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차 한 잔 더 받으시죠 (2)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철노는 안절부절못했다.
“공자님, 저라도 들어가 차 시중을······.”
“됐어.”
한빈이 짧게 끊었다.
철노가 포기 못 하겠다는 듯 방으로 달려 들어가려 했으나 이 공자의 호위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탁자에 마주 앉은 이 공자 팽경빈은 아무 말 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 쪽으로 팽경빈의 기세가 조용히 쏟아졌다.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잔잔히 흘러들어 오는 기세!
한빈은 그 기세를 받으며 팽경빈의 경지를 추측했다.
한빈이 판단한 그의 경지는 아직은 일류.
그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한빈이었다.
“형님, 차 한 잔 따르겠습니다.”
“······.”
팽경빈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이 미리 준비한 차를 따랐다.
졸졸.
“정화 차구나. 올해는 흉작이라 찻값이 올라 황금을 주어도 못 산다고 하더니 어떻게 구한 것이냐?”
“형님을 위해 구했습니다.”
한빈이 찻주전자를 더욱 기울였다.
찻주전자에서 차가 시냇물처럼 나오며 잔이 거의 차자 한빈이 멈추려 했다.
그때 팽경빈이 외쳤다.
“더!”
차를 더 따르라는 이야기였지만,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한빈이 찻주전자를 기울이자 팽경빈이 다시 외쳤다.
“더!”
강압적인 말투.
한빈은 군말 없이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물이 점점 넘치려 하지만, 팽경빈이 계속 턱짓하며 한빈을 재촉했다.
졸졸.
이상한 것은 물이 봉우리처럼 찻잔 위로 솟았지만, 넘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공으로 넘치는 차를 가두고 있었다.
내공은 일류지만, 그 수법만큼은 절정에 가까웠다.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기세로 누르려는 것이 분명했다.
팽경빈은 내공으로 찻잔의 넘치는 물을 가둬 두며 무력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까지는 한빈의 예상대로였다.
자신의 무력을 한없이 과신하고 내기를 좋아하는 것이 팽경빈이었다.
이런 식으로 무력으로 위협하는 것도 기억 그대로였다.
그때 팽경빈이 재촉했다.
“더!”
팽경빈이 웃으며 잔을 들자 한빈도 더 따랐다.
한빈이 재빨리 멈췄다.
이제는 찻물이 다 떨어진 것이다.
팽경빈은 씩 웃으며 한빈을 바라봤다.
누가 봐도 당황한 표정으로 찻주전자를 내려놓고 있는 한빈을 비웃었다.
이제는 때가 됐다는 듯 잔을 든 채 입을 열었다.
“네가 비열한 수법으로 셋째를 쓰러뜨렸다지? 그리고 내 하인을 괴롭힌 것도 사실이고?”
눈빛이 한빈을 단칼에 끊으려는 듯 쏘아졌다.
한빈이 담담히 말했다.
“비열한 수법은 아니지만, 쓰러뜨린 건 맞습니다. 그리고 하인은 우리 가문의 법도에 따라 처리한 것뿐입니다. 하인에게도 서열이 있죠.”
“그럼 형제 간의 서열도 잘 알겠구나?”
“그건 힘으로 정해지는 게 아닙니까?”
“힘이라······. 너는 우리 가문에서 네 위치를 알고 있느냐?”
“무슨 말씀이신지요?”
한빈이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갸웃했다.
팽경빈이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라는 존재는 이 찻잔에서 넘치는 물과 같다. 우리가 막아 주지 않으면 이렇게 넘치는 물이 되지.”
팽경빈은 찻잔을 감쌌던 내공을 줄였다.
순간 내공을 줄인 만큼 물이 살짝 한빈의 쪽으로 흘러내렸다.
한빈이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넘칩니다, 형님. 그거 비싼 건데.”
당황한 한빈의 모습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팽경빈이 말을 이었다.
“그래, 한번 넘친 물은 절대로 주워 담지 못하지. 넘친 물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
“서서히 말라 가겠지. 이 내공이 팽가라는 담장이고 형들이다. 넌 우리가 없으면 천천히 말라 가는 물이 될 것이다.”
“제가요?”
한빈이 눈을 크게 뜨자 팽경빈이 매섭게 눈매를 좁혔다.
“그렇다. 여기에 너 말고 또 누가 있더냐? 팽가의 직계 중 피가 무서워 도를 잡지 않는 자가 또 누가 있더냐!”
“······.”
한빈은 말없이 팽경빈의 눈을 응시했다.
저 이글거리는 눈빛에 전생에는 압도당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한빈은 겨우 헛웃음을 참았다.
그때 팽경빈은 이제 심판의 시간이 됐다는 듯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한빈이 자신의 수하들과 하인에게 행했던 것을 돌려주려는 의도 같았다.
동시에 한빈이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무릎 꿇으라는 이야기다.”
“원하신다면······.”
“당장!”
“그 전에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형님.”
“물어보거라.”
“저를 왜 눈엣가시처럼 보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것은 네가 우리 가문의 수치이기 때문이다.”
“도움이 안 된다니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부족한 자와 맞들면 찢어지는 수도 있다.”
팽경빈이 서슬 시퍼런 눈으로 쏘아봤다.
“그럼 제가 계륵이라는 겁니까?”
“그렇다.”
팽경빈이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빈이 탁자 옆에서 뭔가를 꺼냈다.
뜻밖의 행동에 팽경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뭔가?”
“향로와 계륵입니다. 닭의 갈비뼈에는 저처럼 이렇게 살이 없죠.”
한빈은 조그마한 향로에 닭의 갈비뼈를 손으로 부숴 넣었다.
팽경빈이 고개를 갸웃할 때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탁자 옆에서 다시 잎 하나를 꺼내 넣었다.
팽경빈이 다시 물었다.
“그건 또 뭔가?”
“감초입니다. 약방의 감초지요. 어찌 보면 계륵과는 반대라고도 할 수 있는 물건입니다.”
“흠, 너는 대체 지금 뭘 하려는 것이냐?”
“전국시대의 황제들은 차를 즐기면서 특별한 향을 피웠다고 합니다. 그 향기는 차의 맛과 향을 돋운다고 하지요.”
향로에서 은은한 향기가 살짝 퍼지자 팽경빈이 물었다.
“지금 나에게 뇌물을 쓰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에서는 한기가 묻어 나왔다.
손에 든 찻잔을 감싼 내공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내공은 낮았지만, 과연 대단한 감각이었다.
역시 소가주 후보다운 실력이었다.
“뇌물이 아니라 차를 좋아하시는 형님에 대한 아우의 예우라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여러 잎과 재료를 다기에 빻은 뒤 불을 붙였다.
순간 향기가 짙어졌다.
어찌 보면 정화 차와 딱 맞는 청아한 향기였다.
한빈은 살짝 손을 흔들어 향기가 더 빨리 퍼지게 했다.
“형님, 향이 어떻습니까?”
“좋다. 하지만, 너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팽경빈의 말이 끝나자 한빈이 옆에서 주전자를 하나 더 들었다.
이상한 것은 한빈이 희미하게 웃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빈이 그 어느 때보다 정중히 말했다.
“차 한 잔 더 받으시지요?”
“······.”
이번에는 팽경빈이 답하지 못했다.
한빈의 의도를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 한빈의 모습이 팽경빈은 낯설었다.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형님의 그릇이 궁금합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팽경빈의 다른 찻잔에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졸졸.
차가 흘러내리는 소리에 맞춰 새로운 차의 향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순간 팽경빈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한빈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참, 차를 바꿨습니다. 이 차는 도화차입니다. 복숭아 진액으로 우려냈으니 맛은 제가 장담하지요.”
“음.”
팽경빈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복숭아를 가까이 두면 심각한 부작용이 생기는 체질이었다.
한마디로 그에게 복숭아는 독약과 같았다.
팽경빈의 손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빈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주전자를 더욱 기울였다.
여차하면 주전자를 팽경빈의 머리에 쏟아부을 기세로 따르고 있었다.
팽경빈이 외쳤다.
“이놈이 감히, 내게 무슨 짓이냐?”
“이 주전자에 들어 있는 도화차가 저라는 물이라고 치죠. 이것을 형님께서 얼마나 담을 수 있는지 보려고요.”
한빈이 계속 주전자를 기울이며 팽경빈을 관찰했다.
팽경빈의 손에서 반투명한 푸른색 진기가 올라왔다.
한빈이 나지막이 외쳤다.
“절정?”
“이제 알았느냐?”
팽경빈이 피식 웃으며 찻잔을 쥔 채 일어났다.
절정이 맞았다. 하지만, 절정에 오른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았다.
“숨기고 있었습니까? 그것도 형제에게까지 말입니까?”
“실력의 삼 할을 숨기는 건 밖이나 안이나 마찬가지 아니더냐?”
“역시 둘째 형님이시군요.”
이건 진심이었다.
한빈은 주전자를 놔두고 깊이 포권했다.
굴복한 듯한 한빈의 모습에 팽경빈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잠시, 팽경빈은 미간을 좁히더니 가늘게 숨을 토했다.
“후.”
그 모습에 한빈이 빙긋 웃었다.
한빈이 향로에 넣은 재료들은 흔히 구할 수 있는 재료였다.
하지만, 재료를 일정 비율로 넣고 태우면 혈액순환과 기의 흐름을 일정하게 유지해 주는 효과가 있다.
주로 정력제 용도로 사용하는 약제.
전생에 귀검대가 자주 쓰던 수법이었다.
듣고 보면 한없이 좋은 비법처럼 들리겠지만, 문제는 내공을 끌어올린 뒤에 냄새를 맡으면 지속력 때문에 내공을 거둬들이기 힘들다는 것이다.
독이 아니니 증거도 남지 않는 완벽한 수법.
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때론 계륵도 쓸모가 있고 호랑이보다 무서울 때가 있는 법입니다. 형님.”
“후.”
팽경빈이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내공을 거둬들이지 못하십니까?”
“후.”
팽경빈은 한숨으로 답했다.
보통 일류보다 절정이 더 제어하기 힘들다.
지금 어설프게 움직인다면 기가 역류할 수 있다.
감각이 뛰어난 팽경빈은 다소 빨리 알아챈 것 같았다.
한빈은 턱을 괴고 팽경빈을 바라봤다.
파란 진기가 줄기줄기 찻잔을 감싸고 있다.
저잣거리 차력사들은 흉내도 못 낼 진짜 묘기였지만, 한빈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
지금 한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팽경빈의 마음속이었다.
떨리는 눈빛.
계속 불어 넣고 있는 내공.
팽경빈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주화입마.
결론부터 말하면 주화입마는 입지 않을 것이었다.
여기서 섣불리 움직인다면 아마 내상을 입고 보름 정도는 요양해야 할 것이었다.
만약에 누군가 내공을 불어 넣는다면?
그 때문에 주화입마에 들 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완전범죄.
한빈도 입을 열지 않았고 팽경빈도 손만 부르르 떨며 입을 열지 않았다.
둘이 이렇게 대치한 지 반 시진이 지났다.
한참을 보던 한빈은 기지개를 켜며 책을 한 권 꺼냈다.
그러고는 팽경빈의 맞은편에 편히 앉아 책을 봤다.
이상한 것은 책의 내용이 그에게 보이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빈이 말했다.
“형님이 심심하실까 봐 책 한 권 꺼냈습니다.”
“······.”
팽경빈은 이제 한숨도 못 쉬고 있다. 이마에 구슬땀만 흘렸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팽경빈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한빈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야한 장면들로 가득한 춘화집이었다.
정력제로 쓰이는 향초에 춘화집.
게다가 내공은 극상으로 끌어올린 상태.
그야말로 멋진 조합이었다.
팽경빈이 평정심을 잃기 시작했다.
‘미친놈. 비열한 놈. 개자식!’
그 욕설은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진기를 다스리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찻잔을 감쌌던 푸른 진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푸른 진기가 폭발할 것처럼 일렁였다.
그때였다.
한빈이 향로를 끄고 창문을 열었다.
이 향의 유효 시간은 앞으로 차 한 잔 마실 시간.
한빈은 빙긋 웃으며 팽경빈에게 속삭였다.
“남의 수하를 때린 건 제대로 선 넘으신 겁니다. 형님. 마지막으로 제가 하나만 말씀드리죠.”
“······.”
“저는 아직 피가 무섭습니다. 물론 남의 피는 말고요.”
“······.”
“일단 몇 대만 맞죠.”
한빈은 정중히 포권한 후 딱밤을 때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