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3화 (3/621)
  • 3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2)

    비급이 말을 걸듯 물어보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제일식이라는 제목 밑에 한빈이 흡수한 글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속(速)을 획득하셨습니다. 속도가 빨라집니다. 검을 잡게 되면 더욱 빨라집니다.]

    [속(速)]

    [흡수한 구결은 바로 적용됩니다.]

    구결을 확인한 한빈은 팽무빈을 향해 주먹을 끊임없이 뻗었다.

    퍽! 퍽!

    한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용린검법의 비급과 자신의 주먹을 번갈아 보았다.

    ‘진짜 빨라졌네.’

    비급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용안(龍眼)으로 구결을 확인하시겠습니까?]

    다시 뜬 문구에 한빈은 씩 웃었다.

    이건 주인에 대한 공손함이었다.

    한빈이 속으로 외쳤다.

    ‘물어보지 말고 그냥 확인해!’

    비급이 한빈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흡수된 점이 글자로 바뀌었다.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속(速)을 획득하셨습니다.]

    한층 더 빨라진 주먹.

    한빈은 주먹을 계속 뻗으며 조용히 왼쪽을 바라봤다.

    허공에 떠 있는 비급 위쪽에는 똑같은 두 개의 단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속(速), 속(速)]

    두 개의 글자가 마치 작대기의 눈금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앞으로 점점 글자가 늘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한빈은 그제야 강호에 흩어진 구결을 찾으라는 글귀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광부가 광산에서 금을 캐듯 한빈은 이제부터 구결을 채굴하면 되는 것이었다.

    구결을 나타내는 점을 모두 흡수했지만, 한빈의 주먹은 쉬지 않고 팽무빈의 얼굴을 향했다.

    물론 이것은 본능이었다.

    전생에도 상대방이 항복하지 않는 한, 공격을 멈춘 적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한빈의 팔목을 낚아챘다.

    탁.

    한빈은 상념에서 깨어나 상대를 바라봤다.

    건장한 체구의 무사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빈을 내려 보기만 하던 그의 입이 열렸다.

    “공자님!”

    날이 선 목소리다.

    “······.”

    한빈도 말없이 상대를 바라봤다.

    기억 속에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무사의 이름은 악필승.

    팽무빈의 호위인 수호삼조(守虎三組)의 수장이었다.

    놈은 꽤 악질이었다.

    비무를 가장한 폭력에 한빈이 당하고 있을 때 항상 웃던 놈이었다.

    어찌 보면 주인보다 놈이 더 좋아했던 것도 같았다.

    한빈이 뚫어져라 보고 있을 때 악필승이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계신 겁니까? 공자님!”

    낮게 깔린 음성이 한빈을 압박하고 있었다.

    한빈은 힐끔 팽무빈의 상태를 확인했다.

    한마디로 인사불성.

    이제는 놔줘도 될 것 같았다.

    더는 얻을 구결도 없으니 말이다.

    한빈은 씩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악필승 조장!”

    악필승이 잠시 움찔했다.

    목소리에서 왠지 알 수 없는 힘이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빈의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렸다.

    “왜 대답을 안 하나? 악필승 조장!”

    “네, 공자님.”

    악필승이 마지못해 고개를 살짝 숙이자 한빈은 냉랭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것인가?”

    “공자님이야말로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악필승이 감정이 복받치는지 외쳤지만, 한빈은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물었다.

    “일개 호위가 공자 간의 비무에 끼어들게 되어 있나?”

    “······.”

    악필승이 아무 말 없이 이를 악물자 한빈은 질문을 이었다.

    “내가 비무 규칙을 어겼나?”

    악필승이 못 참겠다는 듯 말했다.

    “저희 공자님이 인사불성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악필승이 널브러진 팽무빈을 가리키며 외쳤다.

    순간 한빈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팽가 규율에는 비무를 멈추는 경우는 상대가 항복한 경우뿐이다. 알고 있나? 악필승 조장!”

    “지금 상황이······.”

    “팽무빈 공자가 항복을 선언했나?”

    물론 아니었다.

    인사불성이 되어 있으니 항복할 틈이 없었다.

    “······.”

    악필승이 아무 말 못 하고 입을 벌렸다.

    한빈의 말은 가문의 규칙에서 한 치 어긋남이 없었다.

    거기에 자신의 형을 팽무빈 공자라 칭했다. 이는 마치 비무에서는 형제라 생각하지 말라는 가주의 말을 철저히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피도 눈물도 없는 가주와 한빈이 왜 겹쳐 보인다는 말인가?’

    한빈을 압박하려던 악필승이 도리어 기세에 눌리는 느낌이었다.

    악필승은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일단은 이 자리에서 벗어나 집법당에 보고해야 할 것 같았다.

    악필승은 뒤쪽을 바라보며 수하들에게 외쳤다.

    “다들 공자님을 옮겨라.”

    동시에 수하들이 팽무빈을 부축해 의당(醫黨)으로 향했다.

    일이 수습되자 악필승은 한빈에게 포권했다.

    “공자님,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든 악필승은 한빈을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일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공자님이 어떤 사고를 치신 건지 가주님께 똑똑히 보고하겠습니다.”

    팽한빈이 씩 웃었다.

    “팽가에서 칼 밥 먹은 지 십 년이 넘는 사람이 아버님의 성품을 그리 몰라서야. 쯧쯧.”

    한빈이 혀를 차자 악필승은 표정을 와락 구겼다.

    그 표정을 본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냥 가려고?”

    뒤돌아서려던 악필승이 멈췄다.

    “······.”

    고개 돌린 악필승은 아무 말 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미치지 않고서야 여기서 더 일을 크게 만들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한빈의 다음 말에 악필승의 예상은 산산이 조각났다.

    “박아!”

    한빈이 청강석으로 된 연무장 바닥을 가리켰다.

    한빈의 말에 악필승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그의 말은 한빈의 다음 외침에 의해 끊겼다.

    “공자들 간의 비무를 방해한 죄!”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공자님.”

    날이 섰던 악필승의 목소리가 살짝 무뎌짐과 동시에 그의 눈이 한없이 커졌다.

    하지만, 한빈은 아무 표정 없이 말을 이었다.

    “공자들 간의 비무를 방해한 자네의 오른팔을 이 자리에서 잘라 내야 팽가의 규율이 살겠지만, 악 조장이 그동안 우리 가문에 헌신한 공을 봐서 다른 벌칙으로 갈음하겠다. 이의 있나?”

    순간 악필승이 석상이 되었다.

    한빈이 다가오더니 악필승의 도를 허리에서 낚아챘다.

    쓱.

    악필승은 꼼짝할 수 없었다. 무력의 차이가 아니었다.

    신분의 차이.

    기세의 차이.

    지금 한빈의 동작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한빈은 악필승에게 빼앗은 도를 그에게 겨누며 나지막이 외쳤다.

    “대가리 박아!”

    순간 악필승의 몸이 허물어졌다.

    털썩!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세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악필승이 죽자 살자 달려든다면 한빈은 지금 상태에서 이길 자신은 없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옛 속담이 맞았다. 때론 복어가 몸집을 불리는 것처럼 허세도 필요했다.

    이것은 강호에서 꼭 필요한 처세술 중 하나였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이것은 한빈이 팽가에서 첫 번째 꺼내 든 패였다.

    붉은 노을이 길게 꼬리를 드리웠을 때도 한빈은 악필승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씩씩대는 소리가 악필승의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호위대의 수장 정도 되는 무인이 머리를 박는다고 해서 힘들어할 리는 없었다.

    다만, 수치심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한빈이 잠시 사색에 잠겨 있을 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공자님!”

    고개를 돌려 보니 철노였다.

    다시 돌아온 철노를 바라본 한빈은 작은 미소를 피워 냈다.

    급하게 달려든 철노는 한빈의 얼굴부터 확인했다.

    “그냥 피하시지. 이렇게 다치시면 어떻게 합니까?”

    철노가 소매로 한빈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물론 한빈의 피는 아니었다.

    철노가 한빈의 손을 바라봤다.

    “이게 뭡니까. 얼굴만 아니라 주먹도 다치셨습니다. 이건 평소에 다치지 않던 부위인데······.”

    철노가 말끝을 흐리며 피 묻은 한빈의 주먹을 만지자 한빈이 재빨리 손을 저었다.

    “철노. 난 괜찮아.”

    “너무합니다. 왜 공자님과 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랍니까? 진짜 더러운 새끼들이······.”

    “괜찮다고 해도.”

    손을 저은 한빈이 왼손에 들고 있던 악필승의 도를 바닥에 던졌다.

    챙.

    동시에 철노의 시선이 머리를 박고 있던 악필승에게 향했다.

    철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건 대체 누구······.”

    “알 것 없어. 철노. 배고프니 어서 가자!”

    한빈이 철노를 잡아끌었다.

    그는 한빈에게 끌려가는 도중에도 울먹이며 소리 질렀다.

    “아. 공자님, 자꾸 다치시면 제 마음이······.”

    “난 괜찮다고 했잖아.”

    “제가 무공만 잃지 않았어도 저놈들은 한주먹감도 안 되는데!”

    “철노가 언제 무공을 익혔어?”

    “몰랐습니까?”

    “아. 그렇다고 치자.”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무공의 무 자도 모르지만, 가끔씩 이렇게 허풍을 떠는 철노였다.

    한빈과 철노가 멀어지자 남은 삼 공자의 호위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 말을 시작으로 삼 공자의 호위들이 한마디씩 뱉었다.

    “삼 공자, 아니 우리 공자님이 진 거야?”

    “저쪽에서 암수를 썼겠지.”

    “무슨 암수?”

    “모르니까 암수지.”

    “그런데, 막내 공자가 대체 어딜 다친 거야? 솔직히 맞은 데도 없잖아.”

    “주먹 까졌다고 하잖아.”

    “그건 때리느라 까진 거고. 도끼로 장작 팼다고 도끼날을 걱정하는 법이 있냐고?”

    “그러게, 철노란 저 하인 놈도 뭘 잘못 안 게지.”

    “듣고 보니 그러네. 좀 맛이 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지금 막내 공자가 피를 보고도 기절하지 않은 거야?”

    “그러게 무슨 일이지?”

    웅성거리는 무사들의 뒤에 그림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림자는 붉은 노을 때문인지 더욱 길고 더욱 기괴하게 보였다.

    무사 중 하나가 기척을 느끼고 뒤돌아섰다.

    그곳에는 지금 일어난 악필승이 노을만큼 붉어진 얼굴로 콧김을 뿜고 있었다.

    * * *

    처소로 돌아온 한빈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앞에 두고 철노와 마주 앉았다.

    “철노, 그렇게 보지 마.”

    “제가 마음이 안 놓여서 그럽니다. 오늘따라 왜 그렇게 대드셨습니까?”

    철노는 아직도 한빈이 이긴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한빈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잖아.”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 법입니다. 그때까지 힘을 기르시지요.”

    “그 속담은 철노가 잘못 안 거야.”

    “네?”

    “군자는 십 년 안에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게 정설이지.”

    “아, 공자님.”

    “농담이니 걱정하지 마!”

    한빈이 피식 웃었다.

    오늘의 비무의 전말은 간단했다.

    철노에게 시비를 건 삼 공자의 수하들을 한빈이 막아서자 삼 공자가 비무를 핑계로 연못에 내다 꽂은 것이었다.

    한빈은 철노를 다시 바라봤다.

    한빈의 어미가 외가에서 나오며 데려온 하인이라 알고 있다.

    운 좋게 한빈의 어미는 하북팽가 가주의 셋째 부인으로 들어왔지만, 그 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한빈의 어미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

    가주의 총애를 받던 한빈의 어미가 떠나자 둘째 부인의 아들들인 이 공자와 삼 공자가 한빈을 가문에서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현재 상황이었다.

    기억을 떠올리던 한빈을 본 철노가 물었다.

    “혹시 돌아가신 마님이 그리우십니까?”

    “잊은 지 오래야. 이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걸······.”

    한빈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전생을 거쳐 온 지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저 깊숙이 묻혔으니까.

    문제는 앞으로의 일들이었다.

    “그럼 다행입니다.”

    “철노!”

    “왜 그러십니까? 공자님.”

    “이제는 내가 지켜 줄게.”

    이것도 진심이었다.

    수하들에게 미안한 것은 전생으로 족했다.

    “······.”

    철노가 거친 피부에서 광이 날 정도로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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