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4 화 노을이 지고, 네가 진다
서로에게 자연스레 스며든 두 사람은 과거의 일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눈이 많이 내린 날에는 눈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쌓인 눈을 뭉쳐서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눈싸움을 하기도 했다.
“눈! 눈에 맞았습니다!”
“이게 눈이니 눈이 맞소. 뭐가 문제 있소?”
“얼굴을 맞히다니 사내답지 못합니다!”
“부인, 좀 전에 내 입에 눈을 떠먹일 때는 그리 생기 넘치시더니 이러기요?”
먹을 것이 떨어지면 여느 부부들처럼 함께 장에 나가 도란도란 구경도 하고, 그러다 목화솜을 보고 잔뜩 사 와서 서툰 솜씨로 이불을 만들기도 했다.
선을 제대로 타지 못한 삐뚤삐뚤한 바느질이 어린아이가 장난을 부려 놓은 것 같았다. 나란히 그 모양새를 보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 댔다.
“진작 바느질 좀 배워 둘 걸 그랬습니다.”
“나도 요리에만 전념했더니 바느질은 형편이 없소.”
“누가 와서 볼까 걱정될 정도입니다.”
“흠……. 잘 때만 펴서 쓰는 것으로 합시다.”
바로 집 앞에 나갈 일이 생겨도 누구든 혼자 가는 법이 없었다. 실과 바늘처럼, 하나로 이어진 듯 손을 꼭 잡고 함께했다.
* * *
“언제부터 이런 것이오?”
“조금 전요…….”
“바로 깨우지 않고……! 가서 찬물을 떠오겠소.”
가는 신음 소리에 눈을 뜬 강은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도아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 앉았다.
곧장 찬물을 받아 와 천을 적셔서 불덩이 같은 이마에 얹어 주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른 천을 적셔서 손과 다리를 닦아 주며 열을 식혀 주려 했다.
“화내서 미안하오. 부인은 나를 생각해서 그런 것인데 내가 아직도 이리 철이 없소.”
“…….”
“다시는 화내지 않겠소.”
그러나 이미 도아는 열에 들떠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 이마에 얹어 둔 천을 만져 보니 벌써 뜨겁게 익어 있었다.
곁에서 꼬박 이틀을 지새웠다. 도아의 몸을 달군 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으니 물수건을 바꿔 주고, 온몸을 주물러 주는 일밖에 할 수가 없었다.
이틀 후 동이 트는 새벽이 되어서야 잠만 자던 도아가 눈을 떴다. 가쁜 숨을 뱉고, 목이 타는 듯 갈증이 일어나 주변을 살피다가 앉아서 잠든 강을 발견했다.
강은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한 탓에 앉아서 꾸벅거리며 자기도 모르게 잠들고 말았다. 도아는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는데 졸던 고개가 툭 떨어지자 강이 잠에서 깼다.
“몸은 어떠시오?”
“괜찮습니다.”
강은 그 말을 믿지 못하고 도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다행히 열이 모두 떨어지고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미리 준비해 둔 물을 집어서 도아에게 건네주었다. 받아 든 것을 한 번 쉬지도 않고 모두 마신 도아는 개운해 보였다.
“배가 고프지는 않소?”
“나중에요. 우선은 조금 더 자고 싶어요.”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고단할 것이오. 어서 누우시오.”
“서방님도 곁에 누우세요.”
고단할 그를 생각해 도아는 자리에 누운 후 강의 손을 당겨서 곁에 눕혀 주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따라 누운 강이 난감해했다.
“어디 가지 말고, 제가 일어날 때까지 곁에 계셔야 해요.”
“아궁이도 봐야 하고, 밥도 해야 하는데…….”
“이따 같이하면 되죠. 움직이면 편히 못 잘 테니 가만히 계세요.”
편히 눕지 못하는 강을 제대로 눕히고, 그의 품을 파고들어 꼭 끌어안았다. 익숙하고, 좋은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꼼짝 않고, 곁에 있을 테니 편히 자도 되오.”
“네, 서방님.”
말을 마친 도아는 직접 만든 목화솜 이불을 덮고, 강의 품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 * *
이제는 용포가 익숙해진 도화군은 영의정과 상선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그는 무조건적인 관용을 베풀지 않고, 필요할 때는 단호한 모습을 보이며 모두를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어서 오세요, 전하.”
“틈이 나 잠시 들렀소.”
“예, 전하께서 납시어 주신다면 그저 영광이지요.”
“황송하군.”
두 사람이 단란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교태전 처소에 앉았다. 중전이 된 군부인은 마치 제 옷을 입은 듯 내명부를 통솔하여 질서가 어지럽혀지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
“원자는 어디에 있소?”
“안 그래도 전하께서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곧장 원자를 데려오라 일렀사옵니다.”
“잘하셨소. 요 며칠 보지 못했더니 너무 보고 싶더군.”
“매일같이 원자와 함께 계셨으니 그러실 만도 하옵니다.”
곧이어 원자를 살피는 유모가 선이를 데려왔다. 강은 두 팔을 벌려 제법 씩씩해진 선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제법 묵직해진 것 같소.”
“궐에 들어온 후로 몰라보게 자랐사옵니다.”
“이대로 건강하게만 자라 준다면 대신들이 바라는 대로 세자로 책봉될 수 있을 것이오.”
“예, 신첩이 곁에 두고 잘 살필 테니 염려 놓으시옵소서.”
“부디 그래 주시오.”
익숙한 아비의 품이 좋았는지 선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러자 지켜보던 부부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겹쳤다.
“참, 비암사에 사람을 보낸 일은 어찌 되셨소?”
“예, 어마마마께서 비암사에 가신 후로 보름 동안 외부인을 거부하시고, 밖에 나오시지 않아 모두의 걱정을 샀으나 이내 마음을 바꾸시고 모두와 잘 지내고 계신다 하옵니다.”
“그저 체념하셨겠지.”
“그래도 잘 지내고 계신다니 크게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될 듯하옵니다.”
“과인이 말하지 않아도 중전께서 살펴 주시오.”
그에게도 마음의 상처가 깊었던 것일까? 도화군은 좀처럼 대비의 일을 입에 담으려 하지 않았다. 이후로 오랫동안 비암사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아주버님의 소식은 아직 모르시옵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 아니겠소.”
“신첩도 그리 생각은 하고 있사옵니다.”
“언젠가 소식을 주시겠노라 약조를 하셨으니 때가 되면 주실 것이오.”
용안 위로 그리움이 비쳤으나 더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선이가 부리는 재롱이 그에게 위안이 되기를 바랐다.
* * *
한편, 궁가로 거처를 옮긴 나은은 후궁으로 지내던 때와 다르게 꽤 편안하고 홀가분하게 지내고 있었다.
가문을 위해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며 남의 인생을 살듯 불행하게 살던 때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얼굴이 왜 이러지?”
“…….”
“민 상궁! 내 혹시 몸이 안 좋아서 부은 것 같은가?”
“송구하오나 식단을 조절하셔야 하옵니다.”
“식단 조절이라니……. 정말 이게 전부 내 살이란 말인가?”
“송구하옵니다.”
그간 궁가를 돌아다니면서 놀고먹느라 살이 부쩍 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지내 왔다. 경대를 펼쳐 보고 거울 속 모습에 깜짝 놀란 나은이 울상을 지었다.
“옷들이 전부 갑갑하여 건강에 문제가 있는 줄 알았는데…….”
“당장 간식부터 금하시는 것이 어떠시옵니까?”
“가, 간식을?”
“예, 우선은 그렇게만 하셔도 도움이 되실 것이옵니다.”
“너무 극단적인 것 같네만.”
저만치 나인이 간식을 산처럼 쌓아서 가져오다가 민 상궁의 말을 듣고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밥을 줄이는 게 더 도움이 될 것이네. 우선은 당장 저녁밥부터 줄이도록 하세.”
“지금 드시는 간식의 양도 반의반으로 줄이시옵소서.”
“반의……반?”
“예, 소인이 그리 이르겠나이다.”
나은은 울상을 지었으나 다시 경대를 보고 있자니 민 상궁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어릴 때 젖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한 손으로 볼을 늘어뜨리던 나은은 곧이어 간식이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경대를 닫았다.
한편, 한때는 같은 처지였던 청아는 나은과는 전혀 다른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자급자족하여 일해야 생활이 유지되는 형편이 됐다.
다행히 자수를 잘하던 솜씨가 여기저기 소문이 나서 양반가에서 일거리를 받아 와 삯바느질하며 입에 풀칠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밖에 잘 나가지 않고 안에 틀어박혀 바느질에만 몰두했다. 나갈 일이 생기면 차곡차곡 모아서 한 번에 나가거나 그마저도 잘 하지 않았다.
청아는 자신과 처지가 같은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리길 원하지 않았다. 그들의 친절과 호의가 부담스러워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자네가 일을 잘해서 마님께서 돈을 더 쳐주셨어. 이건 마님께서 대궐에 들어가실 때 입어야 하는 옷이라고 특별히 잘해 달라 신신당부하셨으니 실수 없이 잘해 줘. 이틀 후에 가지러 올게.”
“알겠습니다.”
일감을 받아 든 청아는 다른 말을 할세라 서둘러 옷감을 가지고 초가로 들어가 버렸다. 문을 닫자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비단보를 풀자 오랜만에 보는 녹색 당의가 들어 있었다. 청아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서 옷을 어루만졌다.
형형색색 화려한 당의에 비녀를 꽂고 생활하던 때를 떠올리다가 이내 부질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사저에서 부리던 하인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었으니 행색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비단으로 칠갑을 해도 불행하기는 매한가지.’
그저 바랐다. 세월이 순식간에 흘러 오늘처럼 당의를 봐도 아무 감정에도 휘말리지 않는 때가 오기를 바랐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감을 보아 오늘도 자정이 넘도록 손에서 바늘을 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 * *
바닷속은 밖에서 파도가 요란한 것과 달리 심해에 온 듯 고요하기만 했다. 바다는 투명한 보석을 햇볕에 놓고, 그 속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맑고 투명해서 바라보고만 있어도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도아에게 바다는 고향이고,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는 바다를 누비고 다닐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도아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바닷속에 멈춰 있었다.
눈을 감자 어릴 때부터 겪어 온 일들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스쳐 갔다. 바다에 빠진 사내아이를 구해 주고 다시 만나게 되어 부부가 되기까지 마치 꿈과 같았다.
‘결국 내가 돌아와야 할 곳은 여기구나.’
감았던 눈을 뜨자 온몸을 지탱해 주는 바다가 보였다. 도아는 쥐어지지 않는 바다를 양손에 꼭 쥐었다.
박동이 빨라진 심장을 부여잡고, 진정되자 바다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향했다. 초가지붕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가슴이 따듯해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집에 다다르자 밥을 짓다 말고 강이 헐레벌떡 밖으로 나와 맞아 주었다.
“부인!”
웃으며 달려온 강의 얼굴에 잿가루가 묻어 있었다. 그는 줄곧 이런 상태로 도아의 곁을 헌신적으로 지키고 있었다.
“왜 웃으시오?”
“예뻐서요.”
“응?”
“어찌 이리 점점 예뻐 보이는지. 큰일입니다.”
도아가 손을 올려서 다정스레 얼굴에 묻은 자국을 닦아 주었다. 강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손등으로 슥슥 마저 닦아 냈다.
두 사람을 감싸며 노을이 하늘을 수놓았다. 도아는 항상 노을을 등지고 그들의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얼굴이 붉어지셨습니다.”
“노을 탓이오.”
“저는 아닙니다.”
“그럼?”
“서방님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음…….”
노을을 따라 얼굴이 붉어진 두 사람이 서로를 가만히 바라봤다.
“사실 나도 부인이 좋아서 그렇소.”
“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서로의 체온과 숨결이 입술 틈으로 흘러들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따라서 도아의 심장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