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 화 낙선재, 불타오르다
어느새 국상이 끝이 났다. 선위를 앞두고 있던 시점이기도 했고, 은하가 교태전에서 쫓겨난 후라 죄인이란 시선도 덧대어졌다.
하여 정해진 시간의 반도 채우지 못하고 국상은 막을 내렸다. 낙선재 화재라는 참담함에 국모를 잃은 백성들은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 국상이 끝났으니 미뤄졌던 일을 순차적으로 치러야 했다. 먼저 손댈 것은 도아를 궐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었다.
교지가 내려졌으니 도아는 더 이상 후궁이 아닌 폐서인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있기에 강은 어느 때보다 조심하여 걸음을 하지 않았다.
“오늘 궐 밖으로 나가신답니다.”
“국상이 끝났으니 나가야지.”
“많이 힘들어 보이세요.”
“오늘은 유난히 고단하구나.”
곁으로 다가온 무이가 도아의 어깨를 만져 주다가 다리를 펴 주물러 주었다.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구나.”
“…….”
“그래서 좋아.”
“마마는 어릴 때부터 바다 말고는 정적이 흐르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렇지. 왜 그랬을까? 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어릴 적 일을 떠올리면 무이의 말처럼 도아는 주변에 사람이 끓는 것을 싫어했다. 고요함 속에 스스로 묻혀 있는 것을 좋아했다.
“전하께서 바다와 가까운 곳에서 지내게 해 주신다고 했으니 모든 게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거예요.”
“으응, 너는 사가로 가거든 가족들을 따라가.”
“소인은 죽을 때까지 마마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말 들어. 나는 전하께서 계시니 걱정하지 말고, 가족들을 따라가.”
“마마…….”
다리를 연신 주무르고 있던 무이는 날벼락이라도 맞은 얼굴로 눈물을 글썽였다. 이에 도아는 가까이 가 안아 주었다.
“네가 가족들 곁에 남아야 내 마음이 놓일 것 같아.”
“하지만…….”
“부탁할게, 무이야.”
“저 없이도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보고 싶고, 그리울 거야.”
그러나 무엇이 무이를 위하는 길인지 도아는 잘 알고 있었다. 끝이 보이는 길에 굳이 동행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네가 어머니 곁에 딸처럼 남아 준다면 정말 고마울 거야.”
“…….”
“그렇게 해 주리라 믿어.”
“소인이…… 잘 모실게요. 그러니 아무 걱정 하지 마세요.”
하나씩 주변이 정리되고 있었다. 도아는 약속을 듣고 희미하게 웃으며 무이의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 *
국장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 순간을 기다린 대비는 자경전 처소로 들어오는 도화군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문후 여쭈옵니다.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내가 강녕해 보입니까?”
“송구하옵니다.”
“평생을 그리 불길하더니 내 예감이 맞아떨어진 겁니다.”
그런 말을 쉽게도 입에 담았다. 도화군은 선위를 두고 하는 말임을 알기에 입을 닫았다.
“고분고분 형님이라 따르며 주상의 신뢰를 쌓아 결국은 왕좌를 탐했습니다.”
“곡해라 말씀 올려도 믿어 주시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믿을 수 있는 말을 해야지. 주상의 동정을 사려 역심을 숨기고, 주변을 서성거린 것을 내 모를까?”
“저도 어마마마의 자식입니다.”
입에 담지 않았던 말, 스스로 대비의 자식이라 일컬었다. 순간 놀란 대비가 말문이 막혀 도화군을 쳐다만 보았다.
“낳아 주시진 않았으나 저도 어마마마라 부르며 따르는 자식입니다.”
“…….”
“온정을 베풀어 주실 수는 없으시옵니까?”
“이런 방법으로 주상의 마음을 샀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는 아닙니다.”
“하…….”
“지금이라도 주상께 충심을 바치고, 뜻을 물리라 말하세요. 그리해 준다면 내 도화군의 진심을 믿어 줄 겁니다.”
처음부터 이 사람에게 자식이 될 수는 없었다. 도화군은 애써 담담하게 마음을 정리하고 숨을 뱉었다.
“제게는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용상에 앉을 권리는 있고?”
“아마도 어마마마께서는 평생을 가도 형님이 어떤 마음과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을 것이옵니다. 자식을 제대로 품어 주지 않았으니 그 마음을 읽지 못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그런 아드님이 어미를 폐모하여 절로 내쫓겠다고 한답니까?”
이 얘기는 듣지 못했던 것이었다. 도화군이 휘둥그레진 눈빛을 띠자 대비는 기가 찬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모르는 일이라 할 겁니까?”
“형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제가 감히 한 말씀도 드릴 수 없사옵니다.”
“조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겁니까?”
“송구하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고 빌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위 얘기가 나온 이후로 도화군은 달라지고 있었다.
예의를 갖추고 도화군이 밖으로 나가자 대비는 화를 삼키지 못하고, 앞에 보이는 것을 모조리 문 쪽을 향해 집어 던졌다.
* * *
국상을 치르는 동안 도화군은 누구보다 굳건히 강의 곁을 지키며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형제의 우애에 다른 신료들은 눈엣가시처럼 여기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선위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갖는 이들도 생겨났다.
“자경전에서 오는 길이라고 들었다.”
“예, 그런데 형님.”
“말하라.”
“폐모를 입에 올리셨습니다. 사실이옵니까?”
도화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강의 뜻을 물었다. 상소를 정리하고 있던 강은 기운 빠지는 미소를 지었다.
“어마마마께서는 어찌 그리도 내 예상에서 벗어나질 않으시는지.”
“형님.”
“그리 말씀드린 게 맞다.”
하던 것을 멈춘 강이 아무렇지도 않게 폐모에 대해 받아들였다.
“내가 왕위에서 내려오면 어마마마께서는 나라의 안녕을 위해 절에 들어가실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절에 모시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 생각되옵니다.”
“어마마마께서는 절에서 여생을 마무리하실 거다. 기회를 드릴 때마다 번번이 걷어찬 것은 내가 아니다.”
그럼에도 도화군의 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강은 숨을 들이마시며, 강한 기운이 서린 눈빛을 보였다.
“어마마마께서는 결코 조용히 계실 분이 아니시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역적 무리를 동원하여 결국은 네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장담하마.”
“…….”
“너 하나를 위한 결정이었다면, 물렸을 것이다.”
“…….”
“하지만 이건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결단이기 때문에 결코 물릴 생각이 없다.”
정에 치우쳤던 도화군에게 어느새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는 명분이 생겼다. 그래서 강의 말에 더는 아쉬운 마음을 비추지 않았다.
“선위 전에 후궁들에 대해 의논할 게 있다.”
“예, 말씀하시옵소서.”
“알다시피 귀인은 폐출한다는 교지가 내려갔고, 오늘 궐 밖으로 나갈 것이다.”
“허면 두 숙의는 어찌하실 것이옵니까?”
이 물음은 강이 선위를 작정하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뇌었던 질문이었다. 남은 두 후궁에 대한 거취 문제는 강이 마무리 지어야 했다.
* * *
국상 전에 귀인을 폐서인으로 삼겠다는 교지가 내려지고, 후궁이 되며 받았던 인장과 작위를 모두 거두어 갔다.
하여 폐출되어 궐을 나가는 날에는 오히려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도아는 초라한 비녀에 소복 차림을 하고,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오늘은 해가 더디구나.”
넘어갈 듯 넘어가지 않는 해를 바라보고 있을 때 담 너머로 무언의 소리가 들렸다.
“귀인마마.”
속삭이는 듯 작은 목소리에 도아는 궁금증에 담벼락 아래로 걸어갔다.
“누구시오?”
“안 숙의옵니다, 마마.”
“아…….”
목소리의 주인은 나은이었다. 잠시 동안 적막이 흐르고, 요란하게 부는 바람 소리만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잘못……. 잘못했습니다.”
“내가 불쌍해서 그러는 거라면 됐네. 숙의가 이러는 것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니.”
“아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마를 음해하려 가담한 후로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습니다.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 들다니……. 천벌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이제 와 새삼, 됐네.”
우는 소리가 말소리 중간중간 들렸지만 도아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대궐에서 쌓은 인연은 귀하지 않았다.
“없는 솜씨로 만든 것이옵니다. 부디 가엾은 사람이라 여겨 주시고 받아 주시옵소서.”
“응?”
두 사람이 닿을 수 있는 곳은 담 너머, 머리 위로 고개를 들자 자색 보자기가 위태롭게 넘어왔다. 도아는 그것이 바닥에 떨어질까 서둘러 받아 들었다.
“이게 무엇인가?”
“별것 아니옵니다. 그저 제가 평소에 좋아하던 것들이옵니다.”
“…….”
“보잘것없는 것이라 송구합니다.”
좋아하던 것이라면, 나은은 먹는 것을 좋아했다. 도아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보자기를 풀어보았다. 안에는 난생처음 보는 아주 못생긴 과자가 들어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울퉁불퉁 못생긴 과자를 바라보던 도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투박한 것을 집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맛이 없군.”
“도움 없이 혼자 하여 그런 모양입니다. 이렇게라도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내 평생 이렇게 맛없는 과자는 처음일세.”
“송구하옵니다.”
“내 평생 과자를 먹으며 우는 것도 처음이고.”
도아는 입에 맴돌던 것을 삼키고, 올라오는 감정을 잔잔하게 눌러 담았다.
“잘 받았고, 잘 먹겠네.”
“부디 마마에게 평화가 깃들길 바라겠사옵니다.”
대궐에서 지을 매듭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이제 때가 되었다. 도아는 처소에서 쓰던 서안을 손으로 쓸어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미련 없이 전각을 등졌다.
초라한 가마에 몸을 싣고, 손에는 자색 보자기를 꼭 쥐고 있었다. 곧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이 따듯해졌다.
휘잉.
바람이 나부끼는 소리가 처연하게도 들렸다. 도아는 몸에 달지 못하고 손에 들고 온 동심결 노리개를 만지작거렸다.
똑똑.
가마를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가마에 달린 작은 창문이 열렸다.
“나도 안 보고 가려 했소?”
“어?”
작은 문 너머로 희미하게 웃고 있는 강이 보였다. 폐출되어 궐을 나가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가족들과 따듯한 시간 보내시오.”
“예, 배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대를 혼자 두는 일은 없을 것이오.”
이제는 함께 갈 수 없었다. 도아는 나가야 하고, 강은 대궐에 남아야 하는 몸이었다.
“곧 영원히, 함께할 것이오.”
“옥체 보존하세요, 전하.”
“멀리 가는 사람처럼 말하는군.”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늘 곁에 있습니다.”
“곧 몸도 함께할 것이오.”
확신에 찬 말에 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주었다. 이내 창문이 닫히고, 가마가 성문을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바람이 세서 강물이 출렁이는 소리가 나루터에 강하게 박혔다. 달도 숨은 밤, 나룻배 앞에 사내가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벌써 며칠째 해가 뜨고 질 때까지 이 자리에 서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어둠 속 유유히 드러난 얼굴, 그는 인겸이었다.
고요하던 곳에 사람의 기척이 들리자 그는 강하게 요동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앞에 초라한 복색의 젊은 여인과 중년의 여인이 나란히 서 있었다. 비로소 인겸의 얼굴에서 초조함이 사라졌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그대를 기다리는 일은, 내 평생을 써도 아깝지 않습니다.”
바람이 은하의 눈물을 쓸고 지나갔다. 은하는 손을 뻗어서 비로소 꿈속에서만 그리던 사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