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차 한 잔 더 받으시죠 (1)
그것도 잠시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저도 지켜 드리겠습니다. 제가 무공만 찾으면요!”
그 허풍에 한빈이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나중에 꼭 지켜 줘야 해. 그리고 철노, 부탁이 있어.”
“네, 공자님. 말씀하십시오.”
“쓸 만한 검 한 자루만 구해 줘.”
“도가 아니라 검이요? 그런데 왜 갑자기 병기는······.”
철노가 놀라서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 냈다.
한여름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한빈이 손을 흔들었다.
“별 의미는 두지 말고. 그냥 구해 줘.”
의미 없다는 것은 거짓.
전생에 죽도록 휘두른 것이 검이었다.
이곳이 하북팽가이긴 했지만, 한빈이 앞으로 쓸 애병은 검이어야 했다.
한빈이 작게 웃자 철노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나갔다.
철노가 나가자 한빈은 흔들리는 호롱불 옆에 떠 있는 비급을 바라봤다.
“용린검법이라······.”
그것은 한빈의 목표를 이루어 줄 열쇠였다.
현재의 무공 수준은 그야말로 하룻강아지!
피만 보면 허물어져 버리는 약점 때문에 가문의 수치를 넘어 하북의 겁쟁이라 불리는 게 지금의 현실이었다.
묘하게 하북팽가의 내공심법과는 맞지 않는 몸 때문에 성취는 더욱 늦을 때였다.
뭐 관계는 없었다.
지금은 이십 년 전의 자신이 아니니까.
* * *
그날 저녁.
악필승은 급하게 집법당으로 달려갔다.
악필승의 표정이 어찌나 흉흉한지 집법당을 지키는 호위들이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휙힉.
악필승이 지나가자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모습에 호위 모두 오늘은 사달이 날 것으로 생각했다.
공자 간의 비무에서 삼 공자 팽무빈이 인사불성이 되어 의당으로 실려 간 것은 팽가 내에 벌써 소문이 쫙 퍼진 후였다.
물론 실력이 아니라 암수를 썼다는 것이 대부분의 평가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암수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호위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예상외로 집법당에서는 건물이 울릴 정도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껄껄껄!”
그 웃음은 한동안 이어졌다.
* * *
며칠 뒤 한빈은 자신의 연무장 한가운데서 숨을 고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뒤통수를 친 정의맹과 위씨세가에 대한 복수를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을 잊을 만큼 광귀로 살아온 전생은 평범치 않았다.
하지만, 당면 과제는 하북팽가를 접수하는 것이었다.
그보다 앞서 해야 할 일은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발바닥에 박힌 가시 같던 삼 공자는 당분간은 얼씬거리지 않을 테고 이제는 이 공자의 차례였다.
한빈은 일단 몸을 단련하기로 했다.
전생의 무공은 없어졌으나, 경험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 어려움은 없었다.
휙휙.
한빈은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라?’
몇 번 몸을 움직이던 한빈이 입꼬리를 올렸다.
검을 잡자 그 움직임이 더욱 민첩해진 것이다.
하지만, 계속 움직이자 금세 배가 고파졌다.
한빈의 표정을 본 철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공자님, 참 좀 챙겨 오겠습니다.”
“괜찮아, 철노.”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이 허기는 진짜 배고픔이 아니었다.
구결에 대한 갈망에 몸이 반응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구결을 채우지 못하면 이 허기도 채워지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철노는 사람 좋은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요즘 힘내시는 걸 보니 제 마음이 가볍습니다.”
철노는 재빨리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잠시 후 저 멀리서 철노가 대나무 통을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뒤로 이 공자의 무리가 보였기 때문이다.
한빈은 씩 웃었다.
이 공자는 삼 공자와 함께 둘째 부인의 자식이었다.
며칠 전의 일 때문에 시비를 걸려고 오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최종 목표는 분명 자신임을 알고 있었다.
한빈이 조용히 지켜볼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 공자의 무리 중 하나가 철노에게 시비를 걸었다.
퍽!
다짜고짜 철노의 등을 후려갈긴 것이다.
철노가 푹 쓰러지고 대나무 통 속의 음식물이 나뒹굴었다.
그들은 그 주위를 떠나지 않고 킥킥거렸다.
한빈은 이것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도발.
한빈은 피식 웃으며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한빈이 공자의 하인에게 손짓했다.
“어이!”
“······.”
“일루 와 봐!”
“왜 그러십니까? 공자님.”
두 번이나 부르고서야 삼 공자의 하인이 뒤돌아봤다.
“지금 너희가 때린 게 누군지나 알고 그러나?”
“같은 하인 아닙니까?”
지금의 말대꾸가 한빈의 모든 상황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한빈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하인은 맞지. 근데 너희보다 하북팽가의 짬밥을 다섯 배는 더 먹어서 그게 문제지.”
“그게 무슨 상관······.”
이 공자의 수하들은 말을 맺지 못했다.
한빈이 그의 뺨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짝!
경쾌한 소리가 사방에 울리자 이 공자의 하인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심스럽게 말리는 것이 전부였던 한빈의 행동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짝! 짝!
손을 휘두르던 한빈은 멈춘 후 손을 털었다.
그 모습에 한빈의 행동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하인이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누가 가라고 했어?”
뒤로 물러서던 하인이 멈칫하자 한빈이 바닥을 가리켰다.
“박아!”
“네?”
“아직 소문이 안 퍼졌나 보네. 이거 서운한데.”
“제게 그러시면 우리 공자님이······.”
“일단 박아!”
한빈의 호통에 하인이 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박았다.
동료가 당하는 걸 멀리서 본 이 공자의 다른 하인이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한빈은 다른 하인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다른 하인 놈은 자리를 빠져나가며 분명 웃고 있었다.
이 공자는 한빈을 꾸짖을 명분을 찾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간만에 마음이 통했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공자님.”
철노가 사색이 된 얼굴로 묻자 한빈이 웃었다.
이건 이 공자가 던진 미끼이지만, 한빈도 원하는 바였다.
“아니야, 철노.”
“아무래도 불안합니다.”
“불안하면 튀어야지.”
한빈이 철노를 잡아끌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머리를 박고 있던 하인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겁쟁이 막내 공자의 말투에서 위화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평소에 보던 그가 아니었다.
마치 미친개 한 마리가 막내 공자의 탈을 쓰고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 * *
하북팽가의 의당 구석.
요 며칠 동안 팽무빈의 소식에 하북팽가는 술렁였다.
하북팽가의 녹을 먹는 이들은 대부분 막내 공자 한빈이 암수를 썼을 거라 입을 모았다.
하지만, 이기는 놈이 장땡이라는 분위기가 하북팽가에 감돌았다.
힘을 중시하는 하북팽가에서 힘이란 곧 승리를 뜻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의당에 누워 있는 삼 공자 팽무빈은 더욱 이를 갈고 있었다.
뼈가 붙으려면 적어도 한 달은 누워 있어야 한다고 의원에게 통보를 받은 후 홧김에 주먹을 내려치다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
“휴.”
팽무빈이 한숨을 내쉴 때 그의 뒤쪽에서 웃음소리가 울렸다.
“하하.”
팽무빈이 힘들게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그보다 주먹 하나는 더 큰 키의 사내가 웃고 있었다.
“형님.”
“그래, 나다. 어쩌자고 피도 안 마른 놈한테 당한 것이냐?”
“방심한 틈을 타 덤비는데 어떻게 합니까?”
“내 얘기는 왜 기어오르게 만들었냐는 말이다.”
“형님. 기습당해서 누워 있는 것도 서러운데, 왜 놀리십니까?”
“놀리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이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형님이 그놈을 혼내 주시지요.”
“내가 그러려고 온 것이다. 어떻게 당했는지 소상히 말해 보아라.”
“그러니까, 그놈이 고분고분하게 맞다가 갑자기 박치기로······.”
삼 공자 팽무빈의 설명에 팽경빈이 눈매를 좁혔다.
팽경빈은 동생의 말을 마치 스승의 강의처럼 곱씹었다.
설명을 다 들은 팽경빈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한빈이가 주화입마에 든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지. 내가 한 수 보여 주마.”
“비무로 혼내 주시게요?”
“내가 항상 말하지 않았느냐? 힘으로 누르는 건 하수, 기세로 눌러야 중수라 하지 않았느냐?”
“그럼 고수의 수법은 무엇입니까?”
“고수는 상대를 혼낼 필요가 없다.”
“왜입니까? 형님.”
“상대가 알아서 바닥을 기기 마련이니까.”
“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형님.”
“고수의 수법은 아니지만, 내 중수의 수법으로 놈을 혼내 주마. 게다가 놈은 이미 내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
“미끼라뇨?”
“몰라도 되니 넌 구경만 하거라!”
“아,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팽무빈은 자신의 상태도 잊고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 * *
다음 날 한빈의 처소 앞.
철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우리 공자님이 아직 기침을 안 하셨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건 넷째 사정이고, 어서 내가 왔다고 고하거라.”
“그래도 공자님······.”
때아닌 소란에 한빈이 잽싸게 귀를 기울였다.
짝!
이건 철노가 분명 맞는 소리였다.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철노의 뺨이 남아나지 않을 터였다.
대충 상황을 보니 이 공자의 하인을 벌준 것을 꼬투리 잡아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물론 예상했던 바였다.
한빈은 기지개를 켜며 미소를 지었다.
삼 공자 팽무빈과의 대결 같은 요행은 바라면 안 됐다.
한빈은 천천히 문 앞으로 걸어가 냄새를 맡았다.
이상하게도 기를 감추는 능력과 후각만은 전생과 똑같았다.
특유의 향기가 문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향기가 점점 진해졌다.
이것은 누군가 문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한빈은 기척을 숨기고 기다렸다.
‘하나, 둘, 셋!’
한빈은 힘차게 문을 열었다.
덜컹.
누군가가 재빨리 뒤쪽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열리는 속도가 더 빨랐다.
빡!
“앗.”
두 가지 소리가 알맞게 섞여 한빈의 귀를 즐겁게 했다.
한빈은 머리를 긁적이며 놀란 척 외쳤다.
“어, 둘째 형님 아닙니까?”
당황한 모습의 사내가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한빈이 의도한 것이다.
평정심을 잃게 만드는 것은 사소한 행동부터 시작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공자 팽경빈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를 보던 한빈의 눈이 커졌다.
팽경빈에게 황색 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쿵쿵.
한빈의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구결을 갈구하는 마음은 자석이 쇠를 끌어당기는 것과 같았다.
사실 팽경빈이 오면 한 번 더 화를 돋운 후에 본때를 보여 주려 했다.
하지만, 작전을 바꿔야 했다.
만일을 위해 준비한 것을 사용하기로 했다.
한빈의 커진 눈을 본 이 공자 팽경빈이 미간을 좁히며 외쳤다.
“막내야, 뭐 하는 것이냐? 아무리 내가 무서워도 그렇지. 남자가 되어서 그렇게 굳어 버리면 팽가의 자존심은 뭐가 된단 말이냐?”
이 공자 팽경빈은 단단히 오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짓했다.
“일단 들어오시지요. 형님.”
이 공자 팽경빈이 얼굴을 구기며 들어왔다.
뒤쪽에서 그의 호위가 따라오려고 하자 한빈이 외쳤다.
“너희들은 밖에 대기하거라. 형님이 내게 긴히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요, 형님?”
한빈은 이 공자 팽경빈을 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에 팽경빈이 입꼬리를 올리며 수하들을 바라봤다.
“너희는 밖에 있거라. 그리고 무슨 소리가 들려도 절대 들어오지 말아라.”
팽경빈은 절대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턱짓으로 수하들을 뒤로 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