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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왕을적시다 (85)화 (86/93)

제 85 화 노을이 지고, 네가 진다 完

동도 트지 않은 깊숙한 새벽녘, 도아는 숨을 죽이고 자는 척을 하다가 강의 숨소리가 일정해지며 잠든 것처럼 보이자 조용히 일어나 앉았다. 

고요함이 삼킨 새벽은 안에서도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일정하고, 안정감을 주는 소리를 들으며 도아는 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바라보다가 동이 트려 하자 소리 없이 일어나 몸을 씻었다. 그리고 정갈한 모습으로 돌아와 머리를 풀었다. 치렁하게 긴 머리가 등을 덮고 떨어졌다.

“언제 일어났소?”

“제가 깨운 거예요?”

“아니, 아침을 하려면 이제 일어나야 해서.”

“정말이지 양처가 다 되셨습니다.”

“그 말을 언제 해 주나 내심 기다리고 있었는데 고맙소.”

졸린 눈을 비비며 도아의 곁에 다가온 강은 자연스레 볼에 입을 맞추었다. 

“머리를 좀 빗으려구요.”

“부인, 내 일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예? 제가 무슨 실수라도…….”

“머리를 빗을 일이 생기면 꼭 나를 찾아 달라 했던 것 같은데.”

그의 다정한 말에 도아는 힘 빠진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빗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강은 헤벌쭉 웃으며 빗을 받아 들고 긴 머리카락을 쥐었다.

“그대의 머리카락은 부드럽고 윤기가 흘러서 빗질을 해 주고 있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오. 그러니 앞으로는 제발 내게 맡겨 주시오.”

“네……. 앞으로는 그렇게 할게요.”

한참 동안 머리카락을 잘 정돈해서 빗질하던 강은 이제는 제법 능숙해진 솜씨로 머리를 하나로 잡아서 묶어 주었다. 

“오늘도 아침을 먹고 바다로 갈 것이오?”

그 물음에 앞을 보고 있던 도아는 잘 묶인 머리를 손으로 만지며 뒤에 있던 강을 향해 돌아앉았다.

“아뇨, 오늘은……. 오늘만은 서방님 곁에 있을 것입니다.”

“…….”

“그러니 귀찮아도 떼 놓지 말고 꼭 곁에 두고 다니세요.”

“……귀찮을 리 있겠소.”

“예, 이부자리는 제가 정리할 테니 나가 보셔도 됩니다.”

그 말에 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왔다. 가슴 한쪽이 싸하니 무언가에 휩싸인 듯 알 수 없는 고통이 지나갔다. 

설마 했던 생각은 밥상을 차려서 안으로 들어가 도아를 본 후 확실해졌다. 도아는 보여 주지 않고 꽁꽁 싸두었던 비단옷을 꺼내 입고 있었다. 저고리 아래로 동심결 노리개가 보였다.

“죄인이지만 아껴만 두다가 입지 못하게 될까 봐 입었는데 갈아입을까요?”

“아니, 보기 좋으니 입고 있으시오.”

애써 웃으며 상을 보고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어제처럼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냈다. 

오늘은 눈도 오지 않고, 평소보다 더 화창하고 포근한 날이었다. 곧 겨울이 가고, 봄이 올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마당 한쪽에는 두 사람이 장에 나가서 사 온 작은 나무가 심겨 있었다. 파는 사람이 무슨 나무인지 모른다고 해서 커서 뭐가 될지 알 수도 없었다. 

“이 나무는 너무 어려서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을 줄 알았는데.”

“겨울을 이기는 나무였으니 상인이 팔지 않았겠소?”

“그렇겠죠. 곧 봄이 올 테니 삭막한 나무에도 새싹이 날 것입니다.”

“……벌써 봄이로군.”

“예, 곧 봄입니다.”

나무를 바라보고 있던 도아가 곁에 앉아 있던 강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도아의 눈에도 보였다. 

그러나 주저앉아 시간이 가기만을 두려워하는 일에 하루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외면하기로 했다.

“서방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뭐든 말하시오.”

“이 나무가 다 자라면 열매를 맺을지 꽃을 피울지 꼭 봐 주세요.”

“…….”

“나무가 다 자라서 무엇이 될지 너무 궁금해서 그럽니다.”

나를 따라 죽지 말고 살아 달라 말하고 있었다. 

“나무가, 다 거기서 거기지.”

“그래도 이 나무는 특별할 것입니다. 그러니 꼭 지켜봐 주세요.”

“…….”

“겨울을 이겨 냈으니 남은 계절은 쉬울 것입니다.”

말을 마친 도아는 곁에 앉아 있던 강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나무를 눈에 담았다. 

“나무에서 자란 것이 꽃이면 꽃대로, 나뭇잎이면 잎대로 바다에 뿌려 주세요. 이 약조를 기억해 두었다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따듯한 햇살을 담은 바람이 살랑이며 불어왔다. 봄이 오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려는 듯 꽤 필사적인 바람이었다. 

* * *

집을 벗어나 주변을 걷자 쌓인 눈 속에 가려져 있던 새싹들이 햇빛을 보고 녹아내린 눈 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보지 못할 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 새싹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톡 건드려 보던 도아는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

두 사람은 바다로 가서 조개도 줍고, 모래성도 만들고 백지처럼 하얀 모래사장 위에 서로의 이름을 써 주기도 했다.

반짝이는 모래사장을 밟고 있으니 마음이 비워지는 것 같았다. 바다와 모래,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음 생이 있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세요?”

“음…….”

“생각해 보신 적 없으세요?”

손을 잡고 바다를 거닐며 도아는 고개를 돌린 채 강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대의 그림자.”

“…….”

“사실 뭐라도 상관없으니 그저 그대 곁에만 머물고 싶소.”

“만약 제가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해도요?”

“거리에 핀 들꽃이어도 난 마땅히 흙이 되어 그대를 지킬 것이오.”

“…….”

“그러니 그대는 무엇으로 태어나도 되오.”

그의 바람은 쓰러지지 않는 단단한 성처럼 굳건했고, 지나가는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릴 만큼 절박했다.

어느새 두 사람은 기다란 길을 따라서 언젠가 함께 온 적이 있던 절벽에 올랐다. 이곳에서 자객을 만나 도아의 정체가 탄로 났었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지만 그와 다시 한번 함께 오고 싶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끝으로 걸어가 앉았다.

어느새 하늘은 수명을 다하고 붉은 노을을 천지 사방에 흩뿌리고 있었다. 도아는 붉은빛을 받으며 숨을 들이켰다. 

몸속에서 서서히 생명의 숨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도아는 언제나 곁을 지켜 준 강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편안하고, 안락했다. 언제나 나만을 위해 비어 있을 것 같은 자리에 포근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다시 함께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이오.”

“그러니 다 쓰고 가지 못한 날들에 미련은 남기지 않겠습니다.”

“나 또한 그리할 것이오.”

파도가 절벽에 달려들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귓전을 울렸다. 

“서방님의 약조를 믿고, 원하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그러니 서방님은 미련이 남지 않도록 남은 시간을 모두 쓰고 오셔야 합니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따라 도아는 강을 바라보며 눈을 맞췄다. 그는 안간힘을 쓰며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도아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눈가에 닿은 입술에, 도아의 눈물이 부서져 얼굴 위로 떨어졌다.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고, 꼭 말해 주겠소.”

“으응……. 꼭 그러셔야 합니다.”

“미리 말하겠소.”

“…….”

“오래,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부인.”

“저도 미리 말하겠습니다. 괜찮다고…….”

붉은 노을은 점차 어둠에 삼켜져 모습을 잃어 가고 있었다. 도아는 저고리 아래 달고 있던 동심결을 빼서 손에 꼭 쥐었다. 

“모두 두고, 오직 이것 하나만 갖고 가겠습니다.”

“우리의 징표로 삼읍시다. 누가 갖고 있든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그의 말에 도아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치마 너머로 두 다리는 사라지고 빛을 잃은 초라한 꼬리가 나와 있었다.

“부인의 숨결 하나하나 잊지 않고 기억하겠소.”

“기다리고 있을게요.”

“반드시 함께할 것이오.”

다시 그의 품에 안긴 도아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몰아치는 파도 소리에, 숨소리도 멈추었다. 

“나의 도아야…….”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강은 날이 저물고 다음 동이 틀 때까지 숨을 거둔 도아를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 * *

마당에 심었던 키 작은 나무는 어느새 훌쩍 자라 있었다. 나무는 모진 겨울을 이겨 내고 붉은 꽃망울을 터뜨려 꽃을 피웠다. 이 나무는 ‘매화나무’가 되었다.

도아를 보내고도, 5년 동안 강은 한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당에 심어져 뿌리를 내린 매화나무처럼 그도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매화나무는 사람의 수명을 다하고도 죽지 않고, 천년만년 그 자리를 지켰다. 

* * *

담장 너머로 기름진 냄새와 왁자지껄 신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수군덕대는 소리가 한곳에 어우러져 있었다.

병풍 앞에 차려진 대례상 양쪽으로 신부와 신랑이 나란히 예복을 차려입고, 맞절을 올렸다. 

얼굴을 푹 숙인 신부의 얼굴은 아무리 애를 써도 양 볼에 찍은 연지곤지만이 어설프게 보일 뿐이었다. 신랑도 제 신부 얼굴이 퍽이나 궁금했던 모양이다.

신랑은 절을 올리면서 고개를 쭉 빼고, 신부를 훔쳐보려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대차게 넘어지고 말았다. 장내는 순식간에 박장대소하는 소리로 가득 차올랐다.

“아이고! 신랑이 신부 얼굴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네!”

“신방에 들기도 전에 신랑 몸 상할라!”

창피함에 얼굴이 홍시가 되어 버린 신랑이 애써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고, 기다란 소매에 얼굴을 감추고 있던 신부도 싫지 않은 듯 보시시 수줍게 웃었다.

* * *

나비 촛대에 불을 밝히고, 술상을 차려서 한쪽에 놓았다. 원앙금침을 곱게 깔고, 그 앞에 그보다 곱절은 고운 신부가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신랑이 오기만을 기다린 것이 두 시진이 되었다. 이른 새벽부터 혼례를 위해 무리했던 신부는 그만 앉은 채로 잠이 들고 말았다.

꾸벅거리며 머리를 가누지 못하고 있을 때, 머리에 올린 무거운 장신구들 때문에 고개가 기우뚱 한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신부가 넘어지려는 찰나 신방에 들어오던 신랑이 급히 손을 뻗어서 잡아 주었다. 희고 작은 얼굴이 신랑의 손에 쏙 들어왔다.

어둡기만 한 신방에 겨우 촛불 하나 밝힌지라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으나 신부의 미색은 팔도에 소문이 날 만큼 아름다웠다. 

붉게 칠한 입술을 꾸물거리던 신부가 낯선 감촉에 눈을 뜨다가 신랑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본의 아니게 뒤로 물러나며 그를 밀쳤다.

“밖에서 하도 붙잡는 통에 늦었소.”

“…….”

“많이 고단했던 모양이오.”

“조, 조금요…….”

애써 흐트러진 모양새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그럴수록 머리에 달아 놓은 것들은 더욱 엉망이 되었다. 그 모습에 신랑이 웃으며 다가가 머리에 위태롭게 단 장신구를 빼 주었다.

“그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대를 알고 있었소.”

“……예?”

“무서워할 것 같아서 숨기고 싶지만…….”

“담장 너머로 훔쳐보던 도령들 중 한 명이셨나요?”

세상 순진한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묻는 말에, 신랑은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어릴 적부터 나는 유난히 바다를 좋아해서, 바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소. 그런 내게 부모님이 두 손 두 발 다 들고, 바다 근처에 작은 초가를 지어 주셨소.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초가에서 지내고는 했는데 나보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줄 미처 몰랐소.”

“……바다요?”

“그렇소. 그곳에서 처음 그대를 봤소.”

신랑이 바다를 이야기하자 신부의 눈이 조금 전과 달리 유난히 반짝였다. 그는 수줍은지 말을 아끼고 소매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어머니께 받은 것이오.”

“처음 보는 것인데…… 너무 익숙하네요.” 

긴 소맷자락에서 손을 꺼낸 신부는 신랑이 건넨 동심결 노리개를 받아 들었다. 처음 보는 것에 가슴이 심하게 동요했다. 아프기도 하고, 떨리기도 했다.

“평생 그대를 위해 살고, 그대만을 그리며 살겠다고 약조하겠소.”

“그 약조, 이 노리개에 담겠습니다.”

수줍은 연심에 신부는 동심결 노리개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신랑은 신방을 밝히던 촛불을 입으로 불어서 껐다. 

신부의 얼굴은 곧 환생한 도아가 되었고, 어엿한 신랑의 얼굴은 실과 바늘이 되어 따르겠다고 맹세했던 강이 되었다.

밤하늘에 휘영청 뜬 밝은 달빛이 돌 위에 나란히 놓인 두 사람의 신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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