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7 화 마음이 돌아서다
대궐과 동떨어진 것 같은 낙선재를 찾아온 도아는 여느 때와 다르게 편히 웃지 못하는 얼굴로 은하를 마주했다.
“무슨 일이 있군, 귀인.”
“소첩이 오랫동안 간직해 온 비밀이 하나 있사옵니다.”
“비밀?”
“예, 가족만이 아는 것이라 남에게 입 밖으로 꺼내 말한 적은 없었습니다.”
강에게 인어를 들켰을 때도 본의 아니게 바다에 빠지면서 말하게 된 것이었다. 오늘 도아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은하를 찾아왔다.
“진실을 아시고, 소첩을 멀리하셔도 마마를 탓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는가?”
“송구하오나 마마, 손을 내밀어 주시겠습니까?”
“응? 내 손 말인가?”
당황하여 되묻는 은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뒤늦게 은하가 손을 뻗자 두 사람의 손이 포개어졌다.
강에게 그랬던 것처럼 도아는 자신의 은밀한 비밀을 서서히 은하에게 환영으로 보여 주었다.
무엇인가를 보고 화들짝 놀란 은하의 동공이 멋대로 뒤흔들렸다. 이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맞잡고 있던 손을 빼 들었다.
“이, 이게 대체……. 내가 본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소첩의 비밀이옵니다.”
“믿기지가 않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놀라게 해 드려 송구하옵니다. 허나 마마에게만큼은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귀인…….”
비밀을 알고 놀란 만큼 그동안 힘들었을 도아를 생각하며 피어오른 연민도 컸다. 은하는 빼냈던 손을 다시 뻗어서 도아의 손을 잡아 주었다.
“가문이 지은 죄로, 죄 없이 희생양이 되었군.”
“…….”
“내 뭐라 위로의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내게 말하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네.”
“마마…….”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는가?”
그 말에 도아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맞잡은 손으로 은하의 거짓 없이 맑은 진심이 전해졌다.
“전하께서 자네를 진심으로 연모하시는 모양일세.”
“…….”
“대궐에 아무리 보는 눈이 많다지만 지금처럼 조심한다면 괜찮을 것이네.”
“정말 그럴까요?”
“대비마마께서 보낸 나인이 눈치라도 챈 것인가?”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그저 평생 그럴 수 있을까 넌지시 걱정이 되어 그러옵니다.”
“그렇기도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전하의 사람이 되었으니 감수해야 할 것이네.”
처음부터 이럴 것을 모르고 입궐한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대궐로 시집을 왔으니 평생 비밀을 가린 채 살아야 했다.
“내 시일을 두고, 교태전에서 믿고 부리던 궁녀를 귀인 처소로 보내 주겠네.”
“마음 써 주시니 망극하옵니다, 마마.”
“그러니 너무 걱정 말게. 지금까지 잘해 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네.”
따듯한 위로의 말에 도아는 다른 말을 숨긴 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곧이어 도아는 오래 머물지 않고 낙선재를 나왔다.
‘지평이 내 비밀을 떠벌리고 다니면 모두들 마마처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건 욕심이었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기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오늘은 청아와 갖는 두 번째 합방일이었다. 이번이야말로 합방 탕약을 발로 걷어차 버릴 줄 알았으나 강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처소에 들자 처음과 달리 단정한 차림으로 주안상 앞에 앉아 있는 청아가 보였다. 아마 그날의 치욕으로 마음을 접은 모양이었다.
“납시셨사옵니까.”
강은 말을 간단히 접고, 자리에 앉아 술을 따랐다. 청아도 나서거나 먼저 말을 붙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숙의는 뭘 위해서 입궐한 것이오?”
“전하의 총애라 말씀드리면 그 역시 믿지 않으시겠지요.”
“그리 순수해 보이지만은 않소.”
“가문의 평안과 권력을 거머쥐려 후궁이 된 것이옵니다.”
“솔직하니 좋군.”
쓸쓸해 보이는 강의 목소리에 청아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처소에 들어올 때부터 미약하게 술 냄새가 풍겼었다.
“소첩이 총애를 포기하고, 권력만을 달라 하면 들어주시옵니까?”
“빈이라도 달란 것이오?”
“주실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갖고 싶사옵니다.”
“오늘은 아주 솔직하군. 포기가 빠르다고 해야 하나.”
“어차피 전하의 마음을 달라 구걸해도 가증스럽다고 여기실 것이 아니옵니까?”
그는 부정하지 않고, 술을 따랐다. 청아는 사실 처음부터 왕의 마음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단지 승은조차 거부당하자 오기가 생겨서 발을 동동 굴렀을 뿐이다.
“전하의 후궁으로 승은조차 받을 수 없다면, 명분이라도 주셔야 할 줄로 아옵니다.”
“…….”
“소첩에게도 뭔가 위안이 되어야 하지는 않겠사옵니까.”
“그것은 과인이 신중하게 생각해 보겠소. 단, 더 이상 대궐에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생각하겠단 것이오.”
“물론이옵니다, 전하.”
그렇지 않아도 나머지 두 후궁에게 적잖게 미안한 마음이 들던 차였다. 강은 고개를 끄덕인 후 술상을 내가라 이른 뒤 보료로 걸어갔다.
이에 맞추어 청아도 입고 있던 의복을 내려놓고 소복 차림으로 이부자리에 앉았다.
“숙의는 대궐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소.”
“……예?”
“그 처지가 퍽 부럽소.”
“취하셨사옵니까?”
“취객의 주사이니 신경 쓸 것 없소.”
말을 마친 강이 손을 내저으며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알 수 없는 그의 말을 곱씹어 보던 청아도 이내 잠을 청했다.
* * *
몸을 숨겼던 해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일찍 일어나 자리를 정리한 도아는 소세 시중을 드는 무이를 살폈다.
“얼굴이 왜 그래?”
“참으로 불공평하옵니다.”
“뭐가?”
“사내들은 마음 따로 몸 따로 그게 되는 모양입니다.”
아마 간밤에 강이 청아의 처소에 간 일을 두고 말하는 모양이었다. 도아는 웃으며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누가 들으면 네 목이 떨어져 나가겠다.”
“치……. 마마는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생각해 봐. 중전마마가 계시는데 내가 후궁으로 입궐했으니 누가 기분 나빠야겠어?”
“그, 그건! 음…….”
“중전마마께서도 아무 말씀 안 하시는데 후궁인 내가 설치면 꼴이 우습지.”
적절한 비유에 무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도아는 잔웃음을 흘리며 머리카락을 넘겼다.
“아버지를 잠시 모시고 와.”
“지금요?”
“응, 아마 조회를 마치고 나오셨을 거야.”
“예, 알겠사옵니다. 마마.”
단장을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치열이 처소를 찾았다. 그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도아를 마주했다.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 모셨습니다.”
“소신에게요?”
“예, 아버지.”
말끝에 붙인 호칭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가문의 저주가 끝났습니다.”
“그게 무슨…….”
“제가 열흘 동안 의식 없이 누워만 있다가 깨어나고, 저주가 풀렸습니다.”
“300년 동안 이어진 저주가, 그리 덧없이 끝났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제가 인어란 것을 아십니다.”
두 번째 타격이었다. 이번에는 좀 더 크고 강했는지 치열이 입을 벌린 채 눈만 끔뻑거렸다.
“바다에서 환영을 보았습니다. 제 처지를 알고도 진심을 다하는 사내를 만나면 이 저주가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마마…….”
“언젠가부터 바다에 가면 과거의 기억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 말을 믿으셔도 됩니다.”
“저주가 끝났다면 이제 마마도 괜찮으신 겁니까?”
저주가 사라졌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도아는 울컥하려는 감정을 눌러 담아 손을 꽉 쥐었다.
“저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대신 앞으로 우리 가문에 태어날 여자아이는 온전히 사람일 것입니다.”
“하오나 마마가 그대로라면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저주가 끝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치열의 말에 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가문의 저주로 잃은 목숨이 몇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이제는 아이를 가졌다 하여 근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른 가문처럼 집안의 경사가 되는 것입니다.”
“마마에게는 아무 일도 없는 것이지요?”
“예, 제게는 아무 일도 없으니 염려 마세요. 아버지.”
행여나 저주가 풀린 것으로 도아에게 해가 갔을까 치열은 그것이 염려됐다.
“오라버니의 혼처를 서둘러 알아보도록 하세요.”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마마.”
그제야 편안히 웃는 치열을 바라보던 도아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바람에 시선을 돌려야 했다.
‘오라버니가 장가드는 것을 볼 수 있을까?’
가슴 아픈 생각에 온몸이 따끔거렸다. 괜히 동심결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며 손에 꼭 쥐었다.
* * *
처소에 들인 화로에서 타닥타닥 숯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은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도아를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도 쉽게 믿기지 않는 비밀이었다. 그리고 숱한 궁녀들 속에 비밀이 얼마나 유지될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대비는 불길한 것이라며 폐출시키고, 가문마저 멀쩡히 두지 않을 것이다. 이건 강의 총애가 있다 하여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동질당할 것이며 인어가 남긴 저주로 태어난 도아를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마마, 전하께서 납시고 계시옵니다.”
“전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강이 들어왔다. 그런데 며칠 전과 다르게 그의 얼굴이 꽤 수척해져 있었다.
“낙선재에서 겨울을 나야 할 텐데 괜찮소?”
“예, 준비를 차질 없이 하여 문제없사옵니다.”
“다행이군.”
“마음 써 주시니 송구하옵니다.”
은하는 말하며 강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다른 때와 다르게 은하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중전.”
“예, 말씀하시옵소서.”
강은 은하를 보지 않고, 타들어 가는 화로를 바라보며 말을 했다.
“무례라 생각해도 묻고 싶은 게 있소.”
“예, 편히 말씀하시옵소서.”
“사찰에서, 그자와 떠날 수 있었을 텐데 어찌하여 그러지 않았소?”
그는 여전히 화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은하는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했으나 이내 어둡게 내려앉은 용안을 보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어쩌면 그것이 마지막이었을지 모르는데.”
“응……?”
“그러자고 했으면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사람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
“설원에 쌓인 눈 같은 사람이라 끝내 그러질 못했습니다.”
대답을 들은 강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화로를 향해 손을 내밀어 따듯함을 만졌다.
“무슨 일이 있으시옵니까?”
“생각보다 과인이, 겁이 많은 것 같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냥 그런 것 같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도아를 두고 하는 말이란 것은 알 수 있었다. 강은 한참 동안 화로에 뻗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 * *
깊은 밤 대궐에는 잠 못 드는 사람이 많았다.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뒤척이며 무수히 많은 밤을 흘려보낼 것이다.
오랜만에 누각에 오른 도아는 바람이 찬 것도 잊은 채 몇 시진째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이, 온몸이 꽁꽁 얼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밟히는 소리에 도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붉은 용포가 흐릿하게 보였다.
“바다 생각에 그러시오?”
차게 식은 말투였다. 감정 하나 붙지 않은 말을 뱉고, 가까이 다가왔다.
퉁명하게 다가온 강은 오도카니 자신을 응시하는 도아의 뺨을 손등으로 만지고 내려놨다.
“얼음이 따로 없군.”
“한기 든 몸으로 감히 전하를 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물러가겠습니다.”
서로 금방이라도 터질 듯 냉랭한 말을 주고받았다. 말을 마친 도아가 자리를 떠나려 하자 강이 팔을 잡아 세웠다.
휘날리는 바람 속에 두 사람의 시선이 싸늘하게 맞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