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 화 사약 그리고 선위
겨울의 첫눈이 대궐을 적시고 있었다. 낭만을 즐길 여유가 없는 대궐은 강이 왕좌에 오르고 최악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건강하고 젊은 왕이 아우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경우는 찬탈이 아닌 이상 지난 왕조에서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선위 소식을 들은 대비 조 씨는 뒤로 넘어갔고, 급하게 자경전으로 옮겨져 어의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다.
충격이 꽤나 컸던 모양으로 어의가 급히 손을 쓰지 않았다면 혈이 막혔을 거라며 안정이 최우선이라 말해 주었다.
으슥한 밤이 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대비 곁에 강이 앉아 있었다. 그는 단 한 마디도 건네지 않은 채 싸늘한 시선으로 모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하, 대비마마께서 귀인마마의 전각에서 혼절하셨다고 하옵니다.’
‘귀인의 전각?’
‘예, 또한 뒤따른 엄 상궁이 사약을 들고 갔다고 하옵니다.’
도무지 마음을 쓸래야 쓸 수가 없었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인지 대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눈이 떠졌다.
“깨어나셨다.”
이 한마디가 자경전에 온 후로 강이 꺼낸 첫 말이었다. 이윽고 어의가 들어와 맥을 살피고, 엄 상궁이 준비해 둔 물을 먹이며 목을 축여 주었다.
“모두 나가라.”
대비가 정신을 차린 듯 보이자 강은 처소에 있던 모두를 내보냈다.
“주상께서 미치지 않고 어찌 그런 말을 담을 수 있습니까?”
“태어나 처음 드린 부탁이었습니다.”
“무얼 말입니까?”
“소자가 목숨보다 사랑하는 여인이니 제발 가만히 계셔 달라 그리 애원했는데 결국 사약을 들고 찾아가셨더군요.”
“그 계집이 살아 있으면 주상께서 평안할 수 없을 테니까요.”
“말은 바로 하십시오. 행여나 소자가 옥좌에서 끌어내려져 어마마마의 자리가 위태로워질까 그것을 염려하신 게 아닙니까?”
어의가 안정이 최우선이라 했지만 강은 그런 배려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주상께서 어찌 생각하든 됐습니다. 허나 선위만은 안 됩니다. 내가 죽어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그렇게는 안 됩니다.”
“이미 결단을 내렸습니다. 신료들에게 선포하였으니 절차에 따라 왕위는 도화군에게 넘겨질 것입니다.”
“도화군은 천한 후궁 출신의 애미에게서 나온 서자입니다. 그런 자에게 선위라니, 돌아가신 선왕을 어찌 뵈려고 그런 짓을 벌이는 겁니까? 나는 절대 그 꼴은 못 봅니다.”
처음부터 순순히 허락하리라 생각지 않았다. 어차피 도화군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던 사람이니 동정조차 받지 못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마마마께서 그런 꼴을 보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어마마마를 대궐에 남겨 두면 사사건건 도화군을 음해하고, 그 앞을 막으려 드실 겁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양자를 들여서라도 왕위를 갈아 치우려 하시겠지요.”
“그 말은, 이 사람을 폐모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영명하시옵니다, 어마마마.”
안 그래도 창백하던 대비의 얼굴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갔다. 누가 목을 졸라 죽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강은 차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는 첫눈이 차곡차곡 쌓여 지나가는 사람의 발에 치이기 시작했다.
“백성들에게는 어마마마께서 이 나라를 태평성대로 이끌고, 도화군이 성군이 되어 나라를 잘 살피라는 뜻을 기원하러 절에 들어갔다고 이를 것입니다.”
“주…… 주, 주상……!”
“절대 이 대궐 안에 도화군과 어마마마를 함께 남겨 두진 않겠습니다. 어마마마께서 몸소 스스로 어떤 분인지 보여 주셨으니 갈등하던 소자의 마음이 잘 정리되었습니다. 비구니로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평안하게 여생을 보내시옵소서.”
어릴 때 이후로 강이 이토록 환하게 웃어 준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 미소에 대비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말았다.
“세력을 동원하여 움직이신다면 어마마마 가문의 공든 탑이 무너질 것입니다. 이번에는 절대 허투루 듣지 마세요.”
“…….”
“그럼 쉬시옵소서.”
차라리 정색하고 화를 냈더라면 나았을 것이다. 대비는 그 말에 조금의 허언이나 겁박이 담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 * *
산속의 밤은 민가가 있는 곳과는 공기부터가 달랐다. 평소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으나 소복이 쌓인 눈으로 한결 밝게 보였다.
그중 짚 더미가 수북하게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미세한 움직임 없이 머물던 것이 천천히 들썩이기 시작했다.
거친 기침을 뱉고 짚 더미를 헤집고 나온 것은 사약을 마셨던 란희였다. 피를 토하고 죽은 줄 알았던 이가 버젓이 살아 있었다.
“여기가 저승인가?”
란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옷가지에 묻어 있는 핏자국이 보이고, 옷소매가 바스락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것을 끄집어내자 서찰과 이물감이 느껴지던 치맛자락 안에는 두둑한 돈주머니가 들어 있었다.
“이게 다 어찌 된 일이야.”
추위로 뻣뻣하게 굳은 입으로 중얼거리며 서찰을 펼쳤다.
「널 살린 것은 내가 아니라 네 자신이다. 모두에게 죽은 사람이 되었으니 할머니와 멀리 가서 네 삶을 살도록 해라. 네 앞날에 평안이 깃들기를 바라마.」
추신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도 서신을 도아가 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미약하게 붙어 있던 숨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 역시 도아였다.
“마마…….”
얼어붙은 온몸이 서찰을 꽉 끌어안아 품었다. 빨갛게 얼어 있던 두 뺨 위를 뜨거운 눈물이 적셨다.
* * *
대전으로 찾아오는 이가 수없이 많았으나 강은 누구도 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할 말은 모두 뻔했기에 강경한 뜻만을 전할 뿐이었다.
그러나 영의정만은 달랐다. 그가 독대를 청하자 강은 거절하지 않고, 대전으로 들였다.
“내일 날이 밝으면 부르려 했는데 잘 왔소.”
“전하.”
“소식은 물론 들었을 것이고.”
“모두의 반발이 빗발치고 있사옵니다. 전하께서 후궁의 죄를 대신하여 옥좌에서 물러나심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뜻이옵니다. 또한 소신도 온전히 그 뜻을 받들 수 없사옵니다.”
“처음부터 허락을 기대한 것은 아니라 괜찮소.”
그는 선위라는 엄청난 선택을 한 사람답지 않게 꽤 가벼워 보였다. 몸을 억누르고 있던 무언가에서 해방된 느낌이었다.
“신하들이 왕의 선위에 반발하는 것은 저마다 충성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기방어겠지.”
“…….”
“왕의 옥체에 병환이 깊어 선위를 한다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거두라 엎드리는 자들이 수두룩할 것이오. 지난 왕조가 그러했고.”
“진심으로 도화군마마에게 왕위를 넘기실 것이옵니까?”
“과인은 이미, 세자 시절부터 그러기로 작정을 했소.”
그가 국본의 자리를 내려놓으려 했다는 것은 영의정도 알고 있었다. 그 소란으로 대비가 손목을 긋는 사단까지 났으니까.
“백성들에게도 나 같은 임금보단 도화군을 섬기는 편이 좋을 것이오.”
“도화군마마를 인정하지 못하는 세력도 있을 것이옵니다.”
“그들에게 왕으로서 인정받는 것은 도화군의 몫이겠지. 뭐,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왕을 추대할 수도 있겠지만 과인에겐 다른 형제도 없을뿐더러 그만한 인물도 없소.”
“적통을 내세우는 사대부들이옵니다. 후궁 출생의 임금은 마땅히 배제될 수밖에 없사옵니다.”
“선왕께서 함구하라 명하신 도화군의 태몽을 백성들 사이에 퍼뜨릴 것이오.”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영의정은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지우고 살았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도화군의 태몽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그 소문이 제대로 입을 탄다면 도화군은 하늘이 내린 임금이 되는 것이오.”
“…….”
“민심으로 추대된 왕이라면 저들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오.”
“전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더는 반기를 들지 않겠사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것을 보면 지금은 도아가 나서도 선위를 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의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올리면서 선위의 뜻을 받들겠다는 의미를 비추었다.
“평생을 바라진 않겠소. 그대도 쉴 땐 쉬어야 하니까.”
“예?”
“도화군이 자리를 확고히 잡을 때까지 그대가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주었으면 하오.”
“소신은…….”
“내 직접 경에게 이리 부탁하는 것이니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소신이 전하께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그 길이라면 마땅히 따르겠사옵니다.”
비로소 확답을 들은 강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앞으로 왕위를 이어받을 도화군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 * *
창문을 활짝 열고, 밖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구경했다. 사실 쌓인 눈에는 조금도 시선이 가질 않았다.
인겸이 사찰에서 은하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되었다. 강에게 모든 사실을 듣고도 기다린다는 건 함께하겠다는 의미였다.
‘귀인이 아프다 했으니 전하께서 하루속히 궐을 나가려 하시겠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다가 이제야 눈이 눈에 들어왔다. 하얗게 쌓인 것이 어둠에 가려지지 않았다.
사찰에서 이 눈을 바라보고 있을 그를 떠올리니 마음 한구석이 잔잔하게 젖어 들었다.
* * *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녹초가 된 몸으로 일찍 자리에 몸을 뉜 도아는 생기 없이 바싹 말라 버린 눈을 감았다.
몸속에 있는 수분이 모조리 말라 버린 기분이 들었다. 눈을 감으면 푸른 바다가 펼쳐졌고, 도아는 그 속을 거침없이 휘젓고 다니며 생기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익숙한 듯 느껴지는 손길에도 도아는 꿈에서 깨지 않으려는 듯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기를 한참, 눈을 뜨자 한쪽에 기댄 채 잠든 강이 보였다.
누워서 보는 탓에 삐뚤게 보였지만 그의 고단함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리저리 시달리다가 겨우 쪽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어느새 다가가 앉아 미간을 찌푸린 채 잠들어 있는 강을 구경했다. 그는 매일 도아가 잠든 모습을 이렇게 봐 왔을 거다.
밝은 햇살을 역으로 받고 앉아 있는 그는, 근사했다. 언제나 항상 그러했다.
“다 봤소?”
한참 후에 그가 속닥이듯 말하며 눈을 떴다. 도아는 짐짓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그러지 말라는 소리를 하려거든 안 했으면 좋겠는데.”
“…….”
“어제 온종일 그 소리에 시달려야 했소.”
“그럴 줄 알면서 왜 그러셨습니까?”
“지금이 아니면 평생을 후회 속에 살 테니까. 그러기는 싫었소.”
도아는 차마 하려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강은 정말로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그대를 곧 귀인에서 폐출시킬 것이오.”
“들었습니다.”
“함께 갑시다.”
“…….”
“내가 그대를, 후회 없이 곁에서 지킬 수 있도록 부디 허락해 주시오.”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짧을 것입니다.”
“단 하루라도 그대 곁에 머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오.”
그는 자신의 진심을 보여 주려 도아의 손을 잡아 가슴으로 가져왔다. 강은 왕위에 일말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대를 사랑할 수 있어 내겐 영광이지.”
“…….”
“사랑하오.”
그의 속삭임에, 그를 밀어내려 했던 마음은 허공에 흐트러지고 말았다.
서서히 다가온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며 눈을 감은 채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의 아래 눕혀진 도아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휘몰아치는 파도처럼, 강은 도아의 온몸을 순식간에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