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92)화 (93/93)

외전. “붉은 매화나무의 전설.” 七

갓 돌을 넘었다며 아장아장 걷던 것이 어제 같은데 어느새 다미는 두 살이 되어 제법 뛰어다니며 넘치는 호기심으로 사고를 치고 다녔다.

오늘은 정월 대보름으로 야시장이 크게 서는 날이었다. 세 가족은 연두색으로 옷을 맞춰 입고 나들이에 나섰다. 

“아버지!”

“오냐! 우리 다미가 떡이 먹고 싶구나.”

“콩고물 묻은 거요.”

“인절미가 먹고 싶구나.”

한창 야시장을 누비고 다니다가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떡을 치는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다미는 손뼉을 치며 떡을 사 달라고 졸랐다.

“얌전히 서서 기다리도록 해라.”

“다미가 부인을 닮아 떡을 좋아하는 것 같소.”

“그러게 말입니다. 무슨 어린아이가 저리 떡을 좋아하는지.”

“그럼 필시 우리 다미도 예쁘게 자랄 것이오.”

그 말의 뜻을 알고, 도아가 얼굴을 붉히며 그저 웃어 주었다. 다미는 얌전히 서서 떡을 치는 것을 구경하다가 강에게 안아 달라 졸라 품에 안겼다.

떡을 치는 이는 부부로 보였다. 고생을 많이 했는지 성한 곳이 없어 보였지만 떡을 치며 호흡을 맞추느라 눈을 마주 볼 때 서로를 사랑하는 게 보였다. 

사내가 떡을 메치고, 여인이 떡을 뒤집었다. 그 여인은 엉겁의 세월을 돌아 다시 태어난 청아였다. 비록 몸은 고되었으나 웃는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자! 떡 여기 있다.”

“고맙습니다!”

콩고물을 잔뜩 묻힌 따끈한 떡을 종이에 감싼 청아가 그것을 다미에게 넘겨주었다. 부부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임자도 비단옷에 꾸미면 저보단 고울 텐데.”

“팔자에도 없는 사치 부렸다간 가랑이 찢어지는 법입니다.”

“하긴 그랬다간 눈 빠지게 우리만 기다리는 자식새끼들 다 굶어 죽이지.”

“알면 다행이네. 어서 떡이나 치세요.”

그리 말하며 청아는 사내의 이마에 묻은 땀을 살뜰하게 닦아 주었다. 몸은 고되었지만 이 삶에서 행복과 평안을 누리고 있었다.

모녀 사이에서 몰래 빠져나온 강은 도아에게 줄 선물을 고르려 장신구를 파는 상단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모두 너무 예뻐서 무얼 골라야 할지 망설여졌다. 도아는 뭘 해도 예쁠 것 같아서 딱 하나를 고르자니 손이 간질거렸다.

“오늘 야시장에 나오길 잘했구나.”

“누가 아니래? 한양 제일가는 미남이 어째서 우리 기방에 한 번을 안 오셨을까?”

“나리, 여기 골목만 돌아가면 이 매향이가 있는 기방입니다. 오늘 오시면 섭섭하지 않게 대접해 드릴 테니 함께 가시지요.”

“내게 하는 말들이었소?”

“아이참! 이 나리 순진한 것 좀 봐.”

장신구를 고르기에 여념 없던 강은 어느새 기생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생전 여인이라고는 도아 말고는 모르던 그에게 난처한 상황이었다. 

“이 나리는 오늘 내가 도장 찍었으니 넘볼 생각 마라.”

“흥! 나리께서 언제 너를 택한다든?”

“이보시오. 나는 이미 혼인을 한 몸이요.”

“푸훕. 나리! 저희 기방에 드나드는 사내들 모두 혼인하여 조강지처를 둔 사내들입니다.”

“미안하지만 부인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럼 언제 기방에 들러 매향이를 찾아 주실지 날을 받아 놓고 가십시오.”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려 했으나 고단수의 기생들은 그런 강을 비웃으며 더욱 치댔다. 강이 벌게진 얼굴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지금 뭐 하십니까?”

“부…… 부인…….”

“부인?”

선자는 도아였고, 후자는 강이었다. 그리고 부인이란 말에 반응을 보인 이들은 곁을 에워싸고 있던 기생들이었다.

매서운 눈초리로 강을 쏘아보고 있던 도아를 보던 기생들은 턱이 나가도록 입을 벌리고 넋을 놓았다.

“집에 경국지색이 있으니 기방에 올 턱이 있나.”

“텄다. 그만 가자.”

어디에 견주어도 지지 않는 도아의 미모 앞에 기생들은 바람 빠진 한숨을 쉬며 일제히 물러났다.

“부인이 무슨 상상을 할지 모르는 바 아니나 모두 오해요.”

“기생들 속에 파묻혀 얼굴을 붉히고 계시던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거절을 해도 저들이 물러나지 않아 난처해하고 있던 것이었소.”

“그런 상황이 난처하여 머뭇거린다면 다음은 기방에 들어가 앉아 계시겠습니다.”

“부, 부인……. 어찌 그런 말을…….”

강에게 달려가는 다미를 놓아주고 도아는 홱 하니 돌아서서 가 버렸다. 강이 연신 이름을 부르며 뒤따랐으나 도아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유모에게 다미를 맡기고, 황급히 도아를 따라서 방으로 들어온 강은 여러 변명을 늘어놓았으나 도아는 모두지 화를 풀지 않았다.

“앞으로는 절대! 난처하다는 비겁한 변명으로 한눈을 팔지 않겠소.”

이럴 때는 자신의 행동을 이실직고하고, 제대로 맞서는 것이 나았다. 

“내게는 부인이 전부라는 것을 알지 않소?”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그땐?”

“각방입니다.”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각방이라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에 강은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오.”

“그 말을 믿어 보겠습니다.”

“믿어도 좋소. 부인과 각방이라니, 끔찍하구려.”

“필요하다면 해야죠.”

각방이라는 말을 던져 놓고 도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굴었다. 그러자 강이 입을 쩌억 벌리고 호들갑을 떨었다.

“부부는! 아무리 싸우고, 서로 미워져도 한 이불을 덮고 자야 하는 것이오.”

“그런 시대는 이미 저 멀리 간 지 오래입니다.”

“요즘 다른 부인들과 어울리더니 변한 것 같소.”

“어찌 소첩에게 화두를 돌리십니까?”

두 사람에게는 다툼이었으나 누가 들어도 간지러운 사랑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의미로 오늘은 이불을 따로 펴고 자야겠습니다.”

“뭐요?”

“각방은 아니더라도 잘못을 저질렀으니 응당 벌을 받아야지요.”

“마, 말도 안 돼!”

펄쩍 뛰는 강을 속이려 조용히 웃고 있던 도아를 발견한 강은 이 모든 것이 장난이었음을 깨달았다.

“부인은 오늘 혼이 나야겠소.”

“어째서요?”

“이 예쁜 입에 무서운 말을 올렸으니 혼나야지.”

“아이, 옷고름은 그대로 두고 말하세요.”

“지금은 옷고름이 먼저요.”

웃음이 터져 버린 도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웃는 사이 옷고름이 풀리고, 치마 속으로 강이 들어와 있었다.

깨 볶는 고소한 냄새와 정다운 웃음소리가 방문을 넘어갔다. 

* * *

몇 해가 넘어가고, 새해를 앞두고 세 가족은 새해 첫날을 바다에 있는 초가에서 보내겠다며 한 짐을 챙겨서 넘어왔다. 

차려입고 있던 옷가지를 던져 놓고, 어디든 가기에 편안한 차림으로 고쳐 입었다. 다미도 화려한 색동저고리 대신 고운 천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다미는 네 살이 되어 이제는 말도 잘하고, 서책을 가까이하여 도아의 어릴 적 모습을 꼭 빼닮아 놓았다. 

이곳 초가에 오면 밥을 짓고, 청소하고 빨래를 하는 것은 모두 강의 몫이었다. 그가 자처해서 정해 놓은 규칙이었다.

“아버지, 이 아기 나무 갖고 싶어요.”

“응? 어디 보자. 나무가 다미만큼 어리구나.”

장터에 나왔다가 다미의 눈길을 사로잡은 작은 나무 앞에 가족이 앉았다. 

“이 나무가 무슨 종인지 아십니까?”

“허허허, 종을 알면 비싸게 팔 텐데 모른답니다.”

“아, 예. 그렇군요. 다미야, 나무가 커서 무엇이 될지 모르는데 괜찮을까?”

“그래야 키우는 맛이 있죠.”

“뭐야?”

다미의 당찬 대답에 듣고 있던 모든 어른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하여 이름 모를 작은 나무는 다미의 차지가 되었다.

잘 가져온 어린나무는 매화나무와 간격을 두고, 옆에 심기로 했다. 다미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열심히 흙을 파서 나무를 심고 흙을 덮어 토닥여 주었다.

“나무가 목이 마르겠다. 이 물도 주렴.”

“네, 어머니.”

아이는 손에 묻은 흙을 털어 내고 나무에 물을 듬뿍 주었다. 다미가 나무 앞에 쪼그리고 앉자 부모도 그 곁에 함께 앉았다.

“매화나무가 우리 가족에게 그늘을 만들어 준 것처럼 이 어린나무도 언젠가 자라서 다미가 꾸린 가족들에게 그늘이 되어 줄 것이다.”

“제게 또 가족이 생겨요?”

“그럼! 언젠가 우리 다미가 커서 시집을 가고, 아이를 낳으면 모두 새로운 가족이지.”

“어? 저는 아버지에게 시집갈 거예요!”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유난히 강을 따랐던 다미는 천진한 생각으로 늘 강에게 시집을 가겠다며 재롱을 부렸다. 

“어디, 조금 더 자라서도 그리 말하는지 두고 보마.”

“정말이에요!”

“오냐, 우리 공주님 말이 곧 법이지. 찬 바람이 제법 강하게 부니 그만 들어가자.”

“다미 다리 아파요, 아버지.”

“그래? 그렇담 공주님 다리를 아프게 할 수 없지. 이리 온.”

강이 긴 팔을 뻗자 다미는 기다렸다는 듯 그 품으로 뛰어들었다. 간지러운 웃음소리에 도아도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강의 품에 안긴 다미는 오늘 하루가 고됐는지 하품을 연이어 하더니 졸린 눈이 되었다.

“다미를 눕혀 놓고 오겠소.”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도아는 주변 정리를 마치고, 마루에 앉았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바다 위로 노을이 불그스름하게 내려앉았다.

조용히 밖으로 나온 강은 솜으로 만든 장옷을 도아의 어깨에 얹어 주었다. 그리고 곁에 앉으며 손을 잡아 입김을 내어 녹여 주었다.

“춥진 않소?”

“예, 딱 좋습니다.”

“이제 홑몸이 아니니 노을이 지는 것만 보고 들어갑시다.”

조금 늦은 감이 있었지만 도아는 다미의 동생을 몸에 품고 있었다. 닮아 가는 두 사람 얼굴에도 노을이 물들었다.

“참 이상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저 노을만 보고 있으면 마음이 울적하여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공허하고, 이유 없이 눈물이 나오곤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소?”

“아니요, 더 이상한 것은 서방님을 만난 후로는 노을을 봐도 더 이상 슬프지 않습니다.”

“그 말이 왠지 날 기다렸다는 말 같아서 듣기 좋소.”

“그러게요. 정말…….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따듯하고 포근하게 감싸는 붉은 노을이 오늘따라 유난히 보기 좋았다. 도아는 바다에 부서져 뿌려지는 붉은 노을을 눈에 담았다.

“그대가 다미가 생기던 날 그런 말을 했소.”

“무엇이요?”

“저 매화나무가 영험한 것 같아 아이를 갖게 해 달라 빌었다고 했소.”

“아……. 네,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요?”

“그 후로 나도 이곳에 올 때마다 나무에 소원을 빌고 있소.”

“혹시 아들을 갖게 해 달라고 비셨어요?”

“설마 그랬으려고. 말하지 않았소? 나는 이미 그대를 얻어 모든 것이 완벽해진 사람이라고 말이오.”

알면서도 이 말을 또 듣고 싶어서 괜히 해 본 말이었다. 도아는 미소로 화답하며 소원이 듣고 싶은 듯 눈을 반짝거렸다. 

“다음 생이 있다면 무엇으로 태어나도 좋으니 그저 그대 곁에만 머물게 해 달라고 빌고 있소.”

“…….”

“내 남은 평생을 써서라도 그 소원을 들어 달라 억지를 부릴 작정이오.”

머쓱한 듯 수줍음이 밀려온 강이 그리 말하며 조용히 웃었다. 

“이상하죠.”

“뭐가 말이오?”

“분명 처음 듣는 말인데 꼭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이전 생에 그대를 만나, 내가 했던 말일 수도 있소.”

“정말……. 그런 것만 같아요.”

“그렇다면 다음 생에서도 내게 와 주시오.”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을 따라 절정에 다다른 노을이 매화처럼 붉은 빛을 뿜었다. 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글썽였다.

격하게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 몰아치는 파도 소리가 묻어나 있었다. 강은 바람을 막아 주려 도아를 꼭 안아 주었다. 

오랜 생을 이어 온 매화꽃 눈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매화나무는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언젠가 다시 똑같은 모습으로 두 사람을 품어 줄 것이다. 

외전 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