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72)화 (73/93)

제 72 화 대궐에 출몰한 괴물

처소로 돌아가는 내내 서슬 퍼런 기세로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던 강의 시선이 떠올라 청아는 몸을 떨어야 했다.

생전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당장이라도 칼을 들고, 제 목을 그어 버릴 것 같아 온몸이 경직되기까지 했었다.

“대궐이 발칵 뒤집혔다고 하옵니다.”

“그러겠지.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후궁이 인간이 아니었으니 뒤집히는 수준이 아니라 피바람이 불어야 할 것이다.”

“하오나 전하께서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이미 아시는 듯했사옵니다.”

“그래도 소용없다. 어차피 전하께서는 직접 귀인에게 사약을 내리실 것이다.”

그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나인이 밖에서 강이 왔음을 알리려 했으나 도중에 무산돼 버리고 말았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부서질 기세로 열려 버렸기 때문이다. 

“저, 전하…….”

청아는 자리에 앉아 말을 더듬은 채 호수에서 봤던 눈빛을 그대로 들고 온 강을 올려다봤다. 

“건방지게 앉아서 과인을 맞이하는가?”

싸늘하다는 말로는 표현되지 않았다. 강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청아는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보료에서 벗어났다.

“숙의는 감히 귀인을 시해하려 했다.”

“시해라니요? 전하! 소첩이 귀인마마와 실랑이가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모두 실수로 비롯된 일이옵니다. 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호수로 사람을 밀어 놓고, 죽이려는 의도가 없었다? 그 말을 지금 과인더러 믿으라고?”

“…….”

“숙의는 전적이 있지.”

전적, 그것은 과거에 사과로 벌어진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청아는 두려움이 밴 눈동자로 강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에, 진실이 없음을 알고 있다.”

“이미 그 일은 안 숙의가 가담했다고 자백을 하질 않았사옵니까? 소첩은 억울하여…….”

“한 마디만 더 뱉었다간 의금부로 압송할 것이니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것이다.”

“…….”

“제조상궁 들라.”

배려의 의미로 청아에게도 말을 높여 주던 강은 그것을 모조리 바닥에 박아 버렸다. 

“찾아 계시옵니까, 전하.”

“감히 아랫것이 웃전을 능멸하여 하극상을 벌였으니 궐의 지엄함을 보여 줘라.”

“예, 전하.”

청아를 사이에 두고 무언의 지시를 내리자 제조상궁이 일사불란하게 밖에 있던 나인을 불러들였다.

나인 두 명이 들어와서 청아의 양쪽 팔을 각각 붙들어 잡았다. 그 앞으로 제조상궁이 다가가 섰다.

“무슨 짓이냐! 내 아무리 그래도 후궁일진대 한낱 상궁이 내게 손을 댈 수는 없다!”

“송구하옵니다. 소인은 어명을 받드는 몸이옵니다.”

“전하! 전하! 이러실 수는 없사옵니다!”

짜악, 허공을 가로지르는 매서운 소리에 청아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윽고 다시 손이 날아들더니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흰 피부에 따귀로 인해 붉게 자국이 올라왔다. 손찌검은 세 대를 때린 후에야 멈추었다.

“감히 귀인을 시해하려 했으니 숙의는 어명이 있기 전까지 처소에 유폐시켜라.”

“귀인은 모두를 속이고 입궐했사옵니다. 감히 사람도 아닌 것이 전하를 모시며 모두를 속이고 희롱했사옵니다. 어찌 귀인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소첩에게만 죄를 물으려 하십니까?”

“같잖도다.”

강은 눈을 날카롭게 뜬 채 따져 묻는 청아를 향해 다가섰다. 

“과인이 원했다.”

“…….”

“과인이 원해서 곁에 두겠다는데 숙의 따위가 어찌하여 귀인의 죄를 운운하느냐?”

이 말에 반대라도 하듯 대비 조 씨가 열린 문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얼굴이 파리한 것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귀인의 처소에 내관을 세워 모두의 출입을 막으셨더군요, 주상.”

“예,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습니다.”

“그런 주상이 숙의를 죄인 취급하여 유폐시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십니다.”

“숙의는 귀인을 시해하려 했습니다. 중죄를 저지른 죄인입니다.”

“주상의 후궁이기 전에 내 사람이기도 합니다. 어명을 거두지 않는다면 나도 가만히 있진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편을 들어 주는 대비 조 씨를 바라보며 청아는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유폐되었다간 무슨 일을 겪을지 알 수 없었다.

“어마마마.”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사납게 으르렁대던 눈빛은 사라지고, 간곡히 무언가를 애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소자가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에 품은 사람입니다.”

“…….”

“귀인을 소자의 목숨보다 은애하니, 부디 이번만큼은 소자의 이러한 마음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귀인은 사람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귀인이 요술을 부려서 주상을 현혹시켜 놓은 겁니다.”

처음으로 간곡히 청했으나 대비는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현혹되었다 한들 상관없습니다.”

“주상.”

“소자는 지금 귀인을 지킬 수만 있다면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습니다.”

“…….”

“그러니 어떤 수도 쓰지 마세요.”

어떤 마음으로 상대방을 사랑하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감히 어떨지 그 감정에 닿아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숙의는, 당장 의금부에 가두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당장 자진하라 명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냈습니다. 더 참으라 하시면 달리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자진이라니, 청아는 기대를 바라던 눈을 속히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눈을 마주쳤다간 강에게 다시 따귀를 맞을 것 같았다.

“숙의는 근신하며 처분을 기다리도록 해라.”

“……예, 전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하자 강은 바람을 일며 처소를 나가 버렸다. 

* * *

아무리 왕명이 떨어졌다 한들 공개적으로 도아의 치부가 드러난 이상 모두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이 영의정에게 붙잡혀 누각에 앉아 있던 시현도 뒤늦게 숙덕거리는 소리를 듣고, 소문을 접하게 되었다.

“숙의마마가 귀인마마를 호수에 밀었단 말이냐?”

“예, 어디 그뿐입니까? 호수에 빠진 귀인마마가……. 이건 아무리 들어도 도무지 믿기질 않습니다.”

“귀인마마가 뭘 어쩌셨는데?”

“그…… 인어랍니다.”

신료들이 모여 있는 누각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이들은 기함을 했고, 놀라운 사실에 믿지 못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숙의마마가 진정 날 갖고 놀았구나.’

그들의 대화 속에서 청아가 도아와 돈독한 사이라 했던 말이 거짓으로 드러났다. 

“오늘은 그만 퇴청하자.”

“이대로 가셔도 되십니까?”

“전하께서 함구하라 명하신 일을 들추어 봤자 불벼락만 떨어질 것이다. 목숨은 하나이니 잘 간수해야 탈이 없지.”

시현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누각에서 입방아를 찧는 다른 신료들에게 들으라 한 소리였다.

한편, 도총관을 통해 소식을 전해 들은 대제학은 큰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귀인은 보호하려 내관을 세우고, 우리 마마는 전각에 유폐를 시키셨다?”

“지금 상황이 숙의마마에게 안 좋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네.”

“이런 제길. 전하께서 귀인에게 단단히 빠지셨군. 매사 공과 사를 바르게 직시하시던 분이 이런 판단을 하시다니.”

“누가 듣겠네.”

“들으라지. 전하께서 형평성에 어긋난 행동을 하신 건 누가 뭐래도 맞네.”

대비가 나섰음에도 처소에 유폐하라는 어명이 거둬지지 않았다는 건 그 이후 청아에게 어떤 처분이 내려질지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숙의마마가 귀인을 호수로 밀어 버린 것을 본 눈이 여럿이네.”

“이대로 있다간 꼼짝없이 쫓겨날 걸세.”

“흠…….”

“우리 마마가 궐에 안 계시면 안 숙의마마의 안정도 보장받을 수 없네. 지금껏 우리 마마가 대비께 총애를 받은 덕분에 평화롭게 지낸다는 것을 알겠지.”

“이보게. 내 그것을 모르겠는가? 자네가 수만 내면 내 따를 것이니 염려 말게.”

“우선은 우리와 마음 맞는 자들을 모아야겠네.”

곁에서 고개를 끄덕이던 도총관이 가까이 다가가자 대제학은 머리로 그린 계획을 입 밖으로 꺼냈다. 

* * *

저주가 끝났으니 미루고 미뤘던 도진의 혼사를 치러야 했다. 덕분에 부인은 매파를 만나 혼처를 알아보느라 하루를 이틀처럼 쓰고 있었다. 

한창 대화가 무르익어 갈 때 밖에서 도진이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느냐?”

“나가 보셔야겠습니다, 어머니.”

“안에 손님이 계시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네가 이리 수선이냐.”

매파를 돌려보내고, 안채를 벗어나 마당으로 걸어가자 때맞춰 대문이 열리면서 상선과 치열이 함께 들어왔다.

“대감, 이게 무슨…….”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치열은 다급하게 다가오는 부인을 잠시 미뤄 두고, 함께 온 상선을 향해 몸을 틀었다.

“고생했네. 입궐하거든 전하께 내 대신 인사를 전해 주시게.”

“예, 허면 소인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좌의정 대감.”

“살펴 가시게.”

짧은 인사를 마치고, 치열은 가족들과 함께 사랑채로 거동했다. 

“밖에 군사들은 무엇이고, 대감께서 어찌 상선과 함께 퇴청하신 겁니까?”

“놀라지 말고 들으시오, 부인.”

“설마 마마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마 지금쯤이면 대궐에 일파만파 퍼졌을 것이오.”

“그 말씀은…….”

“맞소. 결국은 그리되었소.”

마음을 부여잡고 얘기를 듣던 도진은 탁 하고 기운이 빠지고 말았다. 오래 숨기지 못하리란 것을 분명 모두가 알았는데 이 순간 견디기 힘든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우리 도아는 앞으로 어찌 되는 것입니까? 대궐에 있으니 얼굴을 볼 수도 없고, 그곳에서 홀로 어찌 계실지…….”

“전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소.”

“예? 전하께서요?”

“그렇소.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지.”

치열은 차마 대궐에서 있었던 일을 가족들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모두를 더 큰 고통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나를 보호해 주시려 상선을 대동하시고, 우리 사저에 관군을 배치하심으로 보호를 해 주시려는 것이오. 모두 마마를 위해서 그러신 것이오.”

“신료들의 반발이 거세지면 전하께서도 어찌하실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잠자코 상황에 대해 듣고 있던 도진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전하께서는 마마를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시니 그럴 수도 있겠지.”

“그때가 되면 도아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폐출되겠지.”

“그것뿐입니까?”

“마마를 향한 마음이 깊어 보이시니 신료들에게 밀려 한발 물러나신다면 폐출이 우선이 될 것이다.”

말은 그리했지만 치열도 알고 있었다. 대궐은 냉혹한 곳이었다. 도아를 밀어내야 치열을 파멸시킬 수 있으니 끝까지 몰아붙일 것이다.

“당장은 마마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전하뿐이시다. 전하께 시집을 갔으니 우리로선 할 수 있는 게 없다. 다만, 폐출되어 사가로 돌아온다면 그땐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갈 것이다.”

“억지로라도 끌고 배를 탔어야 했습니다. 소용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후회막급입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니 마음 쓰지 마라.”

간택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치열의 말에 도진은 무겁게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꽉 쥐었다.

치열은 시선을 돌린 채 호수에서 봤던 광경을 떠올렸다. 구경거리로 전락해 수치를 감당하고 있던 모습이 그를 찔러 왔다. 

* * *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채 처소로 돌아온 도아는 한동안 무이에게 의지해 몸을 말려야 했다. 

머리를 길게 내려서 반을 묶고, 잘 다림질된 소복으로 갈아입었다. 그 뒤에 이불 위에 앉아서 무릎을 굽힌 채 두 팔로 끌어안아 얼굴을 묻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저 괴물로 보일 뿐이었어.’

지우고 싶은 기억일수록 뇌리에 박혀 또렷하게 기억되는 법이었다. 도아는 죽을 때까지 가져갈 기억임을 알았다.

그런데 문 너머로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을 묻고 있던 도아는 고개를 들고, 문을 쳐다봤다. 

이 소리는 무이의 것이 아니었다. 낯선 이의 것이었다. 문을 열자 무릎을 꿇은 채 울고 있는 란희가 보였다.

“소인이…… 소인이 그랬사옵니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도아는 텅 빈 눈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해 성사를 늘어놓는 란희를 내려다봤다. 

그러다 무언가 가지러 갔던 무이가 진실을 알고,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바닥에 팽개치고 란희에게 달려들어 손찌검했다. 

“마마가 네게 베푼 온정을 어찌 이리 배반할 수 있어! 이 천하에 나쁜 것!”

“잘못했사옵니다. 대비마마께 그 말씀을 드리고 처소를 나오는 순간부터 후회했습니다. 정말……. 정말입니다.”

“그 말이 다 무슨 소용이야! 너 때문에 우리 마마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기나 해?”

두 사람의 실랑이를 건조하게 바라보던 도아는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됐다.”

“되긴 뭐가 돼요! 이런 것은 이대로 두면 뒤에서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그 아이를 잡는다 해서 세상이 뒤집히진 않아.”

“마마…….”

“손 더럽힐 것 없어.”

그리 말하자 손을 하늘까지 치켜들었던 것이 조용히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란희는 울어서 엉망이 된 얼굴로 도아를 올려다보았다.

“내 너를 진심으로 믿지 않았으니 네게 신뢰를 바란다면 이기심이겠지.”

“마…… 마마…….”

“자경전으로 돌아가.”

“…….”

“대비에겐 너도 장기 말에 지나지 않겠지. 다만,”

“예?”

“네가 그 길밖에 없었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내 너로 인해 호수에서 이미 죽었으니.”

그 말에 란희는 적잖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되레 그런 말을 하고도 도아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가거라.”

말을 마치고 더는 돌아보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란희는 바닥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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