좋을 게 없다는 뜻이었다.
하북팽가의 직계라고 봐줄 이세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미호의 뜻대로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피해 낭인 객잔에서 나가려는 듯 보였다.
모두가 짐을 챙기고 일어나려 하는 순간 한빈은 출입구 쪽이 아닌 이세명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소대섭이 미간을 좁혔다.
상대는 천리 표국을 운영하고 있는 낭인왕이었다.
마주쳤다가는 그의 안줏감이 될 수도 있었다.
잘근잘근 씹히다 못해 뼈만 남기고 발릴 수도 있었다.
소대섭이 다급히 일어나자 심미호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대주, 잠시만요.”
“우리가 가 봐야…….”
“대주님, 지금 주군의 표정을 보세요.”
소대섭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활짝 웃는 한빈이 어느샌가 이세명의 앞에 가 있었다.
한빈의 표정을 확인한 소대섭이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뭐지?’
소대섭은 고개를 갸웃했다. 적지에서 저리 편한 표정이라니?
“흠.”
소대섭은 입을 가리고 헛기침했다.
심미호 말대로 지켜봐야 할 것 같아서였다.
물론 낭인의 무리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북팽가의 무복을 입은 이가 다가오니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모였을 때 한빈이 정중히 포권했다.
이세명이 눈매를 좁힐 때 한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세명 국주님.”
낭인왕이라는 별호가 아닌 본명이 나오자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가 나왔다.
이세명의 본명을 부를 수 있는 이는 천리 표국 내에서도 그리 많지 않았다.
새파랗게 어린 한빈이 고개를 들고 그의 본명을 불렀다?
이건 이를 지켜보던 낭인들에게는 훌륭한 안줏거리가 되었다.
“뭐야? 지금 낭인왕 어르신의 본명을 부른 거야?”
“그런데 저 친구는 누구래?”
“하북팽가의 무복인 것 같은데.”
낭인 무리가 술잔을 멈추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새파란 애송이가 한칼에 나가떨어지는 것이 그들이 상상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누구 하나 눈도 끔뻑이지 않을 때 이세명의 입이 열렸다.
“하하. 맞긴 한데, 그대는 누구신가?”
뜻밖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게도 적의는 없었다. 그의 표정에서 드러난 건 단순한 호기심.
뭐, 전생의 기억 그대로였다.
그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먼저였다. 그중 가장 좋은 방법이 그의 이름을 거침없이 부르는 것이었다.
물론 뒷수습을 못 한다면 탈이 날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한빈이 정중히 말을 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하북팽가의 팽한빈이라 합니다, 대협.”
“팽한빈이라면?”
“하북팽가의 막내입니다.”
“흠, 하북팽가의 자제분께서 여기에는 웬일인가?”
탐탁지 않은 눈빛이 살짝 스치다 바로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뀐다.
이세명의 눈빛을 받은 한빈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상의라?”
이세명의 눈이 더욱 빛났다.
정파인 하북팽가에서 직계가 찾아왔다라?
그것은 천리 표국을 세우고 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북팽가는 정파, 천리 표국은 정사지간의 단체였다.
서로의 영역에서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었다.
이세명의 호기심이 깊어질 때 한빈의 입이 열렸다.
“정확히 말하면 거래겠지요.”
“정파의 자제분이 내게 거래를 운운하니 호기심이 당기는군?”
유독 정파라는 이름에 힘을 준 이세명이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한빈은 대꾸하지 않고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이건 반어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세명의 입이 열렸다.
“궁금하기도 하고 거래도 좋지. 그런데 내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와 어울릴 처지인가? 나와 거래를 할 거라면 가주가 직접 와야 하는 게 도리 아닌가?”
역시 한빈의 생각이 맞았다.
한빈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감히 단언컨대 천리 표국이 손해 보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손해가 아니다라?”
마치 한빈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이세명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일단 들어나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국주님.”
“내가 자네 말을 들어 주는 시간은 어떻게 셈할 텐가?”
“제안이 마음에 안 드시면 오늘 이곳 술값은 제가 다 내겠습니다.”
뜻밖의 제안에 이세명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하. 당돌하군. 그런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 재미있군, 재미있어.”
경계와 호기심 사이에서 이세명의 마음이 한빈이 원하는 곳으로 살짝 기우는 것 같았다.
순간 낭인 무리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우리한테 쏘겠다고 하는 거야?”
“오늘 배 터지게 먹어 볼까?”
웅성대는 낭인들의 시선이 이세명에게 모였다.
기대감 가득한 낭인들에 비해 멀리서 지켜보던 심미호는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랐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심미호는 한빈이 낭인왕에게 인사만 하고 올 줄 알았다.
대화가 이리 길어질 줄은 생각도 못 한 것이었다.
상반된 주변의 시선 속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대신, 제 제안이 마음에 드시면 국주님께서 이곳 술값을 다 내시는 걸로 하죠.”
한빈의 말에 이세명의 눈썹이 꿈틀댔다.
애송이가 던진 가벼운 도발이었다. 하지만, 이세명은 이 도발을 지나칠 수 없었다.
낭인들이 보내는 시선이 천하제일인들의 비무를 바라보는 것보다 더 뜨거웠기 때문이다.
호기심 사이를 뚫고 승부욕이 치솟는 이세명.
받아들이고 제안을 거절하면 그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열한 승리가 아닌 낭인왕으로서의 당당함까지 보여 주는 것이 그를 지켜보는 이에 대한 예의였다.
표정을 바꾼 이세명이 말했다.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지.”
그의 한마디에 주변은 다시 웅성대기 시작했다.
벌써 점소이에게 최고급 술을 주문하는 무인도 있었다.
어떤 이는 고기를 잔뜩 주문하고 말이다.
이세명은 그런 낭인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여유 있는 눈빛으로 한빈의 입이 열리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한빈은 주변을 둘러보며 사파 무인들의 추가 주문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귀곡장에 관심이 있습니다.”
한빈은 짧게 말하고 이세명을 바라봤다.
이세명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것 같았다.
한빈이 말한 귀곡장은 내부가 모두 노랗게 물들어 있는 신기한 장원이었다.
문제는 귀곡장 덕분에 근처는 사람이 못 사는 폐허가 되었다는 점이다.
밤이면 귀신 소리가 들리고 주변은 곡물이 말라 죽을 정도로 이상한 땅이었다.
이세명은 지금 그 땅을 처분 못 해서 안달이었다.
그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천수장을 왜 들먹이는 것이냐?”
천수장은 귀곡장의 원래 이름이었다.
“제가 구입했으면 합니다.”
순간 이세명의 눈이 커졌다.
잠시 시선을 돌린 이세명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헛기침했다.
“흠.”
천수장이 귀곡장이라는 이름으로 변한 것이 오 년.
바로 땅을 내놨지만, 사 가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저 애송이가 사 가겠다고 하고 있으니 이세명은 믿을 수 없었다.
이세명이 살짝 웃으며 한빈의 속마음을 셈하고 있는 순간 둘 사이 공간에 묘한 웃음이 넘쳐 났다.
“하하.”
이세명의 시선을 조용히 받아 내던 한빈이 이제 때가 됐다는 듯 말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귀곡장에서 흘러나오는 노란 물 때문에 마을의 작물들이 다 죽어난다죠? 밤이면 귀신 소리가 들리고 말입니다. 귀곡장을 관리하는 비용이 엄청나다는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런데도 자넨 귀곡장을 사겠다는 건가?”
이세명의 얼굴에 잔주름이 물결쳤다.
눈을 가늘게 뜬 이세명이 물었다.
“그걸 알면서 사겠다는 이유는?”
“제가 이번에 소가주 후보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요동치던 이세명의 잔주름이 멈췄다. 너무 생뚱맞은 얘기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갑자기 소가주 후보 이야기가 나오다니?’
표정을 수습한 이세명은 짐짓 모른 척 맞장구쳤다.
“하북팽가의 소가주 후보는 둘이라 들었는데?”
“이번에 저도 후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축하하네.”
“그래서 제가 가문과 하북에 뭔가 보여 줘야 할 것 같아서 황추골의 귀곡장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 관심이라는 게 이해가 안 되는데 설명해 주게.”
“제가 귀곡장을 관리하면서 주변의 민심을 얻고 싶습니다. 하북성 관아의 마음은 덤이고요.”
한빈의 말에 이세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세명이 치열하게 머리를 굴렸다.
귀곡장은 죽음의 땅으로 불리며 주변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가 즐비했다.
주변의 농경지도 죽어 있는 땅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천수장의 유지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었다.
사려는 사람이 없어 소유권을 관에 넘기려 하던 참이었다.
관에서는 애물단지를 받고 싶어 하지 않아 시간이 지체되고 있는 상황.
그걸 사겠다는 하북팽가의 막내라?
혹시 저 하북팽가의 막내가 관아와 이어져 있나?
이것은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이세명은 옆에 있는 자신의 호위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놈에 대해서 알고 있나?
-전에 말한 하북의 수치, 하북 최고의 겁쟁이가 바로 놈입니다.
-뭐라고? 저놈이?
-네, 맞습니다. 피만 보면 기겁을 하는 놈입니다.
-관아와의 관계는?
-닿아 있는 줄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양 한 마리가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넣고 호기를 부리는 거라는 건가?
-그래도 놈의 의도를 모르시니…….
-귀곡장은 우리에게는 썩은 이빨. 밖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최악이잖나. 팽가 가주의 표정이 볼만하겠군.
-팽가의 가주가 가만있을까요?
-낙장불입!
-그래도 철없는 아이의 뒤통수를 쳤다고 팽가에서 항의라도 한다면…….
호위는 말끝을 흐렸다.
이세명의 눈빛이 예기를 발했기 때문이다.
이세명은 다시 한빈을 바라봤다.
“그래서 얼마나 주겠다는 건가?”
이제 본격적인 거래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