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붉은 매화나무의 전설.” 一
명성이 드높은 가문에 귀한 아들이 태어났다. 어질고 자비롭기로 소문이 자자한 부부에게서 태어난 사내아이는 부족함 없이 사랑받으며 자랐다.
모친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손수 아들을 키웠으며, 부친도 마다하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자식을 돌봐 주었다.
어느덧 걸음마 시기를 지나 말을 하고,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바다로 갔다.
바다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찌르고,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너머로 반짝이는 보석 같은 햇살을 바라보던 아이의 가슴은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강아, 네게 이 바다를 꼭 보여 주고 싶었다.”
“네 아버지가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리셨단다. 네 태명이 바다였다는 것을 기억할까?”
부부는 손을 꼭 잡은 채 무릎을 굽히고, 바다를 두 눈에 담은 강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생은 돌고 돈다는 말이 있다. 다시 태어나 곁에 머무는 인연이, 전생에 함께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연모하는 여인을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생을 마감했던 강은 다정다감한 부모를 만나 행복한 생을 꾸리고 있었다.
부모의 얼굴은, 전생의 도화군과 군부인을 꼭 빼닮아 있었다. 그들은 본인 자신보다 강을 더 사랑하고 아껴 주었다.
“제 태명이 바다였어요?”
“그래. 네 아버지가 바다처럼 크고 넓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리 지었단다.”
“바다 같은 사람……. 될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말렴. 너는 지금 자체로도 이미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으니까.”
푸르른 바다를 바라보던 강은 이끌리듯 모친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애정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봐 주는 모친을, 참 좋아했다.
부모는 자식에게 아무 조건 없이, 놀라운 사랑을 주고 끝없는 희생을 한다. 그 사랑을 무럭무럭 먹고 자란 자식은 또 다른 사람을 그렇게 사랑해 줄 것이다.
어린 강은 모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봤다.
왜일까? 무언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을 잊고 지내는 기분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바다는 강에게 커다란 무언가를 안겨 주었다.
그 후부터 강은 바다 주변을 맴돌며 살다시피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때를 가리지 않고, 시간이 날 때마다 바다를 찾았다.
강이 열 살이 되던 해였다. 부인은 바다를 맹목적으로 찾아가는 강을 보며 어느 날은 깊은 시름에 잠겼다.
“마치 바다에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이 바다만 찾으니 걱정입니다.”
“걱정 마시오. 강이가 바다에서 평화를 얻고, 위안을 얻는 것이니 괜찮소.”
“비가 오는 날에도 바다가 보고 싶다면 꼭 가고야 마니 몸이 상할까 걱정되어 그럽니다.”
“음……. 그럼 이러는 게 어떻겠소?”
그리하여 강의 부친이 내놓은 방안은 오히려 부인을 놀라게 만들었다. 바닷가 근처에 초가로 된 집을 지어 주자는 것이었다.
부인의 우려와 달리 이 소식을 전해 받은 강은 크게 기뻐하며 부모를 끌어안았다.
“정말 바다가 보이는 곳에 집을 지어 주실 거죠?”
“긍정적으로 고민을 하려 했는데 네가 이리 기뻐하니 꼭 지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안 그렇소, 부인?”
“어머니!”
“내 자식이 저리 좋다는데 어찌 막겠습니까? 오냐, 그것이 네 소원이라면 그리해 주마.”
그리하여 그해에 강이 홀린 듯 찾아가는 바다 근처에 초가를 지어 주었다. 마침 마당에 몇백 년은 족히 된 듯한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어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이렇게 크고, 꽃이 진한 매화나무는 처음 봅니다.”
“이 아비도 태어나 처음 본다. 이 나무는 족히 몇백 년은 더 됐겠구나.”
“몇백 년이요?”
“그래, 매화나무가 이렇게 오래 살 수 있다니 놀랍구나.”
마치 바다를 보듯 풍성하게 피어난 매화는 거센 바람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듯 굳건한 자태를 비추고 있었다.
부모가 지어 준 초가에서 머물던 어느 날이었다. 높은 곳에 지어진 초가에서 저만치 모래사장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사람이 보였다.
하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과 자신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모래사장을 거닐고 있었다.
강은 무언가에 취한 듯 두 사람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커다란 바위에 몸을 숨기고, 다시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가까워진 거리에서 여자아이의 얼굴이 제법 자세히 보였다. 흩날리는 댕기를 따라 시선을 올렸다.
‘와…….’
푸른 바다를 한입에 삼킨 듯 소녀는 그 자체로 바다와 같았다. 탄성도 삼켜질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은 강의 시간을 삼켰다.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파도를 보란 듯 뒤로하고 유유하게 걷는 여자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은 마치 영혼을 빼앗긴 듯 한참 동안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 * *
손이 귀한 집에 여자아이가 태어나던 해 풍작이 들고, 온 세상에 꽃이 만발하여 꽃향기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작고 말간 얼굴로 태어난 아이는 유달리 하얘서 눈밭에 숨으면 찾지도 못하겠다는 말도 나왔었다.
게다가 총명하기는 말하기 입이 아플 정도였다. 한글을 일찍 깨우쳐 모두 총명함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는 했다.
“저 아이는, 필시 귀한 사람이 될 걸세.”
“아직 아이일세.”
“그러나 저 아이 얼굴을 보게. 어느 한 사람 그냥 지나친 이가 있었는가? 모르긴 몰라도 아이가 열 살이 넘으면 자네 고생을 좀 하겠네.”
“고생이라니?”
“담벼락에 철없는 도령들이 줄을 설 것이란 말일세!”
지기는 그리 말하고 호탕하게 웃었으나 듣고 있던 아이의 아버지 얼굴에는 근심이 서렸다. 지기의 말에 틀린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외모는 둘째 치고, 총명하기는 또 오죽한가? 나중에 간택령이 떨어지거든 거두절미하고 처녀 단자를 올리도록 하게.”
“나는 부귀영화니 권세니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네.”
“모르는 소리.”
편안한 소리를 늘어놓자 듣던 지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으나 아버지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랑채 문을 열어 놓은 틈으로 강아지와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흙먼지를 묻히고, 뭐가 좋은지 소리까지 내며 웃고 있었다.
“우리 도아의 행복만을 바랄 뿐일세.”
“허기는 여인으로 태어나 곧은 성정의 사내를 만나 평안하게 사랑받으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
“바로 보았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그것일세.”
“자네가 딸 바보인 것은 내 진작 알았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평범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도아는, 자신이 꿈꾸고 원했던 대로 부모를 다시 만나 섬기고 공경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누이! 오늘도 바다에 갈 거야?”
“응, 행랑어멈 기다리고 있었는데 너도 가고 싶어?”
“어머니가 누이 갈 때 따라가도 좋다고 허락하셨어.”
“흠…….”
“나 데려가기 싫어? 말 잘 들을게! 사고도 안 치고, 누나 옆에 딱 붙어 있을게.”
바다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던 도아를 찾아온 남동생은 함께 가고 싶다며 울상을 지었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뭐든 다 들을게!”
“다녀와서 나랑 같이 열심히 공부해야 해. 할 수 있겠어?”
“물론이지. 서책 100권도 더 읽을 수 있어.”
“홍도진, 입만 살았지. 아주.”
남매는 잘 다투기도 했지만 어느 집 남매보다 우애가 좋았다. 서로 떨어지지 않고, 챙기는 마음이 갸륵했다.
도아는 비단 손수건을 꺼내서 도진의 목에 잘 둘러 주었다. 얼마 후 행랑어멈이 나오자 남매는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 * *
물 흐르듯 흘러간 세월을 따라 도아는 어엿한 여인이 되어 갔다. 한양에서는 도아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양반 규수라면 시집을 가기 전까지 별당에 얌전히 앉아서 신부 수업을 받아야 마땅했으나 쾌활한 성품의 도아에겐 그런 생활은 감옥 생활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잘 아는 치열이 부인과 상의한 끝에 자주는 아니더라도 외출하는 일에 제약을 두지 않기로 했다.
덕분에 아리따운 미모를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고, 철부지 도령들이 매일 도아의 별당 담을 기웃거리며 서성이게 되었다.
“아가씨! 정말 날리시게요?”
“설마 내가 시늉만 하려고 도진이한테 훈수 들어 가며 배웠겠어?”
“그래도 이건 좀…….”
“집중해야 돼.”
새총을 집어 들고 당장이라도 총알을 날릴 기세로 담장을 쏘아보던 도아는 목표물을 찾았는지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 튕겼다.
“으악!”
“명중이군.”
곧 담 너머로 새총 알에 이마를 맞은 도령의 외마디 비명이 들리자 도아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한 방 얻어맞은 도령은 두 번 다시 담 너머에 얼씬도 못 할 게다.”
“설마 매일 이러시려고요?”
“전쟁 선포라고 할 수 있지.”
“헉…….”
“별당 생활이 꽤나 무료하였는데 잘되었지.”
담 주변을 훑어보던 도아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새총을 몸종에게 넘겨주었다.
출타를 위해 다시 밖으로 나온 도아는 한 곳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도아야!”
저만치 도아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드는 동년배 규수가 다가왔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모든 것을 함께해 온 유일한 지기였다.
“약속 시간은 그 시간에 만나는 거지, 그 시간에 집에서 나오는 게 아니야.”
“아이, 미안해.”
“내 너를 기다리느라 허비한 시간이 얼마인 줄 알고 있어?”
“대신 내가 맛있는 거 살게. 그러니까 화 풀어.”
“그럼 오늘은 나은이가 우리 모두에게 맛있는 거 사 주는 것으로.”
오늘도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을 도아에게 사과하며 팔짱을 끼고 있던 나은이 모두라는 말에 의아해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두……라니?”
“합이 네 명이지.”
“흠, 좋아! 오늘은 내가 늦었으니까 먹고 싶은 거 다 살게!”
그렇게 말하며 나은은 제 장옷을 들고 따라 걷는 몸종에게 허락의 미소를 지어 주었다.
“하여튼 매일 먹는 거로 얼렁뚱땅 넘기려고 하지.”
“얼굴도 고운 분이 마음씨도 곱게 쓰셔야죠.”
애교 섞인 나은의 말에 결국 도아는 참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함께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새 서책이 들어왔다는 소리에 서고에 들렀다.
“풉…….”
“뭐야. 갑자기 왜 웃어?”
서책을 둘러보고 있을 때 한 도령을 보고 도아는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터뜨렸다. 나은이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물었다.
“정분이라도 난 게야?”
“그런 것이면 천만다행이게요?”
“네 아기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우리 아기씨께서 도련님께 새총 쏘는 법을 배우셨답니다.”
“응?”
도아의 몸종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은이 되묻자 몸종은 다시 친절하게 속삭이며 설명해 주었다.
서책을 들고 밖으로 나오는 도아를 따라 나온 나은이 포복절도를 했다. 서고에서 만난 도령의 이마에 새총 알에 맞아서 생긴 혹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지. 참 너도 너구나.”
“남의 담을 훔쳐보려면 그 정도 감수는 했어야지.”
단골 주막에 들른 네 사람은 조용한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국밥을 뜨고 있었다.
“어느 사내가 너를 데려갈지 참 걱정이다.”
“김가.”
“뭐가?”
“나 데려갈 사람이 김가라고.”
한 술 크게 떠서 입에 넣던 나은이 그 말을 듣고 모두 뿜고 말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사레들려서 기침을 연거푸 했다.
“네 밥풀 내 국에 다 들어갔어.”
“켁…….”
“내 혼인 얘기에 왜 네가 감동을 하는 거야.”
“너, 너, 그 김가가 가문 대대로 삼정승을 지냈다던 김가가 맞아?”
“얼핏 듣기로 그랬던 것 같아. 그 댁하고 아는 사이야?”
대수롭지 않아 하는 도아를 향해 나은은 입가를 닦으며 시기 어린 눈빛을 잔뜩 보냈다.
“그 댁하고 사돈 맺고 싶어 하는 가문이 줄을 지었어! 가문 명성도 명성이지만 외동아들이 보통이 아니라더라.”
“좋은 쪽으로?”
“역마살이 제대로 꼈대.”
명문가 가문의 외동아들이라 당연히 좋은 쪽이겠거니 은근슬쩍 물었다가 이번에는 도아가 사레들리고 말았다.
“그 댁 하인들이랑 우리 집 하인이 친분이 있는데 집에 있는 꼴을 못 봤대.”
“그 정도래?”
“응! 그래도 좋은 것도 있어.”
“뭔데?”
“굉장히 잘생겼대.”
사람은 인물을 뜯어먹고 살지 않는다. 도아는 쥐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 혼사를 엎어야 하나.’
그러나 이미 청혼서가 오가고, 진척이 상당하다고 들었다. 도아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켜 들었다.
엄청난 미끼를 던져 놓은 나은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음식을 먹기에 여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