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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2화 (12/621)
  • 12화. 흑묘백묘 (2)

    한빈이 미간을 좁혔다.

    ‘아버지 한번 보는데 부적이라니?’

    그것도 잠시, 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씩 웃으며 부적을 받아 들었다.

    셋을 뒤에 남겨 둔 뒤 한빈은 가주전으로 들어갔지만 가주 팽강위는 안 보였다.

    그때 옆쪽 문이 열리더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한빈을 향해서 걸어왔다.

    고개를 갸웃하는 한빈을 향해 노인이 조용히 포권했다.

    “공자님, 오셨습니까?”

    자세히 보니 하북팽가의 총관 이설영.

    전생에는 그리 볼 일이 거의 없어 얼굴을 떠올리기까지 힘들었다.

    한빈도 마주 포권했다.

    “총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총관 이설영은 태상가주 때부터 총관 자리를 이어 오던 이였다.

    가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자였다.

    한빈의 정중한 태도에 이설영이 살짝 눈매를 좁혔다.

    그것도 잠시, 이설영은 비단 주머니를 내밀었다.

    “일단 이것부터 받으시죠.”

    “네, 총관님.”

    한빈은 조용히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 모습에 이설영이 눈매를 좁혔다.

    비단 주머니를 받아 든 한빈의 눈빛에는 어떤 호기심도 묻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설영이 물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필요하다면 총관님께서 말씀해 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이설영의 흰 눈썹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항간에 미쳤다는 소문이 있어 조금 걱정했는데, 지금 보니 마치 오랜 시간 수련한 도인과도 같은 분위를 풍기는 한빈이 기특했던 것이다.

    이설영이 말을 이었다.

    “공자님, 열어 보십시오.”

    “네, 총관님.”

    한빈은 조용히 비단 주머니를 열었다.

    그곳에는 서찰과 검은색 쇳덩이가 있었다.

    한빈이 나지막이 외쳤다.

    “혹시 이 쇠는 묵철입니까?”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이설영이 빙긋 웃었다.

    “묵철이 맞습니다.”

    “네, 묵철이군요.”

    한빈은 주먹만 한 묵철을 다시 비단 주머니에 넣었다.

    이설영의 눈에 다시 호기심이 차올랐다.

    묵철은 황금값의 다섯 배나 나가는 진귀한 광물.

    가격도 가격이지만, 묵철을 일반 철에 섞어서 제련한다면 보도(寶刀)가 탄생하기 마련이었다.

    이 보도가 소가주 후보의 표식이었다.

    첫째나 둘째 모두 이런 식으로 보도를 만드는 과정을 거쳤다.

    이설영은 첫째와 둘째에게 묵철은 전달했을 때의 기억이 선명했다.

    첫째와 둘째는 덜덜 떠는 손과 수습 못 하는 표정으로 그들의 기쁨을 나타냈었다.

    하지만, 한빈은 달랐다.

    “후.”

    총관 이설영이 자신도 모르게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한빈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저리 평온한 태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의 수련이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한빈은 이설영이 보고 있는 가운데서 천천히 서찰을 폈다.

    서찰을 다 읽은 한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철민이라면······.”

    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설영이 답했다.

    “공자님도 아시는군요. 하북 제일의 명장이지요.”

    “그런데, 하북 제일의 명장이라고 하는 건 잘못된 소리 아닙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북 제일이 아니라 중원 제일 아닙니까?”

    “하하, 그 사람이 하북 제일이라 불러 달라고 합니다. 저도 그 친구에게 따로 기별을 넣었으니 최선을 다해 공자님의 첫 애병(愛兵)을 만들어 줄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총관님. 그런데······.”

    한빈이 말끝을 흐렸다.

    “말씀해 보십시오.”

    “제 마음대로 만들어도 될는지요?”

    “크기나 모양 모두 관계없습니다.”

    “가주님의 뜻인가요?”

    “가칙이 그렇지 않습니까? 게다가 공자님의 애병인데, 공자님이 알아서 하시는 거죠.”

    말을 마친 이설영은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한빈을 살폈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가주가 내리는 칼을 받고 저럴 수는 없었다.

    한빈의 표정을 관찰하던 이설영이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공자님, 묵철과 그 서찰의 의미에 대해서 아십니까?”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아.”

    이설영이 입을 탁 벌렸다.

    가주가 묵철과 서찰을 내리는 것은 곧 칼을 내리는 것, 즉 칼을 만들어 오라는 의미로, 소가주 후보로 정한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소가주 후보는 첫째, 둘째가 올라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막내 공자가 떡하니 칼을 받은 것이다.

    소가주로 뽑힐 가능성 없는 막내 공자가 칼을 받았다는 것은 복이 아닌 화였다.

    지금 당장은 괜찮겠지만, 정의맹에 간 첫째 공자가 돌아와 소가주 경합이 본격화된다면 한빈은 모두의 표적이 될 터였다.

    한마디로 그때는 탈탈 털릴 것이 훤했다.

    사실 총관 이설영은 가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설영이 안타까운 듯 탄성을 이어 나갈 때 한빈이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습니다.”

    한빈의 말에 이설영은 번뜩 정신 차렸다.

    마치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한빈의 표정과 말.

    잠시 대전을 뒤덮은 침묵.

    이설영이 겨우 입술을 뗐다.

    “공자님, 그럼 건강히 지내십시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관님. 아, 잠시만요!”

    한빈의 말에 이설영 총관이 멈칫했다.

    “왜 그러십니까?”

    “이거 저잣거리에서 구해 온 부적이에요. 건강하시라고요.”

    “아······. 감사합니다, 공자님.”

    총관 이설영은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꼬깃꼬깃 접혀 있는 황색 부적에서 한빈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철노의 마음이었지만, 이설영이 그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한빈이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뒤돌아서자 총관 이설영은 점점 멀어져 가는 한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인재야 인재.”

    저런 인재를 보고 사람들이 왜 미쳤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 * *

    한빈이 가주전에서 나오자 그 앞에서 기다리던 철노가 달려왔다.

    “공자님, 아무 일 없는 것을 보니 부적이 효과가 있었나 보네요.”

    “그래. 효과가 있더라.”

    거짓은 아니었다.

    총관의 표정을 보니 총관의 마음을 십분지 일은 훔친 느낌이었다.

    철노가 궁금한지 다시 질문을 이었다.

    “공자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한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비단 주머니를 보여 줬다.

    철노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뒤에서 지켜보던 소대섭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어찌나 빠른지 누가 보면 이형환위로 착각할 정도였다.

    “주군, 지금 이 주머니의 의미는······.”

    “그래, 내가 소가주 후보라는 이야기다.”

    순간 소대섭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소리 질렀다.

    “주군, 만세입니다!”

    그때 흥분하는 소대섭의 옆구리를 심미호가 슬쩍 찔렀다.

    “진정하십시오, 대주.”

    “부대주, 그게 무슨 말······.”

    “공자님이 소가주 후보가 되셨다는 건 우리가 일 공자님의 친위대인 수호일대, 이공자님의 새로운 수호이조와 싸워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고 보니······.”

    단번에 소대섭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그들의 모습을 본 한빈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설마 내가 죽게 놔두겠어?”

    한빈의 말에 소대섭의 낯빛은 다시 정상을 찾았다.

    “그럼, 소가주가 되실 자신이 있으신 거죠?”

    “아니.”

    “······.”

    순간 소대섭과 심미호는 입을 떡 벌렸다.

    그들의 표정을 확인한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여차하면 같이 튀는 거지. 인생 뭐 있어?”

    “헉.”

    “아니, 공자님!”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을 때 한빈이 묵철이 든 주머니를 퉁퉁 튀기며 앞서 나갔다.

    그 모습에 가주전을 호위하던 무사들이 눈을 크게 떴다.

    “자네, 들었어?”

    “나는 귀가 없나, 이 사람아. 지금 분명 사 공자가 칼을 받았다고 했어.”

    “이게 무슨 하북이 뒤집어지는 소리야?”

    “그러게 말이야?”

    “그럼 소가주 후보가 셋이라는 이야기야?”

    “그렇지.”

    “이제부터는 줄을 잘 서야겠네그려.”

    “풋.”

    “자네, 왜 웃는가?”

    “자네는 사 공자한테 줄 서려고?”

    “에이, 그건 아니지.”

    “그런데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이건 변화가 아니야.”

    “그럼, 뭔데?”

    “사 공자를 사지(死地)로 몰아넣은 거지.”

    “듣고 보니 그러네. 그래도 이건 경천동지할 일이 맞긴 맞지.”

    “거기까지는 인정함세.”

    * * *

    그날 오후 한빈 일행은 칼을 만들 대장간에 가기 위해 짐을 꾸렸다.

    대장간의 위치는 북으로 오십 리.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곳이었다.

    짐을 꾸리는 한빈을 바라본 심미호가 물었다.

    “주군, 왜 그렇게 짐을 꼼꼼히 꾸리시는 거예요? 멀리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모르지.”

    “오십 리면 경공을 쓰시면······.”

    “심 부대주.”

    “네, 주군.”

    “내 경공 수준 알아, 몰라?”

    “아.”

    탄성을 터뜨린 심미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언제 불똥이 떨어질지 몰라서였다.

    심미호는 힐끔 한빈의 짐을 바라봤다.

    오십 리면 일류 무인이라면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거리.

    그에 비해 짐은?

    육포에 웬 지필묵까지 준비를 한다는 말인가!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그녀였다.

    그때 한빈이 외쳤다.

    “준비됐으니 출발하자고.”

    “네, 주군.”

    심미호가 반사적으로 포권했다.

    요 며칠 느낀 거지만, 한빈은 외부에서 보던 것과 전혀 달랐다.

    무공의 경지는 낮더라도 알 수 없는 심계를 지녔으며 정체불명의 조력자를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뒤끝이 있는 상관이었다.

    그때 한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심 부대주, 혹시 속으로 내 욕하고 있었던 건 아니지?”

    “아니에요.”

    심미호는 잽싸게 고개를 흔들었다.

    * * *

    그날 오후.

    하북팽가를 떠난 한빈이 도착한 곳은 전당포 앞이었다.

    소대섭이 물었다.

    “주군, 여긴 왜 오셨습니까?”

    “잠깐 맡길 게 있어서 그러니, 너희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소대섭이 불안한 마음에 다시 물었다.

    “혹시 묵철을 맡기시려는 건 아니겠죠?”

    “비밀이야!”

    말을 마친 한빈은 허리춤을 매만지며 전당포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소대섭과 심미호가 고개를 떨궜다.

    말은 안 해도 주군의 겁쟁이 병이 도진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일행 사이에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모두가 전당포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을 때 심미호가 말했다.

    “설마 묵철을 전당포에 맡기고 튀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아닐 거라 확신하네. 최근에 몰라보게 달라진 주군께서 그러실 리가 없지, 암, 없고말고······.”

    소대섭이 말끝을 흐렸다.

    최면을 걸듯 되뇌었지만, 불길한 예감은 숨길 수 없던 것이다.

    철노는 둘의 모습에 그저 웃기만 했다.

    한빈이 전당포에 들어간 후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한빈이 해맑게 웃으며 나왔다.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허리춤에 불룩했던 묵철이 없어진 것이다.

    내리쬐는 태양만큼 따가운 일행의 눈빛에 한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왜 다들 그렇게 봐?”

    “묵철 주머니는 어디 두신 겁니까?”

    심미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한빈이 씩 웃었다.

    “맡겼어.”

    “네?”

    “주군, 대체 묵철을 맡기다뇨?”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하기 마련이었다.

    심미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소대섭도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주군! 그걸 전당포에 맡기셨다는 얘기입니까? 대체 왜······.”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한빈이 한숨을 쉬며 손짓했다.

    “소 대주, 심 부대주 모두 진정해.”

    소대섭이 심호흡한 후 다시 물었다.

    “대체 왜 그걸 맡기신 겁니까? 하북팽가에서 이런 일은 절대 없었습니다. 대체 ······.”

    소대섭이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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