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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3화 (13/621)
  • 13화. 흑묘 백묘 (3)

    옆에 심미호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고 있고 말이다.

    그들의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었다.

    “소 대주는 소가주 경쟁을 할 신물을 주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

    “묵철로 만든 보검을 장신구로 달고 다니라고?”

    “······.”

    “아니면 신물로 가주가 될 힘을 얻으라고? 전자 같아, 후자 같아?”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나와 우리 수호대가 그 묵철로 된 칼 하나 얻는다고 갑자기 무력이 확 상승할 거 같아?”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 우리한테 지금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

    “······.”

    “우리에게 필요한 건 군자금이지.”

    “주, 주군, 지금 군자금이라고 하셨습니까?”

    소대섭의 눈이 커졌다.

    한빈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을 이었다.

    “소 대주는 소가주 경합이 뭐라고 생각해?”

    “그야······.”

    “말이 경합이지, 그냥 전쟁이야. 전쟁.”

    “전쟁이라······.”

    소대섭이 말끝을 흐리자 심미호가 끼어들었다.

    “주군의 말씀이 맞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군자금은 필수죠. 가주 후보로 있는 첫째 공자님과 둘째 공자님의 경우 외가의 덕을 보고 있지만······.”

    심미호가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그냥 까놓고 말해도 돼. 나는 외가 덕을 볼 일이 티끌만큼도 없지. 두 형이 금수저인 데 비해 나는 흙수저.”

    “제 뜻은 그게 아니고요. 그러니까······.”

    “괜찮아. 내가 기반이 없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일! 난 신물보다 자금이 필요해.”

    “주군, 그런 깊은 뜻이······.”

    심미호가 수긍을 하면서도 말을 맺지 못했다.

    소가주 후보의 신물을 만들 묵철을 전당포에 맡긴다면 가주가 가만히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주군에 대한 묘한 기대감이 생기는 그녀였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심 부대주가 염려하는 일이 뭔지 알아. 그것 하나 극복 못 하면 어떻게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어. 심 부대주는 돌아가는 즉시, 경쟁자에 대한 감시부터 맡아 줘.”

    “주군, 그런 말씀은······.”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번을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다고 했어.”

    “맞는 말씀입니다. 존명!”

    심미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사실 내 목표는 가주가 되는 것이 아니야!”

    갑작스러운 선언에 심미호의 눈이 커졌다.

    “주군, 그럼 대체······.”

    그녀가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당연히 생존이지. 강한 놈이 살아남은 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 거야.”

    “맞는 말씀이지만······.”

    “난 혼자 살아남지 않을 거야. 꼭 너희들과 함께 살아남겠어!”

    한빈은 시선을 셋에게 고루 나누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소대섭과 심미호의 눈빛이 빛났다.

    * * *

    한빈이 다음으로 들른 곳은 하북에서 제일 유명한 음식점이자 기루인 천화루였다.

    천화루의 앞에 한빈이 멈추자 또 일행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번에는 소대섭이 나섰다.

    “공자님, 군자금이 필요하다고 하셔 놓고 대낮에 기루에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 한빈이 품에서 전낭 몇 묶음을 꺼냈다.

    그 전낭 중 하나를 집어 소대섭에게 내밀었다.

    “받아, 소 대주.”

    “주군 이게 뭡니까?”

    “딸아이가 아프다면서.”

    “네?”

    “그때 집법당에서 그랬잖아. 비급을 훔친 심증이 딸아이가 아파서라고.”

    “아.”

    소대섭이 탄성을 흘렸다.

    모두 사실이었다. 아픈 딸아이 때문에 아내도 자신도 힘들었다.

    소대섭은 입을 벌린 채 전낭을 살짝 열어 봤다.

    “헉.”

    탄성이 비명으로 바뀌었다.

    전낭 속 은자는 열 냥은 되어 보였다.

    놀란 소대섭의 귀에 한빈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입 벌리지 말고 넣어 둬.”

    “너무 많습니다.”

    “하북 최고의 의원을 불러서 진찰받아. 오래 두면 큰 병이 되니까.”

    “그래도 너무······.”

    “대주한테 주는 거 아니야. 대주 가족한테 주는 거지. 그리고 앞으로 힘든 일은 내가 알아채기 전에 말해.”

    “그래도······.”

    “내가 말했지. 이거 군자금이라고.”

    “네, 그러셨죠.”

    “내 칼한테 돈 쓰는 거야.”

    순간 소대섭은 이를 악물었다.

    튀어나오려는 흐느낌을 참기 위함이었다.

    자신의 주군을 오해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모두가 후회스러웠다.

    소대섭이 포권했다.

    “존명!”

    이후에도 한빈은 심미호, 철노에게 전낭을 나눠 주었다.

    전낭을 받은 이들의 심정은 다 똑같았다.

    그 감정이 그들의 눈빛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한빈이 아무렇지도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 들어가자고.”

    “진짜 천화루에······.”

    “아니, 거기 말고 저기!”

    한빈은 천화루 옆의 허름한 객잔을 가리켰다.

    * * *

    한빈이 들어온 곳은 천화루 옆 조그만 음식점.

    구 층 전각의 천화루에 비해 다 쓰러져 갈 것 같은 그 집은 불결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빈이 음식점으로 들어가 휘적휘적 걷자 음식점 안에서 따가운 눈초리가 쏟아졌다.

    뒤를 따르던 소대섭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음식점 내부에는 낭인들로 가득했다.

    인상 험악한 낭인들은 정갈한 복장의 한빈 일행이 들어오자 경계심을 보냈다.

    모두가 뻘쭘하게 뒤따랐다.

    옆 마을에 놀러 온 강아지처럼 불안해하는 일행을 뒤로한 채 한빈은 창가로 가 아무렇지도 않게 앉았다.

    마치 제집인 듯 자리에 앉은 한빈에 비해 소대섭과 심미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팽가에서 칼 밥을 꽤 먹었다는 그들도 이런 분위기는 처음인 듯 보였다.

    그들을 보고 씩 웃은 한빈은 자리를 가리키며 눈짓했다.

    한빈의 지시에 그들은 마지못해 앉았다.

    심미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주군, 대체 여긴 왜 왔어요?”

    “만날 사람이 있어서.”

    “만날 사람이요?”

    “혹시…….”

    심미호가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심 부대주.”

    “그러니까, 낭인들이 모인 곳에 오셨다는 건 묵철을 판 돈으로 낭인을 사서 전쟁을 하시겠다는…….”

    “심 부대주!”

    “네, 주군,”

    “너무 나갔어.”

    한빈이 어이없다는 듯 심미호를 바라보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네요.”

    아무리 힘을 우선시하는 소가주 경합이라지만,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은 가칙을 어기는 것이었다.

    그때 허름한 복장의 점소이가 왔다.

    “뭐 드릴까요? 손님.”

    “여기 소면 한 그릇씩 하고 죽엽청 몇 통만 갖다줘.”

    한빈의 주문에 점소이가 실망한 듯 다시 물었다.

    “다른 건 필요 없고요?”

    “백숙도 두 마리만 내다 주고. 제일 좋은 놈으로!”

    “빨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태도를 바꾼 점소이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사라졌다.

    한빈의 모습에 심미호는 눈매를 좁혔다.

    ‘저 자연스러움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주문하는 모습은 마치 강호에서 몇십 년은 구른 낭인의 모습처럼 보였다.

    한빈이 씩 웃으며 심미호를 바라봤다.

    “왜 그래?”

    “아, 아니에요, 주군.”

    심미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철노가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다른 객잔 다 놔두고 대체 왜 여기 들어오신 겁니까?”

    “비밀이야, 철노.”

    한빈이 씩 웃자 이번에는 소대섭이 물었다.

    “아까는 저희보고 칼이라고 하셨으면서 지금은 비밀이라니,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강호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속담이요?”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는 인물은 제일 먼저 죽는다고.”

    “컥.”

    소대섭이 먼저 나온 소면을 먹다 헛숨을 들이켰다.

    전에는 몰랐지만, 한빈이 말하면 농담 같지가 않았다.

    진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소대섭은 생각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농담이야. 일단 밥부터 먹자고.”

    한빈이 다시 분위기를 풀었지만, 소대섭과 심미호의 눈빛은 잘 벼린 칼날처럼 예기를 발했다.

    주변에 강북에서도 제일 거칠다는 하북의 낭인들이 득시글대니 아무래도 긴장한 것 같았다.

    각 잡힌 그들의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었다.

    음식이 나오고 술잔이 돌아도 소대섭과 심미호는 허리에 찬 도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보다 못한 한빈이 말했다.

    “심 부대주, 초짜처럼 왜 그래?”

    “제가 뭘요?”

    “뭘요라니? 긴장한 모습이 꼭 무림 초출 같잖아. 우리 대주와 부대주가 그러면 안 되지. 그냥 제집이다 생각하고 편히 먹어.”

    한빈의 말에 심미호가 천장을 바라봤다.

    뒷골목에서는 칼 잘 쓰는 놈보다는 깡이 더 무서운 법.

    거친 낭인 무리로 가득한 공간에서 쫄지 말라니!

    이게 말인가?

    지금의 기분은 팽경빈이 칼로 그녀의 어깨를 내려치려던 순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빈이 이번에는 소대섭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도 마찬가지로 잔뜩 얼어 있었다.

    한빈의 눈빛에 제 발 저린 소대섭이 다급히 손을 흔들었다.

    “긴장한 거 아닙니다.”

    “그럼 왜 그러고 있는데?”

    “아, 그게 아니라…….”

    소대섭이 말끝을 흐렸다. 대주씩이나 돼서 긴장한 모습을 들키기는 싫었다.

    표정을 수습한 그가 화제를 돌리려는 듯 입을 열었다.

    “나오신 김에 무씨검가에 들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무씨검가?”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도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린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전생의 기억 중에서 좁쌀만 한 지분을 차지하는 것이 무씨검가였다.

    심미호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왜 모르는 척하세요? 주군의 약혼녀가 계시는 곳이 하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무씨검가잖아요.”

    “…….”

    한빈이 말없이 바라보자 심미호가 어색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주군께서 경합은 전쟁이라고 하셨잖아요. 전쟁에는 무엇이든 이용해야 한다고 봐요.”

    “심 부대주 말이 맞아. 그런데 무씨검가가 과연 내 칼이 되어 줄까?”

    “무씨검가의 무소율 아가씨는…….”

    심미호가 번뜩 떠오르는 게 없었는지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등에 칼을 안 꽂으면 다행이지.”

    한빈의 농담 같은 소리에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빈에게 내세울 것은 약혼녀와 그녀의 집안밖에 없었다.

    약혼녀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헤벌쭉 벌리기 일쑤였던 한빈이 이런 말을 하다니!

    모두가 놀라고 있을 때 죽엽청과 요리가 나왔다.

    한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죽엽청을 병째 들이켰다.

    “캬. 술맛 좋네.”

    천연덕스러운 한빈의 모습에 심미호가 눈매를 좁혔다.

    그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전생의 기억에 무씨검가의 무소율은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철저한 실리주의를 추구했던 그녀였다.

    물론 전생의 한빈은 그녀가 뱉은 남자 중 하나였다.

    한빈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죽엽청을 마저 들이켰다.

    그렇게 두 시진가량이 흘렀다.

    술도 다 떨어지고 요리도 다 떨어지고 대화의 주제까지 다 떨어지자 심미호가 넌지시 물었다.

    “주군, 언제까지 여기 계실 거예요?”

    “서두를 거 없잖아.”

    “그래도…….”

    그때였다.

    객잔의 목소리가 기막을 쳐 놓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한곳으로 이어지는 시선.

    그곳에는 박도를 옆에 찬 일행이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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