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달아 놓겠습니다 (2)
무공보다는 계책에 능한 그녀는 탐나는 인재였다.
어찌 보면 이 공자 팽경빈보다 더 까다로운 인물.
한빈이 그들의 면면을 살피고 있을 때 팽경빈은 집법당주 팽대위 앞에서 포권했다.
“숙부님을 뵙습니다.”
“집법당주님을 뵙습니다.”
심미호가 이어 포권하자 팽대위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예의는 집어치우고. 본 거부터 말하게.”
팽대위의 말투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그의 말에 이 공자 호위조인 수호이조의 조장 심미호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며칠 전 팽가의 비급이 외부로 유출된다는 첩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첩보에 따라 조사하던 중 그 증거를 오늘 잡았습니다.”
“증거라면?”
팽대위가 짧게 물었다.
“소대섭이 비급을 빼돌리기 위해 숨겨 놓는 것을 제가 목격했습니다.”
그때 소대섭이 소리쳤다.
“저는 그런 일이······.”
소대섭이 말을 맺기도 전에 팽대위가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소대섭의 말이 끊어졌다.
아혈을 제압당한 것이었다.
상황이 자신 쪽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한 이 공자 팽경빈이 앞으로 나왔다.
“확실합니다. 제 명예를 걸겠습니다. 철저히 조사해 주실 걸 간청드립니다.”
그때 뒤쪽에서 보고 있던 한빈이 슬쩍 끼어들었다.
“다들 증언만으로 소대섭 조장을 범인으로 모는데, 만약 소대섭 조장이 범인이 아니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팽경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귀찮다는 듯 말했다.
“네 이야기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가?”
“거짓말이고 자시고, 사실이 아니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공자님.”
갑작스러운 호칭에 이 공자 팽경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둘째 형님이 아닌 이 공자라?’
혈연이 아닌 공적인 관계로 붙어 보자는 것이었다.
하긴 일주일 전에도 한빈에게 당한 적이 있으니 만만히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철저히 준비했기에 어깨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감춘 팽경빈이 입을 열었다.
“미쳤다고 하더니 이제는 호칭까지 헷갈리는구나.”
“······.”
한빈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지금 용린검법을 얻을 수 있는 황색 점을 또 찾은 것이다.
그것도 지난번에 찾았던 이 공자에게서 말이다.
황색 점은 두 곳에 있었다.
한마디로 월척이었다.
하나는 팽경빈의 얼굴에 있었고 다른 한 곳은 심미호의 등이었다.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취하고 싶지만, 비무를 해서 저들을 꺾고 구결을 취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단은 때를 기다려야 했다.
그때 뜨끔한 시선을 느낀 한빈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의 정체는 집법당주 팽대위였다.
팽대위가 눈매를 좁히며 입을 열었다.
“막내야. 이렇게 끼어들 때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만약에 증거가 없다면 나는 너를 가문의 법도로 엄히 다스릴 것이다.”
팽대위의 말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한빈은 표정의 변화 없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숙부님, 아니 집법당주님, 지금은 증거가 있습니까?”
“증거라면 둘의 증언이지.”
팽대위가 팽경빈과 심미호를 가리켰다.
한빈이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만약 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요? 그것도 증거가 됩니까?”
“음.”
팽대위가 침음을 삼켰다.
그는 자신이 팽가의 규율을 누구보다도 공정히 지켰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한빈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의 저울이 미리 기울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팽대위가 말했다.
“너는 네 증언에 무엇을 걸 것이냐? 명예냐 아니면 돈이냐? 아니면 네 목숨이냐?”
“저는 명예도 없고, 돈도 없고 제 목숨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한빈의 답에 주변에서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자 팽대위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그럼 뭘 걸 것이냐?”
“제 호위조를 걸겠습니다.”
순간, 주변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한빈의 호위인 수호사조의 무사들이었다.
“왜, 우리를 걸어?”
“막내 공자님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제기랄!”
소대섭을 제외한 이들은 입이 자유롭기에 한빈을 원망하는 소리가 들끓었다.
다른 이들의 목소리도 가끔 들려왔다.
“이걸 동귀어진이라고 해야 하나?”
“정상은 아니야.”
“이거 할 말이 없네. 호위사조로 배정 안 받은 게 천운이야. 역시 사람은 줄을 잘 서야······.”
소란이 커지자 팽대위가 거도를 바닥에 찍었다.
쿵!
집법당이 들썩일 정도의 울림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 팽대위가 한빈을 바라봤다.
“그럼 알았다. 네 말을 증거로 인정하지.”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법이라는 것은 만민에게 평등해야 하는 것. 상대도 증거로 인정받으려면 저와 같은 것을 걸어야 한다고 봅니다.”
한빈의 말에 팽대위가 고개를 돌렸다.
팽대위의 시선을 받은 팽경빈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숙부······.”
팽경빈의 말을 팽대위가 끊었다.
“지금은 공적인 자리. 숙부라 부르지 말아라. 넌 네 증언에 무엇을 걸 것이냐?”
질문을 받은 팽경빈은 힐끔 심미호를 바라봤다.
심미호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자 팽경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제 호위인 수호이조를 걸겠습니다.”
팽대위가 거대한 도를 높이 들었다.
그 수법은 모든 공격을 이 한 수로 막는다는 팽가의 맹호천하.
내공이 실린 이 수법으로 파공성이 일어났다.
팡!
실내가 마치 종처럼 공명했다.
울림이 흐려질 때쯤 팽대위가 말했다.
“너희의 언약을 이 도가 기억했다.”
팽대위가 터벅터벅 걸어가 묶여 있는 소대섭의 혈도를 풀었다.
그러고는 턱짓으로 집법당 무사를 가리켰다.
신호를 받은 집법당 무사가 바로 포박을 풀었다.
포박에서 풀려난 소대섭이 한빈의 앞으로 달려와 허리를 숙이며 포권했다.
“공자님, 저를 위해······.”
“쉿. 진짜는 지금부터 시작이니 정신 바짝 차려.”
말을 마친 한빈이 씩 웃으며 이 공자 팽경빈에게 고개를 돌렸다.
“일단 그쪽 증거부터 봅시다.”
한빈의 제안에 팽경빈이 가소롭다는 듯 한빈을 바라봤다.
“알아서 네 무덤을 파는구나! 어리석은 놈.”
한빈을 비웃던 눈빛도 잠시 팽경빈은 자신의 호위대 조장 심미호에게 명령을 내렸다.
“앞장서라. 심미호 조장.”
“네. 명을 받들겠습니다.”
심미호가 깊게 포권한 뒤 앞장섰다.
잠시 후.
모두가 수호사조의 숙소에 모였다.
집법당주 팽대위는 숙소를 쓱 훑어보다가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숙소를 샅샅이 뒤지거라.”
팽대위의 지시에 무사들이 흩어져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책이란 책은 다 모아서 팽대위의 앞에 바쳤다.
팽대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책을 하나하나 살폈다.
“철혈도법이라? 이건 대외비가 아니지.”
팽대위는 살핀 책을 아무렇지 않게 구석에 던졌다.
“육합검법?”
팽대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소대섭을 바라봤다.
“팽가의 호위가 검법을 익혀?”
팽대위가 주변을 둘러보자 소대섭이 재빨리 변명했다.
“죄송합니다. 검법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연구해야 해서 봤습니다.”
“그래. 그럼 일단 넘어가고······.”
팽대위는 책을 살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팽경빈 측에서 고발한 비급은 여기에 없었다.
공표는 안 했지만, 이 공자 팽경빈은 분명 오호단문도라 했었다.
오호단문도라면 팽가의 직계만 익힐 수 있는 상승 도법.
이를 외부로 빼돌렸다는 것은 중죄였다.
그런데 이 숙소에서는 오호단문도의 ‘오’자도 찾을 수 없었다.
팽대위가 팽경빈과 심미호를 매섭게 바라봤다.
“대체 어디 있다는 거지?”
마치 죄인을 문책하듯 그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하지만, 팽경빈과 심미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심미호가 앞으로 나왔다.
“바로 저곳에 비급을 숨겼습니다.”
심미호가 가리킨 곳을 본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심미호가 가리킨 곳은 가주가 친필로 내린 족자였다.
[무(武)]
단 한 글자였지만, 힘이 느껴지는 필체.
가주의 내공을 서체에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팽대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족자에 숨겼다고?”
“저 뒤에 숨기는 것을 봤습니다.”
심미호가 다시 족자를 가리켰다.
팽경빈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때 소대섭이 나섰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일주일 전 가주님께서 내려 주신 족자입니다. 그 뒤에 공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말에도 무사들은 함부로 족자를 잡지 못했다.
가주가 내린 족자를 함부로 만진다는 것은 그만큼 불경한 일이었다.
갑자기 실내는 쥐 죽은 듯 조용해지고······.
이 공자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승리를 확신했다.
“확인해야 합니다.”
그의 말에 팽대위가 웃었다.
한참 동안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던 팽대위가 몸을 날려 족자를 잡았다.
얼마나 빠른지 팽대위의 손은 칼날이 지나가는 듯한 소리를 냈다.
휙!
소대섭의 예상은 완벽하게 벗어났다.
뒤쪽 공간에서 팽대위가 서책 한 권을 집어 온 것이다.
“저, 저건······.”
소대섭의 목소리가 떨릴 때 한빈이 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그러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정신 줄 꽉 잡고 있어. 그리고 내가 얘기하면 고개만 끄덕이고.”
소대섭이 말없이 눈만 끔벅였다.
그때였다.
팽대위가 서책을 올려놨다.
탁.
소대섭과 서책 사이를 오가던 팽대위의 시선이 주변으로 향했다.
서책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비밀 공간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모두의 의심을 키웠다.
“표지가 없는 책이라?”
팽대위의 말에 한빈이 말했다.
“확인해 보시지요. 집법당주님.”
이상한 것은 한빈이 웃음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팽대위가 서책의 표지를 넘겼다.
동시에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대섭이 첩자였다니.”
“비급을 빼돌리다니 말이 되나?”
“역시, 이 공자님이 맞았어.”
“당연하지, 이 공자님이 어디 헛말을 하실 분인가?”
소란이 커지자 팽대위가 거도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쾅!
동시에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모두가 침을 꼴깍 삼키고 있을 때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집법당주님, 어서 책을 확인해 주시지요.”
팽대위가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팽대위가 무심한 표정으로 모두에게 말했다.
“이건 비급이 아니다.”
그 말에 두 쌍의 눈동자가 한없이 떨렸다.
이 공자 팽경빈이 화살처럼 튀어나왔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주님.”
“네가 직접 확인해 보아라.”
팽대위의 말에 팽경빈이 책장을 넘겼다.
하늘 천(天)으로 시작한 글귀는 분명 천자문이었다.
팽경빈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다가 옆을 힐끔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한빈이 입가에 미소를 피우고 있었다.
누가 보면 염화미소로 착각할 정도의 해맑은 미소였다.
팽경빈은 그제야 일이 틀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숙소에 비밀 공간을 만들고 족자 뒤에 오호단문도의 비급을 숨긴 것이 불과 몇 시진 전이다.
그 시각 수호사조는 모두 보수공사에 끌려갔기에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한빈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그의 눈썹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누군가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