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 화 귀인마마를 원합니다
화려한 대궐의 전각들 틈 속에 낙선재는 마치 다른 공간인 듯 새롭기만 했다. 이곳에 처음 와 보는 도아는 한동안 주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궐 밖 사가 같구나.”
“그러게 말이옵니다. 대궐 안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대꾸하는 무이의 말에 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처소에 들자 가장 놀랐던 것은 은하의 행색이었다. 교태전에서와 달리 첩지며 비녀, 당의를 벗어 놓고 평범한 아녀자처럼 차려입고 있었다.
그러나 왜일까? 교태전에서 쫓겨난 사람이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에 녹아든 듯 편안해 보였다.
낙선재로 거처를 옮긴 후 후궁들의 문안은 하지 않도록 되었다. 그럼에도 도아는 평소와 같이 찾아와 절을 올리고 앉았다.
“그간 잘 지냈는가?”
“예, 마마께서는 소첩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시옵니다.”
“그리 보인다니 다행일세.”
창호지를 뚫고 새어 들어온 햇살은 포근하기만 했다. 은하는 직접 자를 잔에 따라서 도아에게 건네주었다.
“내 것이 아닌 듯 짊어지고 있던 것을 내려놓으니 홀가분하네.”
“…….”
“무책임한 말이지.”
“정말 괜찮으시옵니까?”
잔을 든 도아가 걱정스레 묻자 은하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내게는 잊지도, 묻지도 못한 사람이 있네.”
“…….”
“소문대로 조부모들 간에 약조로 이루어진 정혼이었네. 내가 어머니 배 속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맺어졌으니 어지간히 오래도 되었지.”
천천히 이야기의 포문을 연 은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마치 그날 그 자리에 있는 듯 아련한 눈으로 말을 이어 갔다.
‘죽어서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그분이구나.’
“어릴 때부터 혼인할 사람이 정해졌다고 부모님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씀하시니 어느 날은 도대체 그 도령이 누구일까 궁금해졌지. 아직 시집을 가려면 한참 남았는데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결국 그 댁의 담을 몰래 훔쳐보았네.”
그날의 일은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기만 했다. 은하는 그리 말하며 입으로 손을 가린 채 부끄럽게 웃었다.
“별채에 앉아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글을 읽고 있는 도령을 보았네. 곁에 있던 하녀가 저분이라 했고, 순간 눈이 마주쳤지. 어찌나 놀랐던지 가슴이 터질 듯 벌렁거렸네. 뒤로 자빠져서 바닥을 뒹굴고 있을 때 도령이 한달음에 달려와 괜찮냐고 묻더군.”
“마마께서 그런 짓궂은 면이 있으신 줄 미처 몰랐사옵니다.”
“그렇지.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때부터였던 것 같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도아가 의아해하자 은하는 눈을 맞추며 가슴 아프게 웃었다.
“내 평생의 정인을 만난 것이지.”
“…….”
“내가 그분에게 첫눈에 반했네. 내가 먼저 찾았고, 먼저 마음에 품었지.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나고 싶다며 연서를 보낸 것도 내 쪽이었네. 그리고 딴 사내와 혼인을 하겠다며 그를 벼랑 끝으로 밀어 버린 것도……. 나였네.”
결국 끝은 고통이었다. 은하는 오랫동안 말한 탓에 갈증이 났는지 차로 입술을 적셨다. 차오른 감정이 사르르 내려앉았다.
“국혼은 마마께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사옵니다. 마마의 탓이 아니옵니다.”
“그분이 내 손이라도 잡고, 도망가자고 해 주길 기다렸네.”
“마마…….”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도 내가 도망가자고 나설 것을 그랬네.”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 속이 멀쩡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고요함이 흘렀다.
“언젠가 편안하게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가슴속에 묻어 둔 말을 꺼내 보고 싶었네.”
“잘하셨습니다. 오늘 들은 말은 모두 이 자리에 두고 갈 것이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이러고 있으니 묻지도 못하는 것 같아서 그랬네. 말하고 나니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군.”
이에 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새 식어 버린 잔을 꽉 쥐었다. 은하의 신뢰로 들은 비밀 이야기가 양심을 쿡쿡 찔렀다.
그러나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아 얘기할 수가 없었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 * *
마치 어린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부모처럼 영의정은 어디를 가나 항시 시현을 주시했다. 그러나 궐에서 그림자처럼 감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때로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도아를 찾아가지는 않았을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직 상소를 올리라고 하자니 그간의 허송세월이 눈앞을 가려서 입이 떨어지질 않으니 문제였다.
“휴…….”
퇴궐을 하고 사저로 돌아온 영의정은 시현을 곁에 끼고, 사랑채에 앉았다. 서책을 펼쳐 놓긴 했지만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저만치 서안을 펼쳐 놓고 태평하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서책을 보고 있는 시현이 보이자 황당하기만 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귀인마마 처소를 찾아가선 안 된다.”
“…….”
“내 말하고도 이같이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걱정이구나.”
“송구합니다, 아버지.”
“네 행실을 반성하며 하는 말이냐?”
그 물음에는 입을 굳게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이러니 영의정의 속에서 천불이 나고, 한숨만 나오는 것이다.
“사내라면 대의를 위해서 작은 것은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제게는 대의가 귀인마마라면 어찌합니까?”
“너……!”
“그렇다면 마마를 위해 제가 가진 전부를 내려놓으면 되는 것입니까?”
“그분이 왕의 후궁이 아니었더라도 이미 혼인한 아녀자를 탐내선 안 된다는 것을 네 정녕 모르느냐?”
막무가내로 떠들던 주둥이가 그제야 조용해졌다. 영의정은 손으로 이마를 가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부자가 나란히 사직 상소를 내고, 낙향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건……!”
“뭇매를 맞으며 자리에서 내려오느니 내 스스로 내려오는 게 낫지.”
“…….”
“못난 놈.”
정신을 차린 아들놈을 궐에 들인 일을 이렇게 후회할 줄이야. 영의정은 제 발등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찍어 눌렀다.
* * *
낙선재에서 나온 도아는 깊은 생각에 잠겨 대궐 안을 한참 동안 거닐었다. 이윽고 발길이 당도한 곳은 청아의 처소였다.
후궁으로 입궐하고 한 번인가 와 보았을까? 생소하기만 한 전각을 훑어보다가 안으로 들어가자 연 상궁이 황급히 나와 맞이했다.
“귀, 귀인마마.”
“놀라기는. 안에 김 숙의 있는가?”
“예, 그런데 대제학이 들어 계시옵니다.”
“아……. 그래? 마침 잘되었군.”
“예, 예?”
안에 대제학이 있다는 말에도 도아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당황해하는 연 상궁을 뒤로하고 문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섰다.
“숙의마마, 귀인마마께서 뵙기를 청하시옵니다.”
잠시 기다리니 안에서 문이 열렸다. 청아가 꽤나 놀란 얼굴로 맞이하자 도아는 말도 없이 처소에 들었다.
“대제학이 계시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이제 막 일어서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럼 이만…….”
“아니요, 아무래도 함께 듣는 것이 대제학에게도 이로울 것입니다.”
“예? 이롭다니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웃고 있는 얼굴이 마치 분노를 감추려는 것 같았다. 도아는 상석에 앉지 않고, 서 있는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대제학께서 학문이 깊으시고, 박학다식하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습니다. 하여 대제학의 여식도 그러하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귀인마마! 어찌 그런 무례한 말씀을 하십니까!”
“자네가 내게 그런 말 할 처지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러시옵니까? 무슨 일이기에 소첩의 아버지를 앉혀 놓고 이리 무지몽매한 일을 벌이시옵니까?”
아무래도 부친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하니 청아의 자존심이 퍽이나 상한 모양이었다. 언성을 잔뜩 높이며 얼굴까지 잔뜩 붉힌 것을 보니 말이다.
“무지몽매하다? 그리 사리 분별 바른 사람이 어찌하여 지평을 만났는가?”
“그, 그, 그건…….”
“지평에게 뭐라 지껄이든 내 상관할 바 아니지만, 나에 대한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어찌하여 그랬는가?”
“소첩은 모르는 일입니다.”
도아는 한달음에 청아의 앞으로 다가가 손아귀를 움켜잡았다. 힘껏 잡은 손목을 통해 청아가 시현을 만난 일이 전해졌다.
“왜 이러십니까! 이거 놓으십시오!”
찝찝한 기분에 서둘러 손아귀를 빼내자 이번에는 따귀가 날아왔다. 이런 상황에도 대제학은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자네는 언젠가 입으로 행한 벌을 달게 받을 날이 올 것이네.”
“아무리 마마의 품계가 소첩보다 높다지만 이토록 모멸감을 줄 수는 없으시옵니다.”
“끝까지 이런 태도로 일관하시게. 그래야 지은 죄가 늘어나지.”
“내 오늘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뭐 뀐 놈이 성낸다더니 딱 그 짝이로군.”
빨갛게 부어오르는 뺨을 쥔 채로 악담을 퍼붓던 청아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던 도아가 시선을 대제학에게 돌렸다.
“지평은 영의정 대감의 외동아들입니다. 그런 이를 상대로 숙의가 겁도 없이 날뛰었으니 이젠 대제학과 영의정 대감이 척지는 일만 남았습니다.”
“…….”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대제학이 나서는 게 좋을 겁니다.”
말을 마친 도아가 거침없이 처소를 나가 버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대제학이 험상궂은 얼굴로 눈물 바람인 청아를 노려봤다.
“대체 무슨 짓을 벌이신 겁니까!”
* * *
낙선재에서 보내는 나날은 평화롭기만 했다. 오가는 일들은 교태전에 배정된 궁녀들이 전부였고,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한가해 보시오, 중전.”
나와서 뜰을 거닐고 있을 때 강이 찾아왔다. 은하는 오랜만에 보는 그를 향해 반갑게 웃어 주었다.
“오셨사옵니까, 전하.”
“사찰에 가 있으라 보내 놓고, 이런 일을 벌이게 되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
“신첩이 교태전으로 돌아가면 힘들어할 것을 아시고, 한적한 낙선재를 거처로 옮겨 주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없어도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은하의 말에 강은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사찰에 마음을 써 주셨더군요.”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음……. 괜찮았소?”
“전하의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마음이 놓이니 살 것 같사옵니다.”
“그리 생각한다니 다행이군.”
서로 콕 집어서 말하지 않았지만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 알고 있었다.
“빚을 갚은 것이오.”
“빚이요?”
“일전에 귀인에게 우리 사이에 대해서 말해 주지 않았소.”
“아…….”
“그것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해 주면 될 것이오.”
“예, 마음 깊이 감사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것까진 없고.”
강은 웃으며 등불로 밝혀진 뜰을 눈으로 둘러보았다. 마치 대궐에 아닌 다른 공간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그는 당분간 그곳에서 지낼 것이오.”
“그렇군요.”
“일이 완전히 일단락될 때까지는 그럴 것이니 마음 놓아도 되오.”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을 것입니다.”
“이젠 서로 갚을 빚은 없소. 날이 차니 들어갑시다.”
춥다며 몸을 떨고 앞장서서 들어가는 강을 쳐다보던 은하도 이내 그 뒤를 따랐다.
* * *
이른 새벽의 공기는 사뭇 달랐다. 시리고 차갑고 안개 냄새까지 더해져 오묘한 향기를 자아냈다.
머리를 질끈 올려 묶은 도아는 새벽안개를 밟으며 거침없이 말을 달렸다. 강의 허락을 받고, 바다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오늘은 무이와 호위를 해 줄 무사를 대동하여 가고 있었다. 강은 함께 가지 못해서 아쉽다며 미안한 마음을 비추었다.
여린 몸에서 이런 체력은 어디서 나오는지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도아는 쉬지 않고 달린 끝에 오래 걸리지 않고 바다에 당도할 수 있었다.
무사를 저만치 세워 두고, 무이와 함께 항상 옷을 갈아입던 바위로 왔다. 크고 널찍한 바위에 앉아 껴입은 옷을 벗었다.
“너무 오래 계시면 안 돼요. 아시겠죠?”
“으응,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몸조심하세요, 마마.”
“다녀올게.”
마지막으로 위로 질끈 올려 묶었던 머리를 풀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숨이 차오르고 바다의 짙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매끈한 두 다리가 순식간에 영롱한 빛을 뿜는 꼬리로 변했다. 도아는 바다 깊숙이 아래를 향해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너로구나.
기다렸던 목소리가 들리자 도아는 힘차게 움직이던 꼬리를 멈추었다.
-네 저주가 풀렸구나. 알고 있었느냐?
온 바다를 울리며 흘러나온 말이었다. 도아는 숨 쉬는 것을 잊은 채 넋을 놓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