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90)화 (91/93)

외전. “붉은 매화나무의 전설.” 五

오늘은 바다에 있는 초가에서 지내는 날이었다. 한겨울이라 아궁이에 장작을 가득 넣어서 방 안은 따듯한 기운이 가득했다.

두 사람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쪽 문을 연 채 펑펑 쏟아지는 눈을 구경하고 있었다. 눈발이 어찌나 거센지 두 사람이 있는 곳까지 날아오기도 했다.

도아는 손을 뻗어서 손바닥에 눈을 담았다. 사람의 체온에 닿은 눈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가서 솥을 보고 오겠소.”

“같이 가요.”

“추운데 나오지 말고 여기 가만히 있으시오.”

“그래도…….”

강은 함께 일어나려는 도아를 다시 자리에 앉히고 이불로 몸을 둘둘 말아 주었다.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는 도아가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강은 도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돌아섰다.

얼마 후 강은 작은 밥상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담아 들어왔다. 두 개의 대접에는 강이 직접 뜯어서 끓인 수제비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입에 맞소?”

“그럼요. 수제비는 서방님이 해 주는 것이 제일 맛있습니다.”

“언제든 말만 하면 바로 앞에 대령해 주겠소.”

“네, 서방님도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그저 도아가 먹는 모습만 바라보던 강은 뒤늦은 한술을 떴다. 도아는 얼른 젓가락을 들어서 김치를 얹어 주었다.

“부인도 한술 떠 보시오.”

이에 질세라 강은 얼른 김치를 받아먹고, 젓가락을 들었다. 도아가 웃으며 숟가락에 수제비를 담아 들자 김치가 얹어졌다.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며 하는 한가로운 저녁 식사였다. 한창 잘 먹던 도아가 무언가 이상한 듯 움찔거리며 수저질을 멈추었다.

“왜 그러시오?”

“아니……. 웁!”

“부인!”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진 도아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급하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아는 곧장 마당 구석에 앉아 속을 게워 냈다. 뒤따라온 강이 다가가려 했으나 도아는 한사코 거절하며 손을 저었다.

“괜찮소?”

“예, 급하게 먹어서 탈이 난 모양입니다.”

“우선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안색이 창백하시오.”

그런데 다시 속이 뒤집히고 말았다. 도아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앉아 몇 번이고 속을 게워 내야 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모양이오! 동네로 내려가서 의원을 모셔 와야겠소.”

“하…….”

“부인, 이러다 정말 사람 잡겠소.”

“송구합니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도아는 순식간에 화색에서 파리한 안색이 된 얼굴로 힘겹게 침을 삼켰다.

“내게 기대시오.”

다가온 강에게 속절없이 무너진 도아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쏟아지는 눈발이 야속하게 도아의 온몸을 뒤덮었다.

“부인! 정신 차려 보시오! 부인!”

이럴 줄 알았다면 초가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강은 혼절한 도아를 이불 위에 눕혀 놓고 어찌할 줄 몰라 초조해하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빨리 다녀올 것이오. 꼭 의원을 모셔 오겠소.”

이대로 도아를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못내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선 방도가 없었다. 

그 길로 뛰쳐나온 강은 눈이 가득 쌓여 발이 푹푹 빠지는 험한 길을 아랑곳하지 않고 뛰었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 피가 나올 것 같았지만 도아를 생각하면 일각도 허투루 허비할 수 없었다. 

눈길을 밟아 겨우 동네 어귀에 있는 의원 집에 당도했다. 눈발이 심해 못 간다는 의원에게 강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의원을 등에 업고서라도 가겠다고 하니 의원도 결국 지고 말았다. 

* * *

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초가에 당도한 강은 서둘러 의원을 안으로 모셨다. 다행히 도아는 아무 일 없어 보였다.

“흠…….”

“상태가 많이 좋지 않소?”

한참 동안 도아의 맥을 짚어 보던 의원은 가늘게 뜬 눈을 이내 바로 떴다. 강이 조마조마하여 옆에서 계속 채근을 하던 중이었다.

“내가 뭘 어찌하면 좋겠소?”

“다른 것은 되었고, 작은 옷 한 벌 마련하시면 되겠습니다.”

“작은 옷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산모가 입덧이 심한 듯하니 앞으로 고생길이 훤히 열렸습니다.”

믿기지 않는 눈으로 재차 묻자 의원은 호탕하게 웃으며 몇 번이나 확인을 시켜 주었다. 강은 입을 틀어막은 채 감동에 젖어 들었다.

의원이 가고 난 뒤 강은 꼼짝도 하지 않고 도아의 곁을 지켰다. 손을 잡고, 머리를 쓸어 주고 이부자리를 만져 주었다. 

“으흠…….”

“정신이 드시오?”

몇 시진이 지나자 도아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깨어났다. 강은 미리 준비해 둔 물을 수저로 떠서 몇 모금 넘겨 주었다.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맞소. 조금 전 의원이 다녀갔소.”

“제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갑자기 잘 먹던 음식을 모두 게워 내고, 정신을 잃었으니 걱정이 될 만도 했다. 

“그런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그럼 뭐라고 하던가요?”

“부인이 그토록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다고 하더군.”

“예?”

“어머니가 된 것을 축하하오.”

아직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도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나는 아버지가 되었으니 우리는 이제 부모가 된 것이오.”

“설마…….”

“의원의 말로는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을 것이라 했소.”

“말도 안 돼.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도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먹였다. 강은 어느새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따듯하게 안아 주었다. 

“것 봐. 때가 되면 이렇게 온다니까.”

놀리듯 달래는 말에 도아가 주먹을 말아 쥐고 강의 가슴을 때렸다. 그러자 강은 조금 더 세게 안아 주었다.

“이곳에 올 때마다 매화나무에 빌었습니다. 서방님을 꼭 닮은 아이를 갖고 싶다고, 오래된 나무이니 영험할 것 같아서 그렇게 빌었는데…….”

“부인이 나무를 지극정성으로 살피니 아무래도 소원을 들어준 모양이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품에서 나온 도아가 눈물을 닦자 강은 빨개진 눈과 코에 연거푸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다시 참았던 눈물이 주룩 흘렀다.

“그만 우시오. 이러다 눈이 아프겠소.”

어르고 달래고 겨우 그친 눈물이었다. 도아는 긴장이 풀린 듯 다시 강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속이 좋지 않소?”

“아니요, 그냥 이렇게 있고 싶어서요.”

“밤새 이렇게 있어도 되오.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강은 도아의 손을 끌어 와 잡아 주었다. 그때 덜 닫혔던 문이 소란을 일며 바람에 열리고 말았다. 강이 곧장 일어나 닫으려 하자 도아가 잡아 말렸다.

열린 문 사이로 매화나무가 눈에 뒤덮여 평소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아는 그 모습을 두 눈에 가득 담았다. 

* * *

회임은 집안의 경사였다. 사실을 알게 된 양가에서는 큰 잔치를 베풀어 배고프고 헐벗은 이에게 곡식과 옷감을 나누었다. 

그리고 강은 매일같이 장모 곁에 달라붙어서 아이에게 준다며 배냇저고리를 만들었다. 큰 손으로 세심한 바느질을 하려니 찔리는 일이 더 많았다.

몇 달을 배우더니 이젠 곧잘 바느질을 흉내 내게 되어 배냇저고리 만들기에 돌입했다. 어머니는 곁에서 아이가 쓸 이불과 베갯잇을 만들었다.

“이것들 드시고 하세요.”

“몸도 무거운데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이 정도는 괜찮아요.”

제법 배가 나온 도아가 소반에 주전부리를 담아 들고 오자 바느질에 여념 없던 강이 화들짝 놀라 마중을 나갔다. 

“아이고, 김 서방. 이 정도는 괜찮네.”

“영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보듯 부인을 살피니 나중에 어쩌려고?”

“계속 그리 살펴 주면 됩니다. 앉으시오, 부인.”

강은 소반을 내려놓고 도아의 손을 잡아서 자리에 앉는 것을 도와주었다. 장모가 보기에도 과하다 싶을 만큼 애정 공세가 넘쳐흘렀다.

“이걸 정말 서방님이 했다구요?”

“증인은 장모님이시오.”

“그래, 이제는 너보다 바느질 솜씨가 좋으니 큰일이구나.”

“세상에……. 이 큰 손으로 어찌 바느질을 하나 걱정을 했더니.”

“이제 너만 잘하면 되겠구나.”

“어머니!”

작은 외침에 강은 헤벌쭉 웃으며 다과를 집어서 장모에게 주고, 도아에게도 쥐여 주었다. 

“다리가 저리다거나, 배가 아프지는 않소?”

“예, 어제 잠들기 전에 서방님이 다리를 주물러 주어서 그런지. 오늘은 내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럼 오늘도 그리해야겠소. 먹고 싶은 것은 없소?”

“산모가 너무 잘 먹어도 아이가 커져서 해산할 때 힘듭니다, 김 서방.”

“먹고 싶은 걸 제때 못 먹으면 짝짝이 눈이 된다고 하신 건 장모님이십니다.”

“아……. 그랬던가.”

그건 이렇게 될 줄 모르고 했던 말이었다. 강은 아버지가 된 날부터 모든 일상을 도아에게 맞춰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 장모님 댁이니 부인을 위하는 일을 남들 눈치 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도아가 먹고 싶다는 것은 산속을 뒤져서라도 구해 오는 지경이었다.

또한 음식이 먹고 싶을 때는 장모에게 배워서라도 꼭 제 손을 거쳐서 해 주었다. 이에 곁에서 지켜보던 도진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어머니, 저도 장가가서 부인에게 잘해야겠지만 매형처럼은 못 하겠습니다.”

“이해한다. 네 아버지도 참 잘하셨는데 네 누이 매형에 비하면 반도 미치지 못하겠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잘 배워 뒀다가 장가가서 써먹도록 해라. 얼마나 보기 좋으냐.”

내 자식에게 잘하니 뭐든 안 예뻐 보일 수가 있을까. 부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도아에게 준다며 음식을 가져가는 강을 바라보았다.

* * *

강은 밤마다 도아의 다리를 주물러 주고, 항상 책 한 권을 읽어 주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 일은 태교를 위한 것이라 절대 거르는 법이 없었다. 

이제는 도아도 책 읽는 소리가 없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다. 덕분에 별당 처소는 서책으로 가득 들어가 벽을 이루었다.

“서방님.”

“으흠……. 왜, 어디 아프시오?”

새벽안개가 걷히지도 않은 한밤중에 도아가 강을 불러 깨웠다. 졸린 눈을 비비던 강은 이내 자리에 앉아 도아를 살폈다.

“그게 아니라, 음……. 저기.”

“편히 말하시오.”

“식혜가 먹고 싶어서 잠이 오질 않아요.”

“응? 식혜 말이오?”

“예, 자기 전에 마신 것이 입에 맴돌아 그런 것 같아요.”

이런 날도 있었다. 자다가 일어난 도아가 식혜가 먹고 싶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여 강을 깨우자 그는 짜증을 내는 대신 소리 내어 웃었다.

“부인은 참 아이 같소.”

강은 그 말을 남기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어둠 속의 수많은 장독에서 식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발을 들고 장독을 기웃거리던 강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사발을 깨뜨리고 말았다. 

소리에 놀란 행랑어멈이 먼저 일어나고, 그 소란에 덩달아 안채서 자고 있던 장인 장모도 깨우고 말았다. 

부부가 서둘러 등불에 비춰 보니 장독 앞에서 강이 국자를 든 채 민망해하며 서 있었다. 

“김 서방, 이 야심한 시간에 게서 뭐 하는가?”

“부인이 식혜가 먹고 싶다고 해서…….”

며느리가 먹고 싶다는데 내 아들이 저 짓을 한다면 복장이 터지는 일이겠지만 내 자식 일일 때는 시선이 달라지는 법이었다.

부부는 그 소리에 놀란 가슴을 뒤로하고 호탕하게 웃고 말았다. 이 일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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