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83)화 (84/93)

제 83 화 떠나는 사람들

후궁의 아들로 태어나 서자라는 이유로 몸을 낮추고, 태몽조차 비밀리에 감춰져야 했던 도화군이 명실상부 모두의 앞에 당당하게 즉위식을 통해 임금이 되었다. 

만조백관 신하들 앞에 왕비의 상징인 대례복을 입은 군부인과 면복에 면류관을 착용한 도화군이 나란히 섰다. 

“천세 천세 천천세!”

이에 신하들은 임금에게 천세를 누리라는 뜻으로 합창을 이었다. 

* * *

얽매일 것이 없는 두 사람의 앞날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의 수평선과도 같았다. 말 한 필에 나란히 몸을 포개고 길을 떠났다.

나무가 멋지면 자리에 서서 바라보고, 배가 고프면 시장이든 주막이든 거리끼지 않고 말을 세우고 허기를 채웠다. 

유유자적하게 봄 소풍 가듯 한적하게 떠난 길의 끝에 다다른 곳은 바다였다. 파도 소리가 선율에 맞추어 울리는 자리에 초가 한 채가 지어져 있었다.

초가의 마당에 서면 바다가 한 폭에 들어오고,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곧장 바다로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초가는 직접 지으라 하셨어요?”

“부인을 위해 생각보다 많은 공을 들였소. 보기에는 초라한 초가지만 좋은 흙을 구워서 만들었으니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실망이라니, 어느 곳에 눈을 둬도 바다가 보이니 극락이 따로 없습니다.”

마당 곳곳을 누비던 도아는 집이 마음에 드는 듯 한껏 웃으며 강에게 다가와 손을 꼭 잡았다. 

“이곳은 우리 말고는 딱히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이니 마음 놓아도 되오.”

“오는 길에 사람이 보이지 않아 외딴곳이겠거니 했는데 생각보다 안락하고 좋습니다.”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군.”

도아는 마침 바닷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다가가 눈을 감은 채 숨을 들이켰다. 매서운 바람이었으나 바다 냄새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강이 도아의 뒤로 다가가 끌어안았다. 얼굴이 붉어진 도아는 제 허리를 감싼 팔에 손을 얹었다.

“이제 그만 불러 줬으면 좋겠소.”

“무엇을요?”

“나는 그대를 부인이라 하는데 그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질 않소.”

“아…….”

“연지곤지 찍고, 혼례라도 올려야 불러 주려나.”

그의 말에 도아는 보스스 희미한 미소를 짓다가 입을 열었다.

“서방님.”

“생각보다 더 듣기 좋소.”

사랑 가득한 호칭에 강은 도아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비비적거렸다. 두 사람이 조용해지자 주변으로 파도 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바다에 가도 좋소.”

“오래 있을지도 모릅니다.”

“밥 지어 놓고 기다리고 있겠소.”

“그런 것도 할 줄 아세요?”

밥이라는 말에 도아가 흠칫 놀란 듯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풀고, 강을 바라보았다.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하질 않았소. 곱게 자란 그대에게 밥을 짓게 할 수는 없으니 내가 배워야 하질 않겠소. 틈틈이 이것저것 배워 뒀으니 밥 짓는 실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그는 도아와 함께할 날을 위해 생각보다 많은 준비를 한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도아는 미안해지는 마음을 잡을 길이 없었다.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강은 시무룩한 얼굴에 마구잡이로 뽀뽀를 하고, 도아를 번쩍 안아 올렸다.

“제, 제 발로 갈 수 있습니다.”

“제조상궁이 처음 집에 들어갈 때는 이렇게 부인을 안고 들어가라던데?”

수줍음에 품에서 내려가려 버둥거리던 도아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해했다.

“그러니 잠자코 계시오.”

“서방님…….”

“바다에 가기 전에 머리를 풀어 줄 테니 들어갑시다, 부인.”

세심하기도 한 사람. 도아는 못 이기는 척 그의 가슴에 붉은 얼굴을 묻었다. 강은 그 틈도 참지 못하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걸음을 옮겼다.

* * *

오가는 사람들을 지나 기다란 담장을 따라 걸었다. 익숙한 담장을 따라 걷다가 항상 멈추던 그 자리에 섰다.

다친 팔이 회복되지 못한 시현은 움직일 때마다 상처가 욱신거렸다. 그럼에도 답답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밖을 배회했다.

손가락으로 돌담을 하나하나 어루만졌다. 어릴 때부터 이 담장을 떠돌며 빙빙 돌고, 앉아 있다가 가고는 했다.

도아가 살던 별당의 담장이었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 사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감에 가슴이 시렸다. 

‘남의 담장에서 뭐 하십니까?’

‘도진이 녀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지만 지금 서 계신 곳은 제 별당 담장입니다.’

‘이 돌담 하나하나에 네 것이라고 이름이라도 박혀 있느냐?’

어린 시절부터 도아는 항상 시현에게 날을 세웠다. 이 담장을 배회하다가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싸늘한 눈빛을 받아야 했다. 

붉은 색동저고리를 입은 어린 도아는 눈이 반짝거리며 총기가 가득했다. 또박또박 무슨 말이든 거침없이 뱉었다.

‘이제 다시는 이 담장을 배회하지 않으마. 미안하다.’

시현은 담장에 얹었던 손을 거두고, 이어진 길을 따라 저벅저벅 걸어갔다. 

* * *

비암사로 가는 길에 휴식을 취하러 가마를 내려도 대비는 절대 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비마마, 목이 마르시면 물을 대령하겠사옵니다.”

“됐다.”

짧은 말만 할 뿐이었다.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물을 줄 수도 없고, 밥을 먹일 수도 없으니 그저 명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가마 안으로 캄캄한 어둠과 한기가 스며들었다. 그럼에도 대비는 조금도 떨지 않고, 손에 은장도를 꽉 움켜쥐고만 있었다.

이렇게 비참하게 쫓겨날 바에는 자결을 하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장도를 칼집에서 빼려는데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중전마마, 밖에 도화군마마가 문안 인사를 드리겠다며 벌서 한 시진째 서 있사옵니다.“

‘손님이 계시질 않느냐. 기다리라 해라.’

‘하오나…….’

‘어허! 추위를 견디기 힘들거든 돌아가라 일러라!’

그때 도화군의 나이가 고작 여섯이었다. 따듯한 말 한마디 해 준 적 없는 대비에게 그날도 어김없이 문안을 올리겠다며 찾아왔었다.

그러나 대비는 안에 손님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한겨울에 어린 도화군을 두 시진이나 세워 두었다. 

‘마마, 이러시다 큰일 나시겠사옵니다.’

‘어마마마께서는…….’

‘아무래도 오늘은 문안 인사를 거르심이 좋을 듯싶사옵니다.’

어린 도화군을 가엾이 바라보던 엄 상궁이 그만 돌아가라 말해 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도화군이 말없이 교태전을 바라보았다. 

‘마마! 도화군마마!’

결국 어린 몸으로 추위를 감당하지 못한 도화군은 혼절을 했고, 닷새 동안 크게 앓아누워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몸이 다 낫자 여느 때처럼 대비를 찾아와 문안 인사를 올렸었다. 

‘어마마마, 소자 문안 인사 여쭙사옵니다.’

‘오냐, 곧 세자가 온다고 했으니 그만 물러가라.’

‘형님이 오시면 어마마마와 함께 다과를…….’

‘어허! 감히 뉘더러 형님이라 하느냐!’

며칠을 앓다 온 도화군에게 대비는 스쳐 지나가는 말로도 안부를 묻지 않았다. 되레 형님이라 했다며 크게 호통을 쳐 눈물을 흘리게 했었다.

은장도를 빼 들려던 손이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힘없이 치마 위로 떨어졌다. 

* * *

비녀를 올렸던 머리를 풀어서 하나로 묶은 뒤 도아는 다녀오겠다며 바다로 떠났다. 강은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초가로 돌아온 강은 편안한 차림으로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잔뜩 쌓아 둔 장작을 가져와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어릴 적 사냥터를 다니며 불을 지피는 일은 자주 했기에 어렵지 않았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을 바라보며 몇 개를 더 집어넣었다. 

식량도 미리 준비해서 이것저것 없는 재료가 없었다. 몸이 약한 도아를 위해 몸에 좋다는 재료는 모두 모아 놓았다. 

가마솥에 밥을 올리고 근심 어린 얼굴로 뚜껑을 닫고, 나물을 따듯한 물에 데쳐서 기름에 버무리고 하나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아……. 사람이 먹을 것이 못 되는데.”

분명히 대궐에서 연습할 때는 이 정도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몹쓸 맛이었다. 강은 귀하다는 소금을 한 꼬집 집어서 나물에 털어 넣었다. 

큼지막한 손으로 나물을 무치고, 아궁이 속에서 숯이 된 장작을 몇 개 꺼내서 힘들게 구한 석쇠 위에 고기를 올려 구웠다. 

“초벌만 해 둬야겠군.”

적당히 고기의 겉면만 익힌 강은 그것을 잘 보관해 두고, 숯을 정리했다. 가마솥에 올린 밥을 확인하려 뚜껑을 열자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 위에 잘게 찢어 놓은 버섯을 뿌리고 다시 뚜껑을 닫았다. 소매로 이마에 묻은 땀을 닦으며 밖으로 나가자 어느새 하늘에 짙게 노을이 깔려 있었다.

마당을 서성이며 도아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저만치 도아가 머리에 물기를 짜며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강은 기다렸다는 듯 마루에 올려 두었던 천을 집어서 한달음에 달려갔다. 

“맛있는 냄새가 저 멀리까지 납니다.”

“그랬소?”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도아가 눈을 빛내며 말하자 강은 다정하게 답하며 천을 펼쳐서 몸을 감싸 주었다. 

“날이 찬데 바닷물이 차갑지 않소?”

“생각보다 포근하고 따듯하여 차갑지 않습니다.”

“아……. 그렇다니 마음이 놓이는군.”

“바다에 오래 있었더니 배가 고픕니다. 저녁은 다 하셨어요?”

“그럴 줄 알고, 다 해 놨소.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물기를 말리고 있으시오. 상만 차려서 들어가면 되오.”

두 사람을 감싼 노을이 마치 타오르는 불 같아서 한겨울임에도 따듯하게만 보였다. 강은 따듯한 아랫목에 도아를 앉혀 놓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초벌로 구워 놨던 고기를 마저 구워서 그릇에 담고, 밥과 나물을 퍼서 상에 올렸다. 저녁상을 들고 들어가 도아 앞에 내려놓았다.

“와…….”

“뭐든 처음에는 시행착오를 겪는 법이오.”

강은 헛기침하며 도아의 손에 숟가락을 들려 주었다. 밥을 뜨자 강은 그 위에 고기를 얹어 주었다. 노르스름하게 잘 익은 고기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숟가락을 한입에 털어 넣은 도아가 오물오물 씹다가 손을 가리고 웃었다. 강이 긴장한 듯 동태를 살피려 눈을 요리조리 굴렸다.

“고기가 익지 않았소? 아니면 밥에 돌이라도 있소?”

“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놀랐습니다.”

“그럼 다시 밥을 떠 보시오.”

“밥에 버섯을 올릴 생각은 어찌하셨어요?”

“다 배움이지. 역시 뭐든 배워 두는 것이 좋은 것 같소.”

두 사람이 맞이한 저녁 시간은 애틋하고 따듯했다. 도아는 꽉 눌러 담은 밥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모두 비웠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이 안개구름을 따라 일렁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문을 열고 이불을 두른 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작은 눈발이 흩날리며 밤하늘을 수놓았다. 도아는 편안하게 강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배가 부르니 잠이 솔솔 옵니다.”

“잠들면 자리에 눕혀 줄 테니 졸리면 자도 되오.”

“제가 생각보다 무겁습니다.”

“감안하고 있겠소.”

그 소리에 도아는 작은 주먹을 말아 쥐고 강의 가슴을 툭 쳤다. 

“솜방망이도 이보단 아프겠군.”

“봐드린 겁니다. 오늘 저녁 셈을 치른 거지요.”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내일 아침은 제가 하겠습니다.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닐 테니 맡겨 주세요.”

웅얼거리듯 말하던 도아는 어느새 고단함을 이기지 못하고 강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고 말았다.

“그대가 먹을 밥 짓는 일은 평생이라도 할 수 있소.”

말소리는 한기에 묻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강은 조심스레 몸을 틀어서 도아를 품에 안아 들었다. 새근새근 잠든 도아의 숨소리가 들리자 그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가벼운 몸은 강의 마음을 저미게 했다. 도아를 눕히고 그 곁에 따라 눕자 도아는 품을 찾듯 가슴팍에 매달렸다. 

강은 아이를 재우듯 오랫동안 도아의 등을 쓸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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