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70)화 (71/93)

제 70 화 대궐에 출몰한 괴물

바람이 일사불란하게 불어왔다. 정처 없이 떠도는 바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무이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도아의 입가에 묻은 피를 보고 얼굴이 파랗게 질린 시현이 말을 더듬거리다가 엉거주춤 서 있던 몸을 주저앉혔다.

“왜…….”

그는 말끝을 흐리며 절규하듯 신음을 토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말했잖습니까.”

“…….”

“나는 죽을 몸이라고.”

쿨럭, 마지막 남아 있던 기침을 뱉자 핏물이 튀었다. 도아는 한쪽에 있던 손수건을 집어서 손바닥에 묻어 있던 피를 닦고, 입가로 가져갔다.

입가에 묻어 있던 피를 닦아 내고 도아는 한숨 돌리듯 말을 아꼈다. 

“지평이 포기하지 않고 앞서겠다면 내게도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전하께 사실을 고하고, 영상이 탄핵당하는 꼴을 봐야 할 겁니다.”

그는 부친을 끌어들이자 흔들리는 눈으로 도아를 멍하니 바라만 봤다. 반면 도아는 조금도 동요치 않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소신에게는 평생 한 번도 눈길조차 두신 적이 없으셨습니까?”

“애석하게도 없었습니다.”

못을 박아 둬야 했다. 이처럼 나약하게 남의 말에 흔들려 집착하는 이에겐 회초리보다 더 좋은 것이 없었다.

“난 오로지 전하만을 섬기며 은애합니다. 내가 후궁이 되지 않았더라도, 지평을 마음에 두는 일 따위 없었을 겁니다.” 

“굳이 칼을 꽂으십니다.”

“정신 차리라 하는 말입니다. 부친이 평생을 바쳐 세운 공을 김 숙의의 말에 휘둘려 멍청하게 무너뜨릴 작정입니까?”

“…….”

“김 숙의가 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지평을 이용한 겁니다. 간악한 수에 놀아나지 마세요.”

바스러질 것 같은 몸을 부여잡은 채 그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한때 도진의 오랜 벗이었고, 어려서부터 봐 온 정을 생각했다.

“가세요.”

그가 울기 시작했다. 그렇다 하여 마음이 쓰인다거나 동정이 들진 않았다. 

시현은 제 얼굴에 묻은 눈물을 거칠게 닦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처소를 나갔다.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무이가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자지러지듯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마! 귀인마마!”

“괜찮아.”

“이 피…… 피가 모두 마마의 것이옵니까?”

“조용히 해.”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보고 무이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떨었다. 괜찮다는 도아가 시선을 돌리자 문 앞에 있는 란희가 보였다.

“어쩐대요. 우리 마마…… 이것을 모두 어쩐답니까.”

“울지 마라. 네 눈물이 강을 이루겠다.”

“소인이 흘린 눈물이 강을 이루고 바다가 되어 마마께서 아프지 않을 수 있다면 평생을 바쳐 울어도 좋습니다.”

“예쁜 얼굴 퉁퉁 붓겠다.”

누구보다 진심인 무이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도아는 눈물을 삼키며 무이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품에 안아 주었다. 

그러다 무이는 기다렸다는 듯 한쪽 어깨가 모두 젖도록 울부짖었다.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던 란희는 조용히 문을 닫고 물러갔다. 

* * *

대전으로 돌아온 직후 강은 곧장 도아의 처소에 어의를 보내고, 상선을 시켜서 의학 서적을 모두 가져오라 명을 내렸다. 

모두 부질없는 짓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스스로를 속이고 싶었다. 

“귀인을 만나고 왔느냐.”

“예, 전하.”

오랫동안 곁에 두어 믿을 수 있는 어의였다. 강은 정신없이 살피던 의학 서적을 내려놓고 어의를 봤다.

“귀인의 상태가 어떠한가?”

“불과 몇 달 전에 마마의 맥을 살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르셨사옵니다. 소신이 수많은 사람의 맥을 짚어 왔으나 이 같은 경우는 처음이옵니다.”

“많이 좋지 않은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몸속의 오장육부가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어의가 할 수 있는 일은 있겠는가?”

어차피 지난밤에 도아의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서 말해 보라. 귀인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는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무슨 뜻인가?”

“소신이 갖고 있는 지식으로는 어떤 방도도 없으시옵니다.”

“그게 어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눈앞의 어의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렸으나 그렇다 하여 수가 나오는 건 아니었다. 

“급격히 기력이 쇠하시어 거동은 물론이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힘겨우실 수 있으시옵니다. 부디 심사숙고하시어 피접을 보내 주심이 귀인마마를 위한 길이 되실 것이옵니다.”

어의는 대궐을 잘 알았다. 항상 시끄럽고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어 아픈 이를 더욱 옥죄는 곳이었다. 병자에게 하등 도움 될 곳이 아니었다.

“누구도 알아선 안 된다.”

“예, 전하.”

“자네가 주관하여 기를 보하는 탕약을 매일 올리도록 해라.”

“송구하오나 전하, 지금의 귀인마마에게는 그마저 몸을 해칠 수도 있으시옵니다.”

“그럼 이대로 손 놓고 멀거니 지켜만 보자는 것인가?”

“차라리 수라간에 이르시어 몸을 보하는 재료로 음식을 드시게 하심이 옳으시옵니다.”

몸에 좋다는 탕약이 오히려 상한 속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는 말에 강은 다시 좌절을 맛보았다.

대체 얼마나 몸이 안 좋길래 탕약마저 쓸 수 없다는 것인지 상심의 끝이 보이질 않았다. 

어의를 내보내고, 쥐고 있던 의학 서적을 모두 옆으로 밀어 버렸다. 정돈되어 쌓여 있던 서책들이 우르르 옆으로 쓰러졌다.

이윽고 한양으로 돌아온 도화군이 문안 인사를 드리겠다며 대전을 찾았다. 오랜만에 형제가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그간 무고하셨사옵니까, 형님.”

“오냐, 길을 재촉하여 서두른 모양이구나.”

“아니옵니다.”

“별저에서 오붓하게 지내고 있었을 텐데 과인이 방해하여 미안하구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그렇지 않아도 한양으로 돌아오려던 참이었습니다.”

민망해하던 도화군이 서둘러 뜻을 전하며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수척해진 강의 용안이 보였다.

“네 얼굴을 잊어버리려던 참인데 잘 왔다.”

“송구하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시옵니까?”

“그저 네가 필요했느니라.”

“형님.”

쓸쓸한 말투에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도화군이 걱정스레 묻자 강은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 형님을 좀 안아 주겠느냐.”

“예?”

“아주 잠시면 된다.”

머뭇거리던 도화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강의 곁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강을 어른이 되고 처음으로 안아 주었다.

붉은 용포에 휩싸인 그는 언제나 넓은 어깨로 강건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런 나약한 모습은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얼마 후 도화군의 품에서 나온 강이 붉어진 눈과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느냐.”

“아우가 형님에게 미력이나마 힘이 될 수 있다면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옵니다.”

“…….”

“굳건히 형님의 곁을 지켜 드릴 것이옵니다. 언제든 부르시면 어디에 있든 형님께 달려오겠습니다.”

“너는 어려서부터 그랬다. 늘 나를 깊이 헤아려 주었지.”

그리 말하며 강은 잠시나마 슬픔을 거두고 웃어 주었다. 도화군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빛을 띤 채 강을 바라보았다.

“도화군.”

“예, 형님.”

“내 너를 믿는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왔으니 별저에서 보고 들은 것을 풀어놓고 가거라.”

“아……. 예, 그리하겠습니다.”

의미를 알 수 없었으나 그 짧은 말속에 묵직한 무언가가 깃들어 있음은 알 수 있었다. 

* * *

내키지 않은 자리였지만 부름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자경전 앞에서 깊은 숨을 내뱉은 치열이 처소에 들었다.

대비 조 씨는 꽤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좌상.”

“찾아 계시옵니까, 대비마마.”

“내 아주 재미난 일이 생겼기에 좌상을 불렀습니다.”

“예?”

당황스러워하는 치열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잡고 싶었던 사람의 목숨을 쥐어 잡고 있다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좌상이 이토록 재미난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사옵니다.”

“천연덕스러운 얼굴이군요.”

“대비마마.”

갈수록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럴수록 치열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귀인 말입니다.”

“예, 말씀하시옵소서.”

“미리 이 사람에게 언질을 주었더라면 후궁 간택에 참여하라 하지 않았을 겁니다.”

“예?”

“말 그대로입니다.”

여전히 치열이 당혹스러워하자 대비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 

* * *

제법 날이 매서워진 탓에 대궐 호수의 물 위로 얇은 얼음이 올라왔다. 늘 이 자리에 서서 호수에 들어가고 싶어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도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무이가 덮어 준 솜이 박힌 장옷을 꽉 쥐어 잡았다. 그러자 뒤늦게 청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 그래도 내 자네를 보려 했는데 이리 자리를 마련했기에 나왔네.”

“예, 소첩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셨사옵니까?”

“입으로 지은 죄는 가벼울 것 같은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구보다 자네가 잘 알고 있을 것이네.”

“소첩은 무슨 말씀이신지 당최 모르겠사옵니다.”

도아의 말 따위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는 듯 청아는 의연한 얼굴을 들이댔다. 

“그럼 그리 살게. 이번 생에서 자네의 죄를 씻지 못한다면 다음 생에 업보를 다할 것이네.”

“소첩을 저주라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이네.”

“그러시옵니까?”

평소라면 얼굴을 붉히고 화를 삭이지 못했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청아는 꽤 여유로운 얼굴로 미소마저 지었다.

“하오면 귀인마마는 떳떳하시옵니까?”

“내 삶에 부끄러움은 없네.”

“음……. 과연 그러시옵니까?”

“날 불러내서 하고 싶었던 말이 이런 것인가?”

언제부터인지 청아가 한 걸음씩 다가와 도아를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게 만들고 있었다. 

“내 앞으로 자네를 상종하지 않을 것이네.”

“귀인마마.”

“비켜서게.”

“마마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속이 보일 듯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 바다와 같이 깊은 눈……. 모든 것이 말도 되지 않을 만큼 완벽했습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청아는 손을 들어서 도아의 까칠해진 피부를 쓸었다. 

“내 두 눈으로 직접 봐야겠습니다.”

“무, 무엇을 말인가?”

“당신의 정체.”

“이보게……!”

청아는 제 앞에 있던 도아를 무신경한 얼굴로 밀쳐 버렸고, 외마디 비명이 허공에 터지면서 도아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귀인마마!”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무이가 화들짝 놀라 달려들자 살얼음이 얼어붙은 호수에 위태롭게 서 있는 도아가 보였다.

“마마! 소인이 가겠습니다! 꼼짝 말고 계시옵소서!”

그러나 제대로 얼지 못한 얼음에는 이미 균열이 가고 있었다. 저만치 호수로 들어가는 입구를 향해 달려가던 무이는 그 소리에 멈칫했다.

“마……마…….”

얼음이 깨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위에 서 있던 도아의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