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91)화 (92/93)

외전. “붉은 매화나무의 전설.” 六

온 가족이 누각에 올라 향긋한 차와 달콤한 과자를 곁들여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바람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있는 도아의 배는 막달이 되어 산처럼 불뚝 불러 있었다. 양 볼에 제법 살이 올라 통통한 얼굴이 보기 좋았다.

아이가 태어나면 친정에서 1년을 더 보낼 수 있으니 모두가 다행이라 여겼다. 특히 첫 아이를 친정 엄마의 손을 빌릴 수 있게 되어 도아의 마음이 놓였다.

“아이 이름은 시댁에서 지어 주었느냐?”

“아닙니다. 저와 이 사람이 지어 놓은 게 있습니다, 장인어른.”

“오, 그래? 어디 말해 보게.”

“여자아이면 다미라고 짓기로 했습니다.”

“다미? 다미라…….”

한창 아이 이름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찻잔을 들고 있던 도아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손에 쥐고 있던 잔을 떨어뜨렸다.

웃음으로 가득하던 장내가 순식간에 얼음판이 되었다. 놀란 강이 몸을 틀어 도아가 다친 곳은 없는지 살폈다.

이에 아이를 낳아 본 경험이 있는 어머니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도아에게 다가왔다.

“진통이 오는 것 같으냐?”

“어머니…….”

“괜찮다. 초산은 예정일보다 빠를 수 있으니 놀라지 않아도 된다.”

진통이 몰려오자 도아가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머니는 손을 잡아 주며 안심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출산 준비를 끝내 놓았기에 누구도 허둥지둥하지 않고, 미리 맡기로 했던 소임을 다했다.

“아이가 성질이 급한 모양이구나.”

“후…….”

“이가 상하지 않도록 이것을 물도록 해라.”

“어디 가지 말고 제 곁에 계셔야 해요, 어머니.”

“이 어미가, 널 두고 어딜 가겠느냐?”

그리 말하고 도아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자 어머니는 손을 꼭 잡아 주며 힘을 밀어 주었다.

한 시진이 넘을 무렵, 이불 아래를 살피던 산파가 화색이 도는 얼굴로 반가운 말을 외쳤다.

“아이 머리가 보입니다!”

“벌써 말인가?”

“예! 아주 순산을 하실 모양입니다. 조금만 더 힘주십쇼.”

“아가, 도아야. 들었느냐? 힘들어도 조금 더 힘을 내거라.”

한 시진을 진통이 몰아친 덕분에 도아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초산인 점을 생각하면 순산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몰아치자 아이가 미끄러지듯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아이는 우렁차게 울며 존재감을 보였다.

“도아야, 정신이 드느냐?”

“네, 아이는요?”

“널 닮아 아주 예쁘구나.”

잠시 정신을 잃었던 도아는 깨어나 아이를 찾았고, 곧바로 품에 안아 볼 수 있었다. 너무 작아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만큼 왜소했다.

“밖에서 네 소식에 남자들 속이 타들어 가겠구나. 잠시 나가 보마.”

“어머니.”

“말 안 해도 다 안다. 괜찮아. 고생했다, 우리 딸.”

그 고마움과 사랑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리 말하며 도아에게 이불을 잘 덮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자 두 손을 꼭 쥔 채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어머니는 이마에 땀을 닦으며 다가갔다.

“장모님! 부인은 괜찮습니까?”

“진통이 길지 않아서 회복도 빠를 것이네. 들어가 보게.”

“예, 고생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장모님.”

대부분은 아이를 낳으면 성별을 먼저 묻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강은 누구보다 산모인 도아를 챙기기에 급급했다.

심호흡을 하며 곧장 안으로 들어온 강은 아이와 함께 누워 있는 도아에게 다가갔다. 믿기지 않는 신비로운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 

“어서 오세요, 서방님.”

“…….”

“우리 다미입니다.”

곁으로 다가온 강은 묵묵히 바라보며 듣고만 있다가 이내 눈물을 흘렸다. 경이로운 광경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다미야, 아버지가 울보라서 큰일이구나.”

“부인…….”

“저는 괜찮습니다. 몸은 고단하지만 생각보다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얼굴이 반쪽이 다 되었소.”

그는 제 자식보다 진통을 겪느라 반쪽이 된 도아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이제 우리 다미도 안아 보셔야죠.”

“아…….”

“너무 예뻐서 말이 나오질 않습니다.”

“신기하게 부인을 꼭 닮았소.”

“그렇죠?”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첫눈에 도아와 판박이인 다미였다. 입을 달싹이던 다미는 강이 품에 안아 주자 기다렸다는 듯 웃음소리를 냈다.

“꿈에서 보았던 흰 사슴이 이 아이였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아이의 태몽은 눈밭에서 뛰어놀던 작은 흰 사슴이었다. 곧 이 아이가, 전생에 도아의 동무이자 친자매처럼 지내던 ‘무이’이기도 했다.

모두의 관심 속에 태어난 다미는 그야말로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부모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모든 순간에 친정 식구들이 함께했다. 다미는 잔병치레 하나 없이 돌을 맞이했으며 돌잡이를 할 때는 붓을 집어 들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어느덧 시댁에 약속했던 3년 살이가 끝이 나게 됐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두 사람에서 식구가 늘어 세 사람이 시댁에 입성하게 되었다. 

아장아장 잘 걷는 다미를 바라보는 시부모는 입이 귀에 걸려 박수를 쳐 주었다. 아이가 눈에 아른거려 1년이 10년과도 같았을 것이다.

아직은 도아에게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앞으로 이곳이 평생 동안 살아야 할 곳이었다. 무엇보다 시부모는 인자한 모습으로 도아를 받아 주었다.

고부지간에 나눌 얘기가 있다며 나란히 안채로 들어온 두 사람은 3년 만에 오붓한 모습으로 마주했다. 

“새아가.”

“예, 어머님.”

“내가 시부모님 모시고 살면서 시집살이 아닌 시집살이를 하며 제일 서럽고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느냐?”

“…….”

“바로 친정과 연을 끊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인은 시집을 가면 출가외인이라 했다. 시집간 딸은 가족이 아니라 남남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친정이 멀기도 멀었지만 시어른들이 생전 소식 한 줄 주고받지 못하게 하셔서 시집온 후로 생판 남처럼 지내게 되었지. 그게 아직도 그렇게 서운하더구나. 그래서 내가 네 서방을 낳으며 다짐을 했다.”

“다짐이요?”

“그래, 내가 며느리를 들이면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그렇게 내 자신에게 약속을 했느니라.”

강의 어머니는 한눈에 봐도 포근할 것만 같은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도아는 그 말에 다신 못 볼 것 같던 친정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친정에 일이 생기면 가 보고 또 친정 식구들이 그리우면 가서 보도록 해라. 말 그대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친정이 있는데 그리움에 가슴앓이가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 내 눈치 볼 것 없이 그리해도 된다.”

“…….”

“그래, 며느리 된 입장에서 선뜻 그러겠다고 말하기 어렵겠지. 허나 네 서방이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줄 테니, 대신 말을 전하게 해도 좋으니 담장에 갇혀 살 필요 없다. 알겠느냐?”

“예, 저도 시부모님이라 여기지 않고 제 부모님이라 생각하며 섬기겠습니다.”

며느리 입장에서 들어도 꽤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강의 부모님은 3년 동안 처가살이를 흔쾌히 허락한 만큼 시대를 앞서간 분들이었다. 

* * *

세 식구가 지내게 될 별채는 시댁 사저와 분리가 되어 있다고 말해도 될 만큼 없는 것 없이 선이 그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시부모와 함께 사는 것이 도아에게 부담이 될 것이라 여기고, 최대한의 배려를 해 준 것 같았다. 

별채 마당에는 온갖 꽃들이 가득 심어져 있었고, 넓은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도 심어져 있어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 주었다. 

아무리 시어머니가 잘해 준들 친정에서 지내던 것처럼 편안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저녁상을 치우고 별채로 돌아온 도아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많이 고단하여 큰일이오.”

“사실 이 정도도 하지 않으면 며느리로선 최악이 될 겁니다.”

“내일은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고 처가에 다녀옵시다.”

“친정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걷어 올리고 있던 소매를 내리려다 말고 놀라 묻자 강은 손사래를 쳤다.

“그게 아니오. 그저 이대로 있다간 부인 몸이 상할 것 같소.”

“아닙니다, 시댁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친정 나들이를 간답니까.”

“안 그래도 어머니께서 날을 잡아 다녀오라고 하셨소. 내일 가서 쉬다가 옵시다.”

“그래도…….”

“그럼 내일은 아침에 갔다가 해 질 즘 돌아옵시다. 그럼 되겠소?”

자고 오는 것이 아니어도 친정 나들이가 눈치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도아는 얼버무리다가 문득 다미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았다.

“그나저나 다미는요?”

“부인이 고단할 것 같아서 오늘은 유모에게 데리고 자라 했소.”

“고단할 것이 있나요. 새벽에 아이가 칭얼대면 모두 서방님이 봐 주는데.”

“오늘은 다미 말고, 부인을 봐 주려고 그랬소.”

“아이, 됐습니다.”

“우선 목욕물을 받아 놨으니 건너갑시다.”

다미를 데려오라고 하려 했는데 다짜고짜 함께 목욕을 하자는 말에 도아의 얼굴이 붉게 물들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늘은 고단하여 손 하나 까딱하기 싫지 않소.”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제법 단호하게 말했으나 이미 옷고름은 반쯤 풀린 상태였다. 언제나 이런 식으로 유혹을 할 때면 도아는 강을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꽤 여우 같은 면모가 있어서 촉촉한 눈빛과 야한 말을 할 땐 꼭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오늘은 목욕 시중부터 옷을 입고 자리에 눕는 일까지 모두 내게 맡기시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창피함에 얼굴도 들지 못할 것입니다.”

“노을이 지면 이곳 별채는 얼씬도 말라 명하지 않았소?”

“그, 그렇기는 하지만…….”

가뿐히 저고리가 벗겨져 나가고 치마는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다. 강은 나긋하게 웃으며 도아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그저 입을 맞추는 일이라 허락을 했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증기가 가득한 목욕통에 들어앉아 있었다.

살갗을 겨우 가리고 있던 얇은 소복 저고리가 벗겨지자 강은 그 위로 따듯한 물을 끼얹어 주었다. 부드러운 천이 살을 훑고 지나가자 절로 신음이 나올 것 같았다.

“부인이 물에 젖어 있으니 좀처럼 참기 힘든 것 같소.”

“그러니 나가 보셔요. 예?”

“그거 아시오?”

“무얼요.”

“부인은 지금 말과 몸이 다르다는 거.”

“…….”

“허나 걱정 마시오. 오늘은 철저하게 부인의 시중을 들기 위함이니.”

강은 말이 사실이라도 되듯 정성껏 도아의 몸을 씻겨 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기를 손수 말려 주었다. 

방으로 들어와서는 자리옷을 입혀 주고, 머리를 빗겨 주었다. 마치 어머니라도 되듯 그는 도아를 아낌없이 보살펴 주었다. 

“누우시오.”

“오늘은 호강을 하네요.”

“원한다면 매일 해 줄 수도 있소.”

“달콤한 제안이지만 사양하겠습니다.”

폭신한 이불에 누운 채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도아는 활짝 웃어 주었다. 강은 곁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며 도아의 눈을 어루만졌다. 

고단하긴 했던 모양이다. 강의 손길에 스르륵 잠이 든 도아는 이내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좋은 꿈 꾸시오, 부인.”

고개를 숙여 도아의 이마에 입을 맞춘 강은 유모에게 맡긴 다미를 보기 위해 조용히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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