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 화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라
매섭게 나부끼는 바람보다 서로를 향한 냉랭함이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가겠다며 자리를 피하는 도아를 붙든 강의 눈빛이 싸늘했다.
그러나 그런 강을 쏘아보는 도아의 눈빛도 그에 못지않았다. 다른 후궁과 합방하고 왔으니 태연한 척해도 막상 마주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놓으십쇼.”
바다로 보내 달란 말에 화가 나서 그랬을까? 청아와 합방을 하고 와서 제 살을 만지는 강이 원망스러웠다.
“놓으란…….”
그 순간 싸늘하던 그의 눈빛은 깊은 호수처럼 그윽하게 변하더니 도아를 끌어와 안았다.
“이러지 마시오.”
“…….”
“귀인은 내가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럴 수 없소.”
“…….”
“내 지금 귀인에게 매달려 구걸하는 것이오.”
그의 말에 도아는 품을 벗어나 눈을 쳐다보았다. 깊은 눈에 눈물이 고여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제게 그럴 만한 가치는 없습니다.”
“그대를 사랑하는 사람은 과인이오. 그러니 가치를 둘 수 있는 사람도 나지.”
“…….”
“정 가야겠다면 보내 주겠소.”
그는 다시 다가와 이번에는 조심스레 도아를 안아 주었다. 감싸 안은 그의 두 팔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허나 그대 혼자는 보낼 수 없소.”
“…….”
“내가 함께 갈 것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이번에도 도아가 그를 거부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과인은 이 자리에 큰 욕심이 없다고 했잖소.”
“전하께서는 임금이십니다. 임금이 어찌 궐을 떠나겠다는 말을 하십니까?”
“임금이 아닌 이강이 된다면 가능한 말이겠지.”
“전하……!”
“마음먹은 것은 꽤 되었소. 단지, 뜻하지 않게 중전이 구설에 휘말려 말하지 못했던 것뿐이오.”
그렇다 해도 이는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도아는 고개를 내저어 흔들며 강에게서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처음부터 원치 않던 자리였소.”
“전하.”
“주인이 따로 있으니 물러나야 할 사람은 나였소.”
그는 다시 멀어지려는 도아의 손을 잡아 자리에 세웠다. 강은 어느 때보다 진중한 모습으로 도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 함께 갑시다.”
“…….”
“그대가 가고 싶은 곳이 어디든, 내가 따르겠소.”
그럴 수는 없었다. 같이 간다 한들 함께할 수가 없었다. 도아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 * *
숨을 쉴 때마다 어둠 속으로 입김이 부풀어 올랐다. 한양에서 어명을 가져온 이를 만나고 도화군은 고민할 새도 없이 짐을 꾸렸다.
“한기라도 들면 어쩌시려고 나와 계십니까?”
“부인.”
들어올 생각이 없는 도화군을 따라 나온 군부인이 겉옷을 그의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선이는 잠들었소?”
“예, 잠투정이 없는 아이질 않습니까.”
“그렇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도화군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한양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우신 겁니까?”
“형님께서 이 못난 아우에게 어명을 내리신 적이 없으신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건 아닌지 노파심이 들어서 그럽니다.”
“그렇지 않아도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허나, 별일 있겠습니까?”
“대궐이 아직 어수선할 것인데 이럴 때 내가 돌아가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괜히 한양으로 돌아갔다가 대비 조 씨의 노여움을 사고, 반대파에게 어떤 모함을 듣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서방님의 말씀처럼 아주버님께 형제가 필요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
“그 걱정에, 서방님도 일말의 고민도 없이 한양으로 돌아가겠노라 마음을 돌리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소, 혹시라도 형님께서 미력한 아우나마 필요로 하실 수도 있으니…….”
“예, 걱정은 돌아가서 하셔도 됩니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늘 못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오.”
군부인은 대답 대신 다가가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밖에 오래 서 있어서 차가워진 손등으로 따듯한 손이 덮어졌다.
* * *
으슥한 어둠을 둘러싸고 피어오른 촛불 심지가 타닥거리며 타들어 갔다. 치열은 퇴궐하고 돌아온 이후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문의 저주가 끝났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알 수 없이 덤덤한 얼굴로 말을 전한 도아도 이상하게 여겨졌다.
기뻐하는 기색은 있었으나 묘하게 얼굴에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치열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곧이어 부인과 도진을 사랑채로 불렀다. 그리고 도아에게 들은 것을 그대로 가족에게 전해주었다.
“믿기지가 않습니다. 저주가 풀렸다니…….”
“나도 그렇소. 허나 귀인마마가 그렇다 하니 믿어야 하질 않겠소.”
“예, 이런 것을 두고 농을 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리 말하시며 도진이의 혼사를 서두르라 했습니다.”
부인과 말을 주고받던 치열이 도진을 바라보며 혼사 얘기를 꺼냈다.
“그간 네가 혼인을 차일피일 미뤄 온 것은 그 때문이 아니냐?”
“그, 그것은…….”
“가문의 명맥을 이어 가는 것도 장남의 소임이니라.”
“…….”
“이 아비도 그것이 걸려서 혼사를 강요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걸림돌이 사라지질 않았느냐?”
이미 혼기를 차고 넘치게 미뤄 둔 터라 도진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장남으로 가문을 이어 가는 것도 중차대한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가문에 태어난 여자아이는 모두 돌을 넘기지 못하질 않았소. 그런데 우리 마마는 고비를 넘기면서 잘 자라시어 시집을 가셨으니 오늘 이런 날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 같소.”
“예, 맞습니다. 마마께서 어린 시절을 항상 누워서 보내면서도 강건히 버텨 주셨습니다.”
“그랬지. 도진이도 마마를 곁에서 극진히 살피느라 고생이 많았다.”
눈에 선한 얼굴을 떠올리던 도진은 붉어진 눈시울로 고개를 숙였다. 온 가족이 도아를 보살피고 보호하기 위해 살뜰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이제 우리 마마……. 아프지 않고 건강하시겠지요?”
“부디 그럴 것이오, 부인.”
오직 그것만을 바랐다. 열흘 동안 의식 없이 누워있던 도아를 살피며 부인은 온몸의 피가 마르는 것을 느꼈었다.
* * *
사가에 다녀온 후로 란희의 머리는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 있었다. 가는 실을 쓰고 제대로 말아 놓지 않아 실마리를 풀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쪽을 선택해야 했다. 처음이 그러했으니 양쪽 모두를 붙들고 있다간 스스로를 지킬 수 없어질 것이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란희는 어둠을 밟았다. 밝은 등불을 따라 조용히 전각으로 스며들자 엄 상궁이 보였다.
“대비마마, 귀인마마 처소의 나인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그 아이가 왔느냐?”
“예, 어찌하올까요?”
늦은 시각이었으나 대비 조 씨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청아는 덩달아 눈치를 살폈다.
“들이도록 해라.”
“소첩은 이만 물러가올까요?”
“거리낄 것이 무엇이겠느냐. 있어도 좋다.”
“망극하옵니다, 대비마마.”
이윽고 긴장한 티가 역력한 란희가 기어들어 와 앉았다. 힐끔 고개를 들어 청아를 살피고 몸을 웅크렸다.
“숙의는 나의 사람이다. 개의치 마라.”
“소, 송구하옵니다.”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느냐?”
그 물음에 란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두 손을 꽉 붙잡았다. 이마에는 긴장하여 식은땀이 맺혀 들었다.
“소인, 우둔한 머리로 대비마마께 가르침을 받았사옵니다.”
“흐음, 가르침이라?”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이치라고 배웠사옵니다.”
“그렇지. 내 너에게 가장 먼저 준 가르침이 그것이로구나.”
“예, 하여 소인 감히 몸소 행하려 하옵니다.”
“좋다. 말해 보라.”
재미있다는 듯 실소를 터트리던 대비가 허락하는 의미로 손짓을 보였다. 곁에 앉아 있는 청아도 란희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소인이 알아 온 것이 가치가 있다면 대궐을 나가게 해 주시옵소서.”
“대궐을 나가게 해 달라?”
“예, 재물도 싫으니 그저 궐 밖으로 나가게만 해 주십쇼.”
“오냐, 내 약조하마. 네가 알아 온 것이 나를 동하게 한다면 궐을 나가는 것이 대수겠느냐?”
“지…… 진정이십니까?”
“숙의와 엄 상궁이 증인이 돼 줄 것이다.”
굳은 약조를 받아 냈다. 그러자 란희는 어금니를 꽉 문 채 소매 속에 가지고 온 것을 조심히 대비 앞에 내밀었다.
“보시옵소서.”
“음, 이게 무엇이냐?”
“인어 비늘이라 하옵니다.”
“뭐라? 이게 인어 비늘이란 말이냐?”
“예, 틀림없이 인어의 것이옵니다.”
“인어는 이미 멸종되어 사라지질 않았느냐? 또한 이것이 귀인과 무슨 상관이라고 가져왔느냐?”
면포에 싸인 인어 비늘이 작지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청아는 그것을 뚫어져라 보다가 란희를 응시했다.
“그것은 귀인마마의 것이옵니다.”
“뭐?”
“인어 비늘이 귀인마마의 것이라 말씀 올렸사옵니다.”
“그게 무슨…….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더냐?”
믿을 수 없는 말에 대비는 말을 더듬거리면서 비늘과 란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귀인마마가 인어입니다.”
처소에 있던 모두가 입을 벌린 채 경악을 했다.
* * *
누각에서 내려와 처소로 온 후로 도아는 입을 다문 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강은 처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곁에 앉아 기다렸다.
자정이 되어 가도 도아가 입을 열지 않고 덩그러니 앉아만 있자 기다림에 지친 강이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제주로 갑시다.”
“…….”
“땅은 척박하겠지만 바다는 그곳이 가장 좋다고 했소.”
“…….”
“바다가 보이는 한적한 곳에 집을 지어 난 거기서 그대를 기다리며 살고, 그대는 그곳 바다에서 살면 될 것이오. 어떻소?”
기어이 저를 울리십니다. 도아의 눈에서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울지 마시오.”
“…….”
“왕좌를 놓는 것 때문이라면 결코 그대를 위해서만은 아니오. 대궐을 떠나 조용히 사는 것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삶이오.”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강은 애처롭게 바라보며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도아는 눈을 감은 채 숨을 삼켰다.
“가문의 저주가 끝났습니다.”
“끝나다니?”
“저주의 끝은, 제 정체를 들키고도 진정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저주를 내린 인어는 인간은 결코 그럴 수 없으리라 여겼던 모양입니다.”
불안했다. 저주가 끝났다고 하면서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도아의 모습에 강의 심장이 미칠 듯 뛰어댔다.
“그러니 저주로 태어난 인어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야 한답니다.”
언젠가 도화군이 구해다 준 책 속에서 읽었던 구절이었다.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한 인어는 결국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고 했다.
그 구절을 떠올리며 도아는 자신의 처지를 그리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