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 화 낙선재, 불타오르다
강건한 임금이 왕위를 세자도 아닌 배다른 형제에게 선위한다는 소식은 하루도 가지 않아 궐 담을 넘어 백성들에게 퍼졌다.
후궁의 소생인 것도 모자라 유유자적하게 허영과 사치를 부리며 살던 도화군에게 왕위가 넘어간다는 소식에 백성들은 모두 야유를 보냈다.
이것을 짐작이라도 한 듯 강은 말이 돌기 쉬운 투전판에 도화군의 태몽을 퍼뜨렸다. 조금도 보태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말로 옮겼다.
소문은 삽시간에 온 백성들에게 퍼졌고, 태몽을 쉬쉬한 이유로 서자라는 까닭을 들며 도화군에게 있던 편견이 부서졌다.
어느새 백성들에게 도화군은 하늘이 내린 임금이 되어 있었다. 누구도 감히 부정하려 들지 않고, 받아들였다.
* * *
민심을 잠재웠으나 신료들은 선위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러나 대전에 찾아와 강이 사약을 얘기한 후로 몰려오는 일은 없었다.
“도승지는 들으라.”
“예, 전하.”
“귀인의 봉호를 삭탈하고, 폐서인으로 삼을 것이다. 그 처가에 속한 좌상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라 이르고, 식솔들과 함께 낙향하여 여생을 조용히 살 것을 명한다.”
“명 받들겠나이다.”
더는 대궐에 머물 수 없으니 도아를 궐 밖으로 내치려면 폐서인으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좌상의 재산을 몰수하여 나라에 환수시키고, 최소한의 남길 것만 남기게 하라 일러라. 이 정도는 해야 말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교지를 받든 도승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명을 받잡고 대전을 나갔다.
강은 주변을 정리하며 덩그러니 남은 두 후궁에 대해 생각했다. 어찌 됐든 두 여인은 강에게 소속되어 있었다.
“답이 서질 않는군.”
다시금 나은과 청아를 떠올리던 강은 깊은 한숨을 뱉었다.
* * *
대전에서 귀인을 폐출시킨다는 교지가 내려졌다. 소식을 접했으나 이미 알고 있던 도아에겐 어떤 충격도 안겨 주지 못했다.
“평생을 대궐에 묻혀 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떠나긴 하는구나.”
“서운하세요?”
“이상하게 조금도 미련이 남질 않네.”
“전하께서 아시면 서운해하시옵니다.”
어쩌면 그와 함께 떠나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대궐에 미련이 남지 않는 걸 수도 있었다.
도아는 무릎을 구부려 푸른색 치마를 담쏙 끌어안았다. 그러곤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앉아 처소를 훑어보았다.
“어디 안 좋으세요?”
“아니.”
분명 아니라고 했지만 무이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괜히 손을 뻗어 이마를 만져 봤다.
“열은 없으시네요.”
“괜찮대도.”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시니, 걱정이옵니다.”
“젖살이 빠지는 게 아닐까?”
“예?”
“어릴 때는 그렇게 빠져라 빠져라 노래를 불러도 빠지지 않더니 이제야 빠지나 보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농담이었지만 도아는 애써 가볍게 마음을 두드렸다. 그때 밖에서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중전마마!”
무이가 문을 열자 낙선재에 있어야 할 은하가 그 앞에 서 있었다. 도아는 반가운 마음에 은하를 부르며 한걸음에 다가갔다.
“잘……. 잘 지냈는가.”
잘 지냈냐고 말하려던 은하는 불쑥 다가온 도아의 얼굴에 애써 걱정을 숨기고, 말하였다.
“예, 안 그래도 궐을 나가기 전에 마마를 뵙고 싶다고 전하께 말씀을 드렸는데 허락을 해 주신 모양이옵니다.”
“전하께서 어찌 자네의 청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하얗게 야윈 얼굴에 붉은 기운이 서리자 은하는 울컥하는 감정을 숨기고 도아의 손을 잡은 채 자리에 앉았다.
“가기 전에 마마를 뵐 수 있어서 다행이옵니다.”
“그러게 말일세. 우리의 연은 이것이 마지막이겠군.”
“예, 허나 끝은 곧 시작이기도 하옵니다.”
“끝은 시작이라.”
“하나의 매듭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 말에 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곱씹어 보았다. 잡고 있던 손 너머로 따듯한 체온과 함께 감정의 기억이 넘어왔다.
“사람은 태어나 단 한 번의 삶을 삽니다. 가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키며 희망도 없이 살기에는 백 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삶이옵니다.”
“귀인…….”
“이미 한 번 해 보셨기에 그 후회가 어떤 것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마음을 읽었기에 혼란스러움에 갈등하는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도아는 오래전부터 은하의 가슴에 사무친 정을 알고 있었다.
“때로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사람이 있는 것이질 않사옵니까.”
“…….”
“마마께서 부디 후회 없는 삶을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마마의 삶에 한 줄기 빛이 들기를 간절히 소망하옵니다.”
아무 낙도 없이 물처럼 흐르듯 사는 은하의 삶이 안타까웠다. 말을 마친 도아는 어딘가로 가더니 작은 함을 꺼내 들고 왔다.
“무엇인가?”
“이 진주가, 마마의 길을 밝혀 주기를 바라옵니다.”
함을 열자 영롱한 자태를 뽐내는 구슬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도아는 그것을 잘 닫고는 은하의 손에 넘겨주었다.
“내 귀인을 오래도록 기억하겠네.”
“누군가의 기억에 머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옵니다.”
“내 모든 시간을 써서라도 자네의 행복을 빌겠네.”
“망극하옵니다, 중전마마.”
여전히 도아의 손에는 백옥 쌍가락지가 끼워져 있었다. 은하는 그 손등을 두드려 주다가 왈칵 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도아를 품에 안았다.
후궁으로서 첫발을 떼고, 입궐한 날 만난 은하에게서 도아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며 가까이하고 싶은 느낌을 받았다.
가족 외의 사람을 만나 경계 없이 받아들인 첫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대궐에서의 모든 것에 미련이 없던 도아의 마음이, 은하에게만은 달랐다.
‘부디 행복하세요, 마마.’
아이처럼 푹 안긴 품에서 은하를 위해 마음을 빌어 주었다.
* * *
그날 이후로 처소에 갇힌 채 손발이 묶인 청아는 대제학을 만날 수도 없어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날 보게. 내 어떠한가?”
“예? 무, 무엇을…… 말씀이시온지.”
“나는 아직 젊단 말일세! 한창인 나이에 과부처럼 이리 처박혀 살 수는 없네.”
강이 선위를 선포한 날 청아는 거의 기절 직전까지 갔었다. 황당함을 넘은 충격에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물귀신 작전이라도 써야겠네.”
“예?”
“이 서찰을 전하께 전해 드리도록 하게.”
“하오나 전각에 구금되어 있는지라 움직일 수가 없사옵니다.”
“이런 아둔한 사람 같으니. 나인들은 음식이며 옷가지를 들고 왕래를 하지 않는가.”
한참을 자리에 앉아 글을 끼적이던 청아는 그것을 연 상궁에게 거칠게 안겨 줬다.
“서두르시게.”
“예……. 마마.”
* * *
대전에서는 강이 오랜만에 시현을 불러다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정사를 논하지 않는 가벼운 자리였으나 시현의 얼굴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내 예전부터 궁금한 것이 있었네.”
“예?”
“어째서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는가?”
“그, 그것은…….”
“혼기가 차질 않았는가? 게다가 영상의 장남인데 대를 이어야 할 막중한 소임이 있질 않은가.”
갑작스러운 물음에 시현은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말을 더듬거렸다.
“마음에 둔 여인이라도 있는가?”
“송구하옵니다.”
“자네가 귀인을 자주 찾았다는 이야기가 들리더군.”
“전하……!”
날카로운 질문에 시현은 언성을 올리다가 막힌 듯 말끝을 흐렸다. 강은 다정했던 눈매를 지우고 맹수의 눈을 하고 있었다.
“전하.”
“무슨 일이냐.”
물음에 상선이 들어와 서찰을 내밀었다. 청아가 쓴 것을 나인이 전해 들고 왔다고 했다.
“알겠으니 나가 봐라.”
서찰을 펼쳐 읽으니 안에 깃든 내용이 가관이었다. 넘치는 어이에 강은 코웃음을 치며 서찰을 반으로 접어 시현에게 내밀었다.
“예?”
“읽어 보게.”
“소신이 어찌 감히…….”
“자네 이야기니 읽어 보란 것일세.”
다시 한번 강이 서찰을 흔들며 가지고 가길 권했다. 이에 시현이 허리를 숙이고 일어나 서찰을 받아 들고 내용을 읽었다.
「폐서인과 지평이 사사로이 사통을 저질렀습니다. 사가 시절부터 정을 통한 사이로 후궁 간택 이야기가 오고 갈 때 지평이 폐서인에게 청혼을 할 만큼 사이가 깊었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커다래진 시현이 서찰을 든 채 부들부들 떨며 강을 올려다보았다.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선 강은 성큼성큼 다가와 서찰을 들고 있던 시현의 따귀를 있는 힘껏 내려쳤다.
“과인이 모를 것이라 여겼나.”
“…….”
“내 너의 목을 치라 진작 명을 내렸어도 수십 번은 더 내릴 수 있었다.”
시현은 얼어붙은 채 서서 당장이라도 검을 빼 들 것 같은 기세인 강의 눈을 바로 보았다.
“허나 귀인이 한사코 말렸다.”
“…….”
“네 목숨 따위 안타까워서 귀인이 나선 것이 아니다. 너를 죽이면 과인의 가신, 영상을 잃어야 하기에 말린 것이다.”
시현은 물불 가리지 않고 왕의 여자를 욕심내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가문이나 아버지인 영의정을 위한 생각 따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자식의 허물은 곧 부모의 허물이다. 네가 벌인 짓이 세상에 알려지면 네 목숨은 물론 영의정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귀인이 나서서 말린 것이다.”
“소…… 송구……하옵나이다.”
“귀인에게 목숨을 빚졌음을 잊지 말라.”
한쪽 뺨이 시뻘게진 시현이 넋이 나간 채로 고개를 숙였다.
“사가로 돌아가거든 영의정과 논하여 사직 상소를 올리고, 물러나도록 해라.”
“…….”
“물론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사유가 좋을 것이다. 알겠느냐.”
“예……. 전하.”
“죽여 버리고 싶어지니 썩 꺼져라.”
이 말에 거짓은 없었다. 벌레처럼 바닥에 엉겨 붙어 있던 시현이 벌벌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채 펴지도 못하고 대전을 나갔다.
“가만히 있어도 모자랄 판국에 죽여 달라 간청을 하는군.”
강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서찰을 보며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 * *
해가 뉘엿거리며 대궐 안으로 한기와 함께 어둠이 찾아들었다. 곳곳에 스며든 어둠은 모두의 눈과 귀를 가려 주었다.
“저기 저거 보여?”
“날이 추우니 헛것이라도 보이나 보지. 추우니까 얼른 돌아가자.”
“헛것이 아니라! 저 시뻘건 빛 말이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대궐을 거닐던 두 나인 중 한 명이 자리에 서서 저 멀리 어둠 속 시뻘건 빛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이 추워 걸음을 재촉하던 다른 나인이 귀찮다는 듯 말하다가 심상치 않은 말투에 고개를 돌려 같은 곳을 응시했다.
“저기는 낙선재 아니야?”
“으응, 저 빛 혹시…….”
“에구머니! 불이다! 불이야!”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낙선재가 불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