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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왕을적시다 (69)화 (70/93)

제 69 화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라

창백하다 못해 파리한 안색의 도아는 아무 감정도 깃들지 않은 무미건조한 말투로 조용히 말했다.

“가문의 저주가 끝났습니다.”

기뻐해야 하는데 조금도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듣고 있던 강의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어 댔다. 

“그러니 저주로 태어난 인어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야 한답니다.”

“사라져야 한다니?”

“제가, 곧 죽을 것이라 했습니다.”

“누가 그따위 말을 했느냐!”

“저주를 푼 인어가 죽는 것이, 진정한 저주의 완성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진실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가슴에 품고 혼자 가져가려 했던 것이기도 했다.

강은 마치 누군가 목이라도 조르듯 괴로움에 안색이 질려 가고 있었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죽는다고?”

“예……. 이미 그리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확인하려 바다에 보내 달라고 했군.”

“예, 바다에 가면 모든 것이 확실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궐을 떠나겠다고 한 것이군.”

곁에 있진 않아도 죽은 것보단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다는 생각으로 견디는 것이 나았다.

도아는 자신을 원망하듯 바라보는 눈빛을 애써 외면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조용히 죽으려 했소?”

“…….”

“대답하시오.”

“할 수만 있다면요.”

그렇게 하고 싶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홀로 죽는 것 따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귀인이 진정으로 날 사랑했다면 이럴 수는 없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대가 그러고 떠나면 나는 나대로 그리움에 살 줄 알았소? 나를 고작 그렇게밖에 보지 않은 것이오?”

“전하…….”

반듯했던 용안이 잔뜩 일그러져 고통으로 얼룩졌다. 굵은 눈물 줄기가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그대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나 또한 죽어 갔을 것이오.”

“…….”

“스스로를 죽였을 거야.”

도아는 고개를 내젓다가 한 손으로 강의 입술을 막았다. 어느새 도아의 얼굴에도 그와 같은 눈물이 흥건했다.

“죽겠다는 말 마세요.”

“그대 없이 나만 살라고?”

“전하…….”

“못 해. 안 해.”

“어찌 그런 말을! 전하께서는 만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입니다. 쉬이 목숨을…… 걸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버럭 화를 내 보기도 했지만 강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벌벌 떠는 도아의 손을 붙잡은 강은 품으로 끌어와 안았다.

“그러니 같이 삽시다. 나더러 그런 일 시키지 말고, 같이 살면 되잖소.”

“죽어 가는 사람 때문에 전하께서 삶을 포기해선 안 됩니다.”

“제발……. 같이 살자.”

“그러고 싶습니다. 저도…… 죽도록, 살고 싶습니다.”

가슴팍에 안겨 두 손으로 용포를 꽉 붙든 도아는 애써 삼켰던 눈물을 토해 내고 말았다. 

아이처럼 서럽게 터진 도아의 울음소리에 강은 숨죽여 제 눈물을 흘려 보냈다. 여린 몸이 사라질 듯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그대가 쓰러져 있는 동안 내가 있던 곳은 지옥이었소. 그 시간이 어떤지 알기 때문에 다시 견딜 자신이 없소. 그대 없이는 내가 가진 것은 그저 무의미한 것일 뿐이오.’

그는 차마 말하지 못한 진심을 도아의 울음소리에 묻혀 보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문 너머로 듣지 않으려 해도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평생을 도아에게 바쳐 함께해 온 사람, 무이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무릎을 꿇고 앉았다.

천한 것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갈 새라 입을 꽉 틀어막은 두 손이 필사적이었다. 눈물은 손등을 흥건하게 적셨다.

자경전에 갔다가 뒤늦게 전각으로 돌아온 란희는 죽도록 살고 싶다는 도아의 말소리를 듣고 멈춰 서 있었다. 

“무, 무슨 일이…….”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으나 누구도 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강을 모시는 사람들은 항시 처소에서 떨어져 있으니 소식을 알지 못했다.

눈물을 멈출 수 없었던 무이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가는 어깨가 무참하게 흔들렸다. 

* * *

그리고 엄청난 비밀을 듣게 된 대비 조 씨와 청아는 란희가 가고도 한참 동안 말문이 막힌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안 숙의가 귀인마마를 해하려 했을 때도 요술을 부려서 알아냈을 수도 있사옵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리 자세하게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옵니다.”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대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귀인마마를 저대로 두고 보실 것이옵니까?”

“무슨 요술을 부릴지 알 수 없는 사특한 것을 주상 곁에 둘 수는 없지.”

“어쩌면 전하의 총애를 얻은 것도 비방을 썼을지도 모르옵니다.”

“여인 보기를 돌같이 하던 주상이 귀인을 만나고 안하무인으로 굴던 것이 이상하기도 했지.”

이들에게 인어는 영물이 아니었다. 요사스러운 요술을 부리는 요물에 지나지 않았다.

“감히 이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여식을 후궁으로 입궐시키다니. 좌상이 죽기를 각오한 모양이구나.”

“가만히 둬선 안 될 것이옵니다.”

“가문을 몰살시키고, 좌상의 가솔들을 찢어 죽여도 시원찮다.”

“귀인마마는…….”

“물론 사약을 내려 죽여야겠지.”

살려 둘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당장 죽이려는 기세에 청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만천하에 웃음거리가 되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죽긴 죽더라도 곱게 보낼 수는 없지.”

“…….”

“이를테면 인어를 노리는 이들에게 먹잇감으로 던져 준다면 좋아들 할 것이다.”

바다를 호령하던 인어가 자취를 감춘 것은 사냥꾼들 때문이었다. 인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큰 재물을 불러오는 존재였다. 

지금도 인어가 있다는 제보를 퍼트린다면 많은 이들이 눈이 시뻘게져서 달려들 게 뻔했다.

“생각을 해 봐야겠구나.”

“소첩은 마마의 뜻에 따라 오늘 이 자리에 들었던 것을 함구하도록 할 것이옵니다.”

“오냐, 숙의는 내 명이 있기 전에는 그리하라.”

“명심하겠사옵니다, 대비마마.”

“밤이 깊었으니 그만 물러가게.”

깊은 밤이 되어서야 자경전에서 나온 청아는 입김을 내뿜으며 입을 벌려 웃었다.

‘내 그것의 존재가 오래도록 내키지 않고 찜찜했는데 모두 이 탓이었구나. 내 손쓰지 않아도 알아서 파멸할 존재였구나, 귀인.’

허공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헛웃음을 흘리던 청아는 이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처소로 사라졌다. 

* * *

두 사람에게 가장 길고도 잔인했던 밤이 지나가고, 날이 밝아 왔다. 울다 지친 도아는 그의 품에 아이처럼 안겨 밤을 새웠다.

누가 낫고 말고 없이 두 사람의 얼굴은 까맣게 그을려 사람 몰골이라 할 수 없었다. 

힘없이 그의 가슴에 기대어 있던 도아가 겨우 품에서 떨어져 나와 자리에 앉았다. 마른 낙엽처럼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만 가 보셔야죠.”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그러자 강은 아프게 웃으며 손을 뻗어서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과인이 가면 좀 눕도록 하시오.”

“네, 그리하겠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시오. 과인이 모두 알아서 할 것이오.”

“……뭘 어쩌시려고요.”

도아가 걱정스레 그를 올려다보며 묻자 강은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강하게 빛냈다. 

“들어 보니 서양은 의술이 남다르다고 했소. 이곳 어의들은 모르는 것을 그들은 해박하게 알고 있을 것이니 수소문할 것이오.”

“전하…….”

“서양이 안 된다면 가까운 나라가 많으니 사람을 보내 그대를 살필 수 있는 사람을 데려올 것이오.”

“제 몸은 제가 잘 압니다.”

기대를 걸 수 있는 강의 말에도 도아는 단칼에 잘라 냈다. 어느 의술로도 저주로 죽어야 하는 인어를 살릴 순 없을 것이다. 

“괜한 소문이라도 나면 전하의 처지가 곤란해지십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자는 것이오?”

“전하…….”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이오. 난 이대로 손 놓고 그대를 잃을 순 없소.”

더 이상 흘릴 눈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아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여 버렸다. 

“과인이 믿을 만한 어의를 보낼 것이오.”

“…….”

“무리하지 말고, 쉬시오.”

그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지고 앉아 있는 도아를 바라보다가 처소를 나갔다. 

문밖에는 퉁퉁 부은 얼굴을 숨기느라 고개를 바짝 숙이고 있는 무이가 보였다.

“귀인이 불편하지 않도록 극진히 모시도록 해라.”

“예, 전하.”

“그리고.”

“예?”

덧붙여 말하자 무이가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볼썽사납게 부은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얼굴로 귀인을 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

“많이 울었으니 더 울리지 마라.”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깊은 한숨을 내쉰 강이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향해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던 무이는 이내 젖어 드는 눈가를 소매에 묻었다. 

* * *

밤을 지새운 도아는 어의에게 맥을 보이고, 반나절 동안 자리에 누워 있었다. 따가운 햇볕이 얼굴 위로 비추자 그것을 손아귀에 채워 넣었다.

“무이야.”

“예, 귀인마마.”

“가서 지평을 데려와라.”

“예?”

자리에 앉은 도아는 어깨 아래로 내려온 머리 타래를 넘기며 이불을 걷어 냈다.

“정리할 것이 남아 있다. 네가 다녀오고, 란희를 들여라.”

어리둥절해하는 무이를 보내고, 곧이어 란희가 들어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소세 물을 받아왔다. 

도아는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는 빼놓고, 최소한의 격식으로만 차려입었다. 그러나 동심결 노리개만큼은 품에서 절대 떼 놓지 않았다.

“고생했다.”

“…….”

“네 안색이 반쪽이 됐구나.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예? 아, 아니옵니다. 아무 일도 없사옵니다.”

“나가 봐도 좋다.”

도둑이 제 발 저린 란희가 옷가지를 들고 밖으로 나가자 이윽고 무이가 시현을 데리고 당도했다. 

“찾아 계십니까, 귀인마마.”

“네, 지평과 나 사이에 정리할 것이 있기에 불렀습니다.”

어두운 잿빛 당의를 입어서인지 오늘따라 도아의 안색은 유난히 좋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내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예?”

“이미 진작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마마를 곁에 두신다는 겁니까?”

“승은도 내려 주셨습니다.”

믿지 못하는 시현을 향해 도아는 보란 듯 힘없는 웃음을 흘려 보냈다. 순간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평은 부질없는 짓을 했습니다.”

“소신의 마음을 그리 폄하하지 마십시오.”

“사내로서 가문과 명예를 모두 걸지 않았습니까?”

“예, 오직 마마를 위해서 그리 한 것입니다.”

“허나 어찌합니까. 죽을 사람에게 그런 것은 모두 부질없답니다.”

순식간에 흘러간 말 속에서 시현은 귀신같이 가시 박힌 말을 찾아냈다. 그의 동공이 황망하게 흔들렸다.

“죽을 사람이라 하셨습니까?”

“바로 들었습니다.”

“누가……. 누가 말입니까?”

“나는 보시다시피 죽어 가고 있습니다.”

처소에 들어와서 도아의 안색을 보고 놀라기는 했지만, 이 정도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죽어 가는 시체를 끌어안고 살고 싶습니까?”

“유치한 방법을 쓰시려는 거라면 속지 않으니 그만두십쇼.”

“당신이 뭐라고, 내가 목숨까지 들먹이며 헛수고를 하겠습니까? 믿고 말고는 지평의 몫입니다.”

꼬집듯이 시현은 도아에게 있어 아무 존재도 아님을 일깨워 주었다. 제발 망상에서 깨어나길 바라며 던진 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마음을 꺾지 않는다면 전하께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 지금껏 참아 온 것은 지평의 부친을 봐서 그리한 것입니다.”

“믿기지 않습니다. 아니, 믿을 수 없습니다.”

“내 인내심이……!”

그때였다. 심장에 바늘이 꽂힌 듯 통증이 휩쓸고 지나가더니 갑자기 숨이 멎을 듯 기침이 몰아쳤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됐으니…….”

도아가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하자 놀란 시현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 마마…….”

도아가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자 시현은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 되었다.

“피, 피가…….”

시현의 말에 도아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손 안을 살폈다. 입을 가리고 있던 손 안에 핏덩이가 들어 있었다. 

입가에는 피가 튀어서 얼룩덜룩 묻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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