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6 화 마음이 돌아서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그의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고 있던 도아는 칼날이 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었다.
“소첩이 바다에서 살고 싶다고 하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안고 있던 도아를 품에서 떼 놓은 채 눈을 마주했다. 잘못 들었겠거니, 가볍게 한 말이겠거니 기대했다.
“바다로 보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기대에 찬 사람은 되려 도아였다. 영롱한 눈빛을 반짝이며 바다를 갈망한 채 강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진심으로……. 그걸 원하는 것이오?”
“대궐에 묶인 몸이니 그러면 안 되겠지요.”
“이곳이 답답해서 그렇소?”
“그저 허언이라 생각하시고, 못 들은 것으로 해 주세요.”
말은 다 해 놓고 이제 와 못 들은 것으로 하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작은 호수라도 만들어 주면 괜찮겠소?”
“…….”
“바다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단 나을 것이오.”
“아니요, 되었습니다.”
도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작은 한숨을 토했다. 강은 그 모습에 어찌할 줄을 모르며 안절부절못했다.
“마음 쓰지 마세요, 전하.”
“어찌 그럴 수 있겠소.”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마음 써서 무엇 하겠습니까?”
“…….”
“머리를 내리고 오겠습니다.”
오늘따라 유독 가시 박힌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그 말에 상처받은 강을 두고 도아는 홀연히 처소를 나갔다.
“답답, 하겠지.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
허공에 대고 괜히 주절거렸다. 그렇다고 도아가 남긴 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 * *
단출한 짐을 챙겨 궐을 빠져나온 란희는 부푼 마음을 끌어안고 서둘러 사가로 향했다. 란희의 거처는 한눈에 보기에도 허름한 초가집이었다.
“울타리를 언제……. 누가 고쳤지?”
마지막으로 집에 찾아왔을 때 울타리는 다 쓰러져 가기 직전이었다. 바람만 살랑 불어도 모조리 쓰러질 것 같았다.
“할머니! 제가 왔어요.”
울부짖으며 반가운 마음을 끌어안고, 익숙한 곳으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낯선 아낙네로 보이는 사람과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우리 란희 아니냐?”
“할머니…….”
“대궐에 있어야 할 아이가 어찌 여기에 있느냐? 얼굴 좀 보자.”
“그동안 잘 계셨어요?”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연신 쓰다듬으며 애달프게 걱정했던 마음을 풀어 놓았다.
눈물을 보이던 란희는 이내 진정이 되었는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옆에 앉아 있는 낯선 여인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근데 이분은 누구세요?”
“어서 인사드려라. 우리에게 은인과 같은 분이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럼 편히 얘기 나누세요. 나가 보겠습니다.”
란희의 의문을 뒤로한 채 여인은 들고 있던 빈 그릇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예? 대비마마께서요?”
“그래, 내가 기력이 쇠해서 정신을 잃었는데 그때부터 저 여인이 나를 살뜰히 보살펴 주고 있어.”
“그러셨구나. 할머니가 거동하기 힘들다고 해서 걱정했어요.”
“그랬지. 그래도 매일같이 의원이 와서 살펴 주고 팔자에 없는 호강을 하고 있어서 정말 많이 좋아졌다. 탕약도 빼놓지 않고 매일 먹고 있으니 이 할미 걱정할 것 없다.”
할머니를 살펴 주겠다는 대비의 말을 듣고도 란희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직접 눈으로 살피니 의외의 보살핌에 놀랍기까지 했다.
“혹시 밖의 울타리도 그럼?”
“그래, 그분들이 아니면 누가 저렇게 해 줬겠니.”
“네……. 그래도 할머니가 잘 지내고 계시니 다행이에요.”
“네 덕에 아주 잘 지내고 있다. 그런데 너는 잘 지내고 있는 게야?”
“그럼요. 귀인마마를 모시고 있는데 저를 예뻐해 주세요. 그러니 이렇게 할머니를 보러 왔죠.”
“참 고마운 분들이다. 네가 대궐에서 잘 지낸다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다시 눈시울이 붉어진 할머니는 란희의 얼굴을 연신 쓰다듬다가 이내 품에 끌어안았다. 아직 작디작은 몸이었다.
“어디서든 다른 사람 눈에 밉보이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 알겠지?”
“예……. 걱정하지 마세요. 잘하고 있어요.”
“오냐, 내 새끼.”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는 익숙한 손길에 란희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도아에게 호의를 받고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었으나 집에 와서 대비의 은혜를 보니 마음이 추풍낙엽이 되었다.
* * *
낙선재로 거처를 옮긴 후부터 은하는 체기가 내려간 사람처럼 가벼워졌다. 당의니 봉황비녀니 거들떠도 보지 않고 단정한 차림새를 유지했다.
그렇다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아니었다. 항상 일어나던 시각에 일어나 단장을 하고, 낙선재를 거닐며 산책을 하고 살림을 살폈다.
“어마마마.”
이날은 사찰에 다녀온 후 대비 조 씨를 처음으로 대면한 날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직접 낙선재로 행차해 찾아왔다.
“저런, 중전의 차림새를 보니 내가 다 민망합니다.”
“송구하옵니다. 죄인으로 낙선재에 쫓겨난 마당에 사치를 부릴 수는 없었사옵니다.”
“이 기회에 모두 내려놓기로 한 것은 아니구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은하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대비는 낙선재 처소를 둘러보며 혀를 찼다.
“중전은 현명한 사람이니 이번 추문이 주상에게 어떤 치명상을 입혔는지 잘 알 겁니다.”
“송구하옵니다, 어마마마.”
“주상께서 정이 깊은 분이라 차마 조강지처를 내치지 못하고, 낙선재에 보내는 것으로 그친 겁니다.”
“…….”
“후사도 잇지 못한 자격으로, 주상이 말하지 않아도 제 발로 나가야 사람입니다.”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 죄를 청하던 은하는 알아서 나가란 말에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대비를 응시했다.
“왜요? 기분이 나쁘십니까?”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모든 사람이 신첩에게 손가락질해도 그래선 안 되는 사람이 단 두 명이 있사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신첩의 부친과 앞에 앉아 계신 어마마마십니다.”
결코 입 밖으로 내뱉지 않으려 했다. 찾아와 속을 들쑤셔 놓지만 않았어도 제 흠을 들추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전께서 정신 줄을 놓으신 겁니까? 감히 뉘를!”
“어마마마께서는 이미 신첩에게 혼인할 가문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도 무시하고, 국혼을 감행하셨사옵니다. 아니옵니까?”
“나는 부원군에게 사기를 당한 겁니다. 내 그 사람을 엄벌에 처하지 않은 왕실의 체면을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중전의 작태를 보니 잘못 선택한 것 같군요.”
조금도 눌리지 않았다. 뻔뻔한 대비의 말을 듣고 있자니 웃음이 번질 지경이었다. 은하는 그것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신첩의 부친과 장단 맞춘 일을 결코 모르지 않사옵니다.”
“이보세요, 중전!”
“더는 어마마마께 불경스럽게 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일은 전하의 처분대로 그만 덮어 주시옵소서.”
“아주 잘났습니다. 추접스러운 추문으로 왕실을 더럽혀 놓고 입은 살았군요. 중전은 결코 교태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테니 이 낙선재에 뿌리를 내리거나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겁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중전을 교태전에 앉히진 않을 겁니다.”
폐위는 면했지만, 다시는 교태전으로 돌아가 내명부 수장으로서 지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허울뿐인 이름으로, 후사도 하나 없이, 쓸쓸한 여생을 보낼 테지요.”
“…….”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마마마를 배웅하옵니다.”
악담을 퍼부은 대비는 웃으면서 유유히 처소를 벗어났다. 대비가 가고도 한참 동안 자리에 서 있던 은하는 멀거니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 * *
처소에서 밤을 보내고 도아가 깨기 전에 강이 처소를 나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도아는 언제 강이 갔는지 묻지도 않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어 보였다. 평소처럼 일어나 단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었다.
“란희는 돌아왔어?”
“예, 그런데 어쩌자고 전하의 심기를 거스르셨습니까?”
“내가 언제?”
경대를 펼치고 도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술에 연지를 연신 덧칠하며 붉게 물들여 놓았다.
“다른 사람 눈은 속여도 소인은 못 속이십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전하께 아픈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일부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신 겁니다. 소인의 말이 틀렸사옵니까?”
화려한 뒤꽂이를 들고 이리저리 대보다가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고 꽂아 넣었다. 화려한 비취가 도아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귀인마마!”
“귀청 떨어지겠네. 얘가 왜 이래?”
“소인의 말을 듣고 계십니까?”
“듣고 있어.”
흡족하게 경대를 바라보던 도아는 이내 속상한 얼굴로 잔뜩 일그러진 무이를 응시했다.
“네 생각처럼 내 몸은 기우제 이후로 급격히 나빠지고 있어.”
“그러니 어의를 불러서…….”
“아니, 어의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하오면요?”
“나는, 인어야.”
단 한 번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그 말에 무이는 흠칫 놀란 얼굴로 도아를 응시했다.
“인어는 바다에서 살아야 해. 육지에서 사는 건 아주 잠깐일 뿐이야.”
“하지만 줄곧 육지에서 사셨잖아요. 왜 갑자기…….”
“내 몸이 이젠 바다를 원해. 내가 하늘의 뜻을 어기고, 인력으로 비를 내렸으니 천벌을 받은 것일 수도 있지.”
“마마! 천벌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그건 모두 전하와 백성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뭐 해. 내 몸은 이렇게 시들어 가고 있는데.”
애써 덤덤하게 도아는 제 상태를 읊조렸다. 무이가 울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남의 얘기 하듯 제 일을 얘기했다.
“바다에서 살아야 아프지 않고, 살 수 있어.”
“…….”
“대궐에서 전하를 위해 살아 봤자 평생 아픈 몸으로 빌빌거리며 살아야 해.”
“전하와 떨어져서 지내시는 게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바다에 다녀오고 혈색도 좋아졌고, 가슴을 쥐어짜던 고통에서도 멀어졌어. 이것만 봐도 내 몸이 뭘 원하는지 명백하잖아. 이별이 주는 고통은 잠시뿐일 거야.”
평정심을 되찾은 도아는 무이의 어떤 물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마치 강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하기도 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 가고 싶어. 그것뿐이야.”
오랜만에 한껏 꾸민 도아는 흡족한 얼굴로 경대를 덮었다.
* * *
깊게 잠든 도아를 밤새 바라보고 있던 강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퀭한 몰골을 보이고 싶지 않아 조용히 처소를 빠져나왔다.
그렇게 대전으로 돌아온 후 강은 정무를 보면서도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었다. 해가 지자 기다렸다는 듯 상소를 물리고 술상을 들였다.
곁에 펼쳐 놓은 족자에는 인어 그림이 수려하게 그려져 있었다. 강은 손을 뻗어서 그림을 어루만져 보았다.
이 그림 속의 배경도 바다였다. 지금 도아가 원하는 곳도, 바다였다.
“전하, 도화군마마가 머물고 있는 별저에 보낸 사람이 당도했사옵니다.”
“돌아오겠다고 했겠지.”
“…….”
“다른 말을 남겼으면 들여보내고, 그게 아니면 따로 볼 필요 없다.”
“예,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까칠해진 목소리에 상선이 서둘러 대전을 나섰다. 그러자 강은 다시 잔에 술을 채워 입으로 가져갔다.
‘소첩이 바다에서 살고 싶다고 하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바다로 보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도아가 남긴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바다를 수호하고, 그곳을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던 인어에게 땅에서 살라는 건 인간의 욕심이었다.
“바다를 원하는 것은 그 아이의 권리겠지.”
술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잠재된 성향을 깨운다. 이 때문에 강은 술을 멀리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생각을 멈추고 싶었다.
‘나는 귀인이 없던 때가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이럴진대 너는 내가 없이도 아무렇지 않을 것처럼 말하는구나. 단지 그것이 화가 날 뿐이다.’
이러는 순간에도 도아가 보고 싶어서 가고 싶었으나 바다에 가고 싶다는 말을 듣게 될까 봐 차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