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77)화 (78/93)

제 77 화 낙선재, 불타오르다

순식간에 낙선재를 집어삼킨 불길은 용처럼 밤하늘을 수놓으며 하늘로 솟구쳤다. 대궐의 모든 사람이 물동이를 들고 낙선재로 물을 날랐다. 

그러나 불길은 물동이를 마실 때마다 기름을 먹은 듯 더욱 활활 타올랐다. 문제는 불길만이 아니었다.

“전하!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저 불길 안에 중전이 있다는 말이냐?”

“모두가 물을 나르고 있으니 금방 불길이 잡힐 것이옵니다.”

“과인이 지금 묻고 있질 않으냐!”

온몸이 타들어 갈 듯 뜨거운 화염이 둘러싸인 곳에 강이 서 있었다. 내시들과 궁녀들은 붉게 익은 얼굴로 쉴 새 없이 물을 퍼다 날랐다.

“예……. 중전마마께서 미처 화를 피하지 못하신 듯하옵니다.”

화재가 일어났을 당시 낙선재 주변을 샅샅이 뒤졌으나 은하의 행방이 묘연하였다. 이에 대궐 곳곳에 사람을 풀었으나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김 상궁도 보이질 않으니…… 저 화염 속에…….”

그렇다면 저 화염 속에 은하가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알린 상궁이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궐 안 모든 인원을 동원하여 불길을 잡아라.”

“예, 소신이 몸이 날렵한 내시를 소집하여 처소를 둘러보라 하겠사옵니다.”

“저 불길에 들어가란 것은, 죽으란 것과 같다.”

“…….”

“과인의 말이 틀리냐?”

일렁이는 불길을 바라보던 눈길이 이내 상선에게 향하였다. 

“하오나…… 중전마마께서 계시질 안 사 옵니까?”

“강한 사람이다. 몸을 숨기고 보존할 테니 불길이 잡히는 것을 봐야겠다.”

“전하…….”

화염은 모두의 바람과 다르게 쉬이 잡히지 않았다. 이에 내시들이 온몸에 물을 뒤집어쓰고 불길 속에 뛰어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화기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모두 늘어진 채 밖으로 나왔다. 이러다 누군가 죽어야 멈출 듯하여 강이 어명으로 제지하였다.

새벽이 되어 어스름한 기운이 올라올 때쯤 불길이 잡혀 갔다. 강은 우두커니 서서 일각도 한눈을 팔지 않고, 낙선재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까맣게 그슬린 낙선재 안으로 내시들이 들어가 수색을 벌였으나 누구도 은하와 김 상궁의 생존을 기대하지 못했다.

“주상.”

검은 기운이 물러가자 대비 조 씨가 엄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왔다. 

“이 늙은이를 염려하여 아무도 알리지 않아 궐 안의 변고를 까맣게 몰랐습니다. 대체 이 무슨 일입니까?”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낙선재에 불이 났고, 모든 것이 소실되었습니다.”

“중전은, 그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꽤나 걱정하는 말투에 강은 말 대신 눈짓으로 뼈대만 남은 낙선재를 가리켰다. 

“설마…….”

그리고 뒤이어 시신을 발견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천으로 만들었던 들것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까맣게 탄 시신 두 구가 나왔다. 

시신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으나 밖으로 나온 손이 시신의 참담함을 보여 주었다. 대비는 입을 가린 채 고개를 틀었다.

“이 중 중전이 있느냐?”

“송구하오나 육안으로는 힘들 것 같사옵니다.”

“…….”

“소신을 죽여 주시옵소서! 전하!”

기다리고 있던 어의는 참담함에 결국 바닥에 엎드려 죽기를 자청했다. 주변으로 우는 소리가 가득하여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밤새 한자리에 서 있던 강은 눈을 감고 있다가 균형을 잃고 옆으로 기울었다. 그러자 상선이 놀라 부축해 주었다. 

“전하!”

“주상을 대전으로 모셔라!”

그러나 한동안 강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상선에게 의지한 채 서 있었다. 

* * *

궐 안에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으니 도아로서도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낙선재에 일어난 변고였다.

화재 소식을 듣고 전전긍긍 애를 태우던 도아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장독에 정화수를 떠 놓은 채 빌었다. 

“귀인마마.”

손이 닳도록 빌고 또 빌었다. 동이 터 오는 것을 느끼며 불길이 잡히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 무이가 다시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불렀다.

“송구하옵니다.”

감았던 눈을 떠 올려다보자 울고 있는 무이가 보였다. 

“마마는?”

“흐윽…….”

그리 묻자 무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하며 소식을 기다리던 도아를 끌어안았다. 

새벽의 기운은 온전히 가시고, 새 아침이 밝았다. 야속한 햇살은 어느 때보다 환하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 * *

낙선재의 화재 소식을 듣고도 마음 편히 두 발 뻗고 잠을 잔 사람은 대궐 안 청아가 유일했다. 

아침에 눈을 뜬 것도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바람에 일어난 것이었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기침하셨사옵니까.”

“들어오게.”

청아는 한껏 잘 잔 얼굴로 연 상궁을 맞이했다. 

“낙선재는 어찌 되었다던가?”

“불길이 쉬이 잡히지 않아 애를 먹였다고 하옵니다.”

“그래도 대궐에 일손이 얼마인데 그 불 하나를 어쩌지 못했단 말인가?”

“예, 새벽 동이 터 올 무렵에서야 불길이 잡혔다고 하옵니다.”

“쯧쯧.”

청아는 얼굴에 붙어 있는 머리를 정리하며 덮고 있던 이불을 옆으로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전마마는 무고하시고?”

“…….”

“설마하니 마마께서 변을 당하셨을까?”

“모두가 참담함에 말을 잃었다고 하옵니다, 숙의마마.”

참담하다. 이것으로 모든 답이 되었다. 청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중전마마께서 낙선재 화재 사고로 승하하셨구나.”

“전하께서 낙심하시어…….”

“그렇담 이제 교태전이 온전히 비었구나.”

“마마?”

“곧 국장을 치를 것이고, 시국이 안성맞춤이로구나. 잘하면 전하께서 선위하시겠다는 뜻을 물리실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항상 청아의 편에 서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연 상궁이지만 이번만큼은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나라의 국모가 화재 사고로 숨진 상황에 교태전이 비었다며 기뻐하는 형국이라니 사람이길 포기한 듯했다. 

“참, 대전에 전하란 서찰은 전한 것이 맞느냐?”

“예? 아, 아……. 예. 나인을 통해 분명히 전해 올렸사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리 조용하시단 말이냐.”

“…….”

“뭐, 아무렴 됐다. 그보다 중요한 일이 벌어졌으니 우선은 전하께서 선위를 하시겠다는 뜻만 물리면 될 것이다.”

혼자 뭐라 뭐라 중얼거리던 청아는 흡족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소세를 하고 싶다며 물을 내오라 일렀다. 

* * *

부원군 댁은 지밀나인 사건 이후로 절간과도 같았다. 부부인의 무서운 눈을 피하지 못한 부원군은 칩거를 택해야 했다. 

평소와 같이 조용한 절간에 누군가 벼락같이 대문을 두드렸다. 

“어명이오! 어서 문을 여시오!”

문을 부술 기세로 두드리던 관군이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대문 앞을 서성이던 하인이 그 소리에 서둘러 대문을 열어 주었다. 

“부부인 마님! 대궐에서 어명을 가져왔습니다!”

문을 열었던 하인이 서둘러 안채로 달려가 부부인을 불렀다. 어명이라는 소리에 부부인이 체통을 차릴 것 없이 마당으로 달려갔다.

“부원군과 부부인은 당장 입궐하시라는 어명입니다.”

“우리 모두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서두르셔야 하옵니다.”

다짜고짜 동반 입궐이라니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안채로 돌아와 당의를 차려입었다.

“어서 서두르시오, 부인.”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이오?”

“갑작스레 입궐이라니, 그것도 전하의 어명으로…….”

“전하께서 우리 마마를 교태전으로 부르시려는 것이 틀림없소.”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마음이 불안한 부부인과 달리 부원군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하게 걸려 있었다.

“필경 경사스러운 소식일 것이오. 그러니 전하께서 부인과 이 사람을 나란히 입궐하라 어명을 내리신 게 아니겠소?”

“그럴까요?”

“틀림없소. 자, 어서 서두릅시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앞장서는 부원군과 달리 부부인은 창백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 * *

오랜만에 입궐한 부부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지나 교태전 뜰로 들어섰다. 낙선재가 아닌 교태전으로 오자 부원군은 긴장을 풀고 밝게 웃었다.

“보시오. 마마께서 교태전으로 돌아오시질 않으셨소.”

“그러게 말입니다.”

반신반의하며 들어서는데 이상하게 은하가 쓰던 처소가 아닌 곁방으로 두 사람을 들였다. 

“전하.”

곁방에 들어서자 강이 앉아서 두 사람이 맞이했다. 

“간밤에 대궐에 화재가 있었습니다.”

“예?”

“낙선재가 화를 입었습니다.”

웃음을 참고 있던 부원군이 멈칫하고, 고개를 들어 용안을 살폈다. 

“중전께서 미처 화를 피하시지 못하고 변을 당했습니다.”

“송구하오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마마께서 화를 피하시지 못했다니요?”

“많은 이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화마가 거센지라……. 힘드시겠지만 그 사람의 마지막은 보여 드려야 할 것 같아 입궐하시라 했습니다.”

더듬거리며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던 부부인은 입궐하던 순간부터 대궐에서 맡았던 냄새와 어수선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중전은 처소에 있습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부원군을 두고, 부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의녀가 문을 열어 주자 하얗게 둘러싸인 무언가가 보였다.

부부인이 안으로 들어가자 뒤따라 부원군도 함께했다. 한 걸음이 천 년처럼 더디고, 무겁게 느껴졌다.

흐르는 눈물을 따라 곁에 앉았다. 차마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천을 들치고 그슬린 시신의 손을 살포시 잡아 주었다.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부디 극락하십시오.’

다가가 손을 꼭 잡고 눈을 감은 부부인이 누구도 듣지 못하도록 마음속 깊이 빌었다. 

부원군 모르게 은밀하게 전해진 편지 한 장, 부부인은 그것을 받아 들고 형용할 수 없는 눈물에 젖은 미소를 지었더랬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원군은 차마 가까이 오지도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머리를 박고, 숨죽여 울었다. 

자식을 두고 거래를 한 자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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