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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왕을적시다 (65)화 (66/93)

제 65 화 귀인마마를 원합니다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을 가로지르며 무리를 한 덕분에 해가 지기 전에 궐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바닥에 가라앉을 듯 어둡기만 한 도아는 제 눈치를 살피는 무이에게 한마디를 남기고 처소로 들어갔다.

“씻고 싶어.”

인사하는 란희를 본 척도 않고 처소로 들어갔다. 란희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무이를 쳐다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향기로 가득 찬 목욕통 속으로 나신을 담그고 앉았다. 차가운 바다와 달리 비린내 없이 향긋한 물은 도아를 찬란하게 에워쌌다.

물속으로 들어가 얼굴을 담그자 바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네 저주가 풀렸구나. 알고 있었느냐?

‘저주가 풀리다니요?’

-네 가문에 내려졌던 황금 인어의 저주가 사라졌다. 그러니 이제 너희 가문은 두려움에 떨지 않고 자손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저주가 사라졌으니 너도 사라질 것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물속에서 숨 쉬는 법을 까먹고 말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던 바다의 말이 떠오른 도아는 눈을 떴다.

-네 몸은 서서히 죽어 갈 것이다.

‘내가……. 죽는 건가요?’

-바다에서 살게 되면 조금 더 살 수 있겠지만 끝이 달라지진 않을 거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꽃 같은 나이에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심장을 쥐어짜듯 온몸을 갉아 먹는 고통이 생명을 뜯어먹고 있었다.

‘네가 없으면, 나도 없고 이 세상도 없어.’

죽음을 지나 돌아온 도아를 끌어안고 아이처럼 울며 강이 했던 말이 떠올렸다. 

‘차라리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까…….’

괴로움에 몸서리치던 도아는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수증기로 가득 찬 허공에 손을 뻗었다.

“이렇게 사라지는 건가.”

수증기가 가득한 허공에 손을 뻗자 연기는 이내 사라지고 없었다. 순간 도화군이 줬다던 인어공주 책의 결말이 떠올랐다.

인어는 좌절감에 바다에 몸을 던졌고, 이내 거품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하……. 하하!”

허공을 향해 실성한 듯 한참을 웃었다.

* * *

한창 가뭄으로 허덕이고 있을 때 도화군은 사람을 통해 서찰을 보내왔다. 별저가 있는 곳의 상황이 소상히 적혀 있었다.

끝에는 인사도 없이 떠나 송구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경황이 없어서 답신을 하지 못한 것이 떠올라 꺼내 보고 있었다. 

“도화군 별저로 사람을 보내라.”

“예?”

“가서, 이제 한양으로 돌아오라고 해라.”

명을 받아 든 상선은 예기치 못한 뜻에 당황한 듯했다. 강은 한 번도 도화군이 하는 일에 이래라저래라 말을 놓은 적이 없었다. 

“뭘 그러고 서 있느냐?”

“예? 아, 아……. 송구하옵니다. 소인이 곧장 사람을 보내겠사옵니다.”

“그리고 귀인의 처소에 사람을 보내도록 해라.”

“예, 전하.”

사람을 보내려 했으나 문 앞에 이미 무이가 당도해 있었다. 양손에는 약밥을 가득 들고, 대전에 들었다.

“귀인은 무사히 입궐했느냐?”

“예, 귀인마마는 한 시진 전에 입궐하여 조금 전에 자리에 들었사옵니다.”

“잠자리에 들었단 말이냐?”

“예, 무척 고단했던 모양이옵니다.”

서운한 기색을 내심 숨기려는 강을 향해 무이는 들고 온 것을 내밀었다.

“귀인마마가 어제 손수 만들어 놓은 약밥이옵니다. 오늘은 고단하시어 약밥으로 대신하겠다며 소인에게 전해 드리라 했사옵니다.”

“말을 타느라 고단하기도 했겠지. 약밥은 잘 먹겠다고 전하고, 내일 과인이 찾아가겠노라 전하도록 해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오냐, 너도 그만 가서 쉬도록 하라.”

공손히 자리에서 일어난 무이가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자 상선이 약밥이 든 소반을 가져가 서안에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자 아기자기하게 모양이 잡힌 약밥이 보였다. 강은 기미 상궁이 맛을 보기도 전에 하나를 집어 냉큼 입에 넣었다.

“전하!”

“맛있구나.”

“기, 기미를 하고 드셔야 하옵니다.”

“상선도 하나 주랴?”

“엇! 그러시다면 염치 불고하고 소인도 하나만…….”

도아가 주는 건 누구와도 나누지 않던지라 상선이 냉큼 호의를 받아 들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니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마음 바뀌기 전에 어서 가져가거라.”

한입 크기의 약밥을 집어서 상선에게 내밀었다. 망설이던 상선이 그것을 집어 들고 뒤를 돌아 입에 넣었다.

“예쁜 사람이 솜씨도 예쁘질 않으냐.”

그 모습을 보던 강은 흐뭇하게 웃다가 다른 약밥을 다시 집어 입에 넣었다. 

* * *

며칠이 지나도록 분을 삭이지 못한 청아는 시도 때도 없이 눈앞의 물건을 상궁에게 집어 던지고, 밥상을 들어 엎는 하극상을 보였다. 

부친 앞에서 도아에게 따귀를 맞은 것도 화가 났지만, 모욕을 받으면서도 맞설 수 없던 제 처지에 더 화가 났다.

‘마마, 뭐라도 해 보려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는 영의정입니다. 한낱 신하 따위가 아닌 전하의 신뢰와 총애를 받는 영의정이란 말입니다. 그런 이를 상대로 이러시는 건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부디 자중하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허면 이 일로 가문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마, 마마…….’

‘다 잡은 물고기를 쉽게 놔줄 순 없습니다. 아무리 영의정이라 한들 자식이 왕의 후궁과 염문이 난다면 사지가 묶일 겁니다.’

대제학마저 도아의 말을 따르라 말하니 노기가 몸을 뒤덮었다.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맞은 뺨이 아렸다.

“어서 오세요, 지평.”

“송구하오나 당분간은 마마의 부름을 받을 수 없사옵니다.”

“저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시현은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해 주었다. 청아가 흠칫하며 할 말을 찾고 있을 때 시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마마, 소신에게 하신 말씀들 정녕 믿어도 되는 것이옵니까?”

“참으로 딱하십니다.”

“예?”

“귀인마마는 가문에 묶여 있는 몸입니다. 그런 분이, 스스로의 의지대로 사는 게 가능하다고 봅니까?”

떨리는 것을 애써 숨기며 차분하게 말했다. 혀를 끌끌 차며 한숨을 내뱉으며 힐끗 시현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다지만…….”

“어쩌실 겁니까?”

“예?”

“그래서 앞으로 어쩔 생각이냐 묻는 겁니다.”

사랑에 눈이 뒤집히고, 생각이 마비된 사내를 청아는 빤히 쳐다보았다. 

“전부 버릴 생각입니다.”

“버리다뇨?”

“가문, 지위. 모두요.”

“쉽지 않은 길일 겁니다. 귀인마마의 의중은 확고할 수도 있습니다.”

“허나 그렇게 만들 생각입니다.”

이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까? 청아는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시현의 생각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렴 괜찮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정신병자 같은 사내의 생각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팔푼이 같은 사내의 집착에 무너질 도아의 모습이 기대될 뿐이었다. 

* * *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창가에 앉아 찬 바람을 맞고 있던 도아가 란희를 불렀다.

“귀인마마.”

뒤에서 모기 목소리만 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도아는 창밖 풍경에 눈을 둔 채 푸석하게 마른 입술만 열었다.

“할머니가 홀로 사신다고 들었다.”

“예? 예, 그러하옵니다.”

“너를 입히고, 씻기며 살뜰하게 키워 주셨겠지.”

갈라지는 목소리 사이로 슬픔이 묻어 있었다. 란희는 도아의 정체를 알게 된 후부터 두려움에 가까이할 수 없었다. 

“오래는 안 된다.”

“예?”

“무이에게 들었다. 네 사정.”

“괜한 일로 마마의 귀를 더럽혔으니 송구하옵니다.”

“다녀오너라.”

할머니를 만나러 가라는 말에 란희의 작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아는 겨우 고개를 돌려서 란희를 응시했다.

“오늘 나가도록 해라.”

“정말 다녀와도 되는 것이옵니까?”

“그래, 술시를 넘기지 말고 다녀오도록 해라.”

“어, 어……. 마, 망극하옵니다. 마마.”

“나가 봐라.”

말을 마친 도아는 거듭 감사 인사를 하는 란희를 무시한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놨다. 

일어나서 처소를 나가려던 란희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항상 생기 넘치던 주인이 시들어 가고 있었다. 

* * *

노을이 스멀스멀 올라올 기미가 보이자 도아는 단장에 들어갔다. 창백한 피부 위로 분을 칠하고, 마른 입술 위로 연지를 지그시 칠했다.

연분홍 저고리로 갈아입자 기다렸다는 듯 강이 반가운 얼굴로 처소에 들었다. 도아는 그런 이에게 한껏 웃어 주며 반겼다.

“어제는 잘 쉬었소?”

“예, 대전으로 약밥을 보내고는 기절을 했습니다.”

생기 있게 칠한 입술이 한껏 웃자 강은 따라서 웃으며 한쪽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전하와 함께 바다에 갔을 때도 그러했는데 참으로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음 그것이 무엇이오?”

“바다가 주는 몸의 평화가 있습니다.”

“몸의 평화라……. 과인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강이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도아는 아련하게 웃으며 품에 파고들어 안겼다. 한쪽 얼굴을 기대니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바다의 냄새를 맡으면 몸속에 새로운 피가 돌고, 제가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저 바다에 가까워지는 것만으로 몸에 생명이 차오르는 것 같은……. 전에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생겼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듣는 이가 어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점차 강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져 가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주는 평화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 말해도 이해해 줄 수 없는 그런 것이지요.”

“그랬군. 이번에 바다에 다녀온 것이 퍽 좋았던 모양이오.”

“네, 바다를 헤매다 보면 더 멀리, 멀리……. 내가 닿지 못한 곳을 향한 갈망이 피어납니다.”

마치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는 말로 들렸다. 이제 그의 얼굴에선 웃음기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하.”

“말하시오.”

“소첩이 바다에서 살고 싶다고 하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심장을 칼로 찌르는 통증을 느끼며 강은 급하게 제 품에 기대고 있던 도아를 바로 세워 앉혔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믿기지 않는 듯 고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도아는 강의 심장에 반쯤 들어간 칼날을 양손으로 꽉 쥔 듯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바다로 보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문득 도아가 오랫동안 누워 있을 때 되새겼던 약속이 떠올랐다. 궐을 떠나길 원하면 그렇게 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반절 정도 박힌 칼날을 완전하게 심장에 꽂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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