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붉은 매화나무의 전설.” 四
친정에서 신혼을 만끽하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얼굴에 꽃이 핀 도아를 바라보던 강은 어느 날 함께 갈 곳이 있다며 말에 올랐다.
두 사람이 당도한 곳은 서로에게 익숙한 바다였다. 도아는 분홍치마를 바람에 흩날리며 편안한 모습으로 바닷물에 손을 담갔다.
“이 바다에서 절 보셨다고 한 거군요.”
“맞소. 부인을 처음 본 것이 이곳이었소.”
“이곳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자주 오던 바다였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였소.”
바닷물에 장난을 치던 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신기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다가온 강은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도아의 손에 있는 물기를 닦아 주었다.
“시부모님이 바다에 작은 거처를 마련해 주셨다더니 이곳에 있나 보네요.”
“맞소. 내가 하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다를 찾아다니니 부모님께서 염려하시어 아예 거처를 만들어 주셨소.”
“아……. 그래서 역마살이 꼈다는 소문이 돌았나 봅니다.”
“대체 누가 그런 망측한 소문을 냈는지. 걸리면 각오해야 할 것이오.”
차마 이런 사람에게 나은의 입을 통해서 들었다고 할 수가 없어 멋쩍은 웃음으로 대신해야 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손을 잡고 당도한 곳은 절벽 위에 지어진 초가였다. 도아는 울타리를 지나 작은 마당으로 들어선 뒤 홀린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무엇이 말이오?”
영혼을 빼앗긴 듯 주변을 둘러보던 도아는 이내 붉게 피어난 매화나무 앞으로 걸어가 멈춰 섰다. 마치 이 나무가 도아를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처음인데 낯설지가 않아요.”
“부인도 그러시오?”
“서방님도 그러셨나요?”
“부모님이 이곳에 초가를 지어 주실 때 이 나무를 처음 본 것이었소. 그런데 마치 아주 오랜 시간 함께한 것처럼 낯설면서도 익숙한 기분이 들었소.”
두 사람은 서로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홀린 듯 매화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매화가 꽃을 피울 때가 아니질 않습니까?”
“이곳에 초가를 지어 준 이 말로는 이 매화나무는 사시사철 꽃을 피운다고 했소.”
“그럴 수가 있는 건가요?”
“그러게 말이오. 그런데 이 나무에 오래된 사연이 있다고 들었소.”
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도아는 사연이라는 말에 강을 쳐다보았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사내가 오랫동안 아내를 그리워하면서 매화나무 곁을 지켰는데 그리워하던 그 마음이 담겨, 매화꽃이 지지 않는 것이라 했소.”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린나무를 심어 놓고, 다가오는 봄을 뒤로하고 떠나야 했던 여인의 이야기였다. 도아는 측은지심을 느끼며 바닥에 떨어진 매화꽃을 집어 들었다.
빨갛고 탐스러운 꽃망울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음에도 선명한 색을 잃지 않았다. 도아는 꽃을 바라보며 귀를 울리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살면서 잃은 기억이 없었으나 무슨 기억인가가 돌아올 것만 같았다.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을 두고 떠나야 했던 여인의 마음이 심금을 울렸다.
그를 등지고 서 있던 도아는 이내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서둘러 훔쳤다.
“부인도 이곳이 마음에 드는 것 같소.”
“…….”
“부인?”
“예…….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도아는 꽃을 품은 채 강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 작은 초가가 품고 있는 모든 것이 도아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었다.
문득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것에 공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자 도아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인연은 전생의 연이 돌고 돌아 이어진다는 말이 뇌리에 스쳤다.
* * *
서글서글한 강은 누구보다 처가에 좋은 아들이 되어 주었다. 몇 달은 사위라 여겨졌으나 그 후부터는 누가 봐도 이 댁 아들처럼 보였다.
장인과는 사냥을 나가기도 하고 장기를 두며 소소한 시간을 누렸고, 장모와는 그러지 말래도 집안일을 거두며 힘쓰는 일을 자처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찾고 찾던 책을 드디어 손에 넣은 강이 서둘러 도아에게 보여 주려 사저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대문을 나가고 있던 백발의 노인이 손에 들고 있던 옷가지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걸 보고, 강은 자리에 멈칫 멈춰 섰다.
“보시오.”
노인은 잘 듣지 못하고, 멈추지 않고 가려 했다. 이에 강은 옷가지를 집어 들고 노인의 앞으로 달려갔다.
“이거 떨어뜨렸소.”
“아이고, 큰일 날 뻔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옷가지를 받아 든 노인이 그것을 주섬주섬 챙기며 강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이 노인은 도아네 옷감을 받아다가 삯바느질을 해 주는 이였다.
“가 보시오.”
“예, 고맙습니다. 나리.”
짧은 인사를 끝으로 돌아가는 강의 모습을, 노인은 한참 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는 과거에 용서를 빌 기회를 놓치고 후회와 미련 속에 사는 대비 조 씨였다.
“이 댁이 사위를 잘 봤다더니 그 말이 맞나 보구나.”
스스로를 지옥에 넣어 불행을 자초한 이였다. 노인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강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은 채 돌아섰다.
* * *
모녀는 나란히 뜯어 놓은 이불에 목화솜을 넣어 꿰매고 있었다. 어느덧 시집을 간 지 1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바느질 솜씨가 제법 늘었구나.”
“그래도 아직 송충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데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괜찮다.”
“그런데 어머니.”
나지막이 어머니를 부르며 바늘을 손에서 내려놓은 도아의 얼굴에 근심이 서려 있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느냐?”
“그게…….”
“어미에게 못 할 말이 무엇이겠느냐. 편히 해라.”
“아직 소식이 없는 것이 영 걱정이에요.”
“아이 소식 말이냐?”
그 물음에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는 도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제 겨우 1년이 되었을 뿐이다.”
“그래도…….”
“김 서방이 아이가 생기지 않아 걱정이 된다고 했느냐?”
“그럴 리가요. 그냥 저 혼자 걱정돼서 드리는 말이에요.”
“행복해야 할 신혼에 어찌 걱정을 사서 하느냐? 조금도 걱정할 문제가 아니니라.”
혹시나 제 몸에 문제가 있어서 태기가 들어서지 않는 건 아닌지 도아는 요즘 그것이 걱정이라면 걱정이었다.
“너도 김 서방도 아직 한창이고, 무엇보다 부부 사이가 좋으니 조바심 내지 않고 기다린다면 곧 좋은 소식이 올 것이다.”
“그렇겠죠?”
“그래, 부부에게 아무 문제가 없어도 혼인하고 5년 있다가 첫애를 갖는 경우도 있으니 괜히 마음 졸이며 걱정하지 말거라.”
토닥이며 안심시켜 주는 말에 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겨우 웃어 보였다. 이에 어머니는 손을 들어서 여식의 뺨을 쓸어 주었다.
“네가 시집을 가긴 갔구나.”
“예?”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근심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니라.”
어머니는 수줍어하는 도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삐뚤어진 비녀를 바로잡아 주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 * *
노을을 등지고 별당으로 돌아온 도아를 본 강은 기다렸다는 듯 한달음에 그 앞으로 달려갔다. 그의 손에는 제법 큰 책자가 들려 있었다.
“부인에게 보여 줄 것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소.”
“무엇을요?”
“이리 와 앉아 보시오.”
두 사람은 노을의 붉은 빛이 쏟아지는 마루에 나란히 앉았다. 강은 들고 있던 책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펼쳐 보였다.
그러자 낡아서 채색이 바랬지만 그림의 선은 살아 있는 그림이 보였다. 도아는 손을 뻗어서 그림을 만져 보았다.
“그대가 바다를 좋아하니 이 책자도 좋아할 것 같았소.”
“이 그림 속 여인은 인어가 맞죠?”
“맞소. 지금은 전설로만 남은 인어를 다룬 책이오.”
“그림이 정말 훌륭하네요. 오래돼서 색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림 선이 너무 아름다워요.”
그림 속 여인은 지금은 멸종되어 사라진 인어였다. 바다를 누비는 모습의 그림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인어를 인간이 멸종시켰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그러게 말이오. 탐욕이란 것이 그래서 무서운 것 같소.”
“그런데 이 인어는, 마치 살아 있을 것 같네요.”
도아는 앉은자리에서 책자를 모두 보았다. 마지막 장은 인어가 비로소 두 다리를 얻게 되어 육지에 올라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자리옷 차림으로 앉아서 서책을 읽으며 도아를 기다리고 있던 강은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목욕을 마치고 머리를 길게 한쪽으로 내린 채 물기를 머금은 도아가 소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머리는 내가 빗겨 주겠소.”
“매일 번거롭지도 않으세요?”
“이런 일이 번거로울 리가 있소?”
도아가 자리에 앉자 뒤로 간 강은 머리에 묻은 물기를 잘 말려 주고, 꽤 능숙하게 긴 머리카락을 빗질해 주었다.
“나중에 부인의 머리카락에 흰머리가 나더라도, 빗질은 내가 해 줄 것이오.”
“치……. 그때 되면 젊고 고운 여인에게 눈길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대보다 고운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그런 말을 참 천연덕스럽게 잘도 하십니다.”
“물론이오.”
머리 손질을 마친 강이 재잘거리며 웃음소리를 내는 도아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은은한 향기와 따듯한 체온, 아직 사라지지 않은 물 냄새가 났다.
강의 입술이 애타게 도아를 그리며 목에 잘근잘근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움에 도아가 몸을 움츠렸으나 그는 도무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간지러워요.”
“참아 보시오.”
“간지러운 걸 어찌…….”
어느새 그의 손이 살결을 은은히 비추는 저고리 손으로 들어왔다. 더듬거리는 손길이 어느새 부푼 가슴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도아가 고개를 돌리자 강은 놓치지 않고 입을 맞추었다. 자연스레 몸을 가까이 맞댄 강은 한참 동안 입술을 탐하다가 여린 몸을 들어서 이불에 내려놓았다.
“서방님은 아이를 갖고 싶으세요?”
“으응?”
“아이 말이에요.”
그의 아래에 누워서 몸과 마음을 내어 주던 도아가 나지막이 묻자 강은 아래로 내려가던 얼굴을 올려서 눈을 맞췄다.
“내게는 지금 그대가 전부라 아이는 생각해 보지 않았소.”
“…….”
“평생 그대와 단둘뿐이래도 아무 상관 없소.”
“정말 그리 생각하세요?”
“그대의 눈을 보며 어찌 거짓을 말할 수 있겠소.”
그는 도아의 마음을 놓이게 하려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평생 도아와 단둘이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문드문 드는 찰나였다.
“아이 때문에 걱정할 것 없소. 우리는 서로를 보며 사는 것이지 자식을 낳기 위해 부부가 된 것이 아니니 말이오.”
“그야 그렇지만…….”
“아무 걱정 할 것 없소.”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어요.”
“그럼 그 말씀을 따라야지.”
그래도 지아비의 속마음도 확인해 보고 싶어서 괜히 꺼낸 말이었다. 도아가 고개를 끄덕거려 주자 강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마저 해도 되겠소?”
“아아……. 네.”
그는 기다랗고 큰 손을 도아의 목덜미에 넣고, 얼굴을 제게 끌어당겨 입술을 머금었다. 달달한 향기가 퍼지는 입술은 마치 사탕과도 같았다.
도아의 입술은 달고 맛있어서 몇 시진이고 입술에 머금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아는 타오르는 몸을 이기지 못하고 두 팔을 그의 목에 휘감았다.
숨을 헐떡이며 몇 번이고 그에게 멈춰 달라 간곡히 청했으나 이미 고지를 향해 달려가는 강에게 멈추는 일은 불가능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긴 밤을 새까맣게 태웠다. 새벽 동이 트자 땀에 젖은 몸으로 서로에게 뒤엉켜 혼절하듯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