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3 화 귀인마마를 원합니다
무더위에 치러진 후궁 간택을 지나 입궐하고 보니 어느새 눈을 기다리는 계절이 되어 있었다.
미시가 되어 자경전에 든 도아는 평소처럼 준비되어 있던 자리에 앉았다. 작은 꼬투리도 잡히지 않으려 시간을 칼처럼 지키고 있었다.
“좌상도 귀인처럼 칼과 같지.”
“…….”
“빈틈을 내보이지 않으니 도통 꿍꿍이를 알 수가 있나.”
“대비마마께서 강건한 모습을 보여 주시니 소첩이 더할 나위 없이 기쁘옵니다.”
도아는 대비 조 씨가 던진 말에 일언반구 대꾸도 없이 다른 말을 꺼내며 여유롭게 웃어 주었다.
“귀인이 중전을 잘 따른다지.”
“마땅한 도리를 따르는 것이옵니다.”
“그렇지. 후궁인 자네가 중전을 따르는 것은 도리에 맞는 일이지.”
말하면서도 도아는 필사를 멈추지 않고, 휘적거리며 써 내려갔다.
“중전이 낙선재로 쫓겨나게 되었으니 그 마음이 가련하겠구나.”
“단지 중전마마의 거처가 낙선재가 되었을 뿐이옵니다.”
“과연 그럴 것 같나?”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답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도아는 흔들리는 모습 없이 소신을 밝혔다.
“교태전의 주인이 되고 싶지 않은가?”
필사를 하던 손이 허공에 멈춰 섰다. 단장으로 파리한 안색을 감춘 도아가 물끄러미 대비를 바라보았다.
“하늘 아래 국모가 둘이 될 수는 없사옵니다.”
“아주 올바른 생각이지.”
“…….”
“허나 그걸 알아야 하네. 오직 중전만이, 임금이 승하하면 그 곁에 묻힐 수 있네.”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옵니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더 말해 뭐 하겠는가. 대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삐딱하게 앉아 도아를 감상했다.
‘지금은 총애를 받고 있으니 두려울 게 없겠지. 허나, 미색이 빼어나도 세월 앞에선 속수무책인 것을. 머잖아 총애를 잃고 땅을 치고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을 알 리 없는 대비는 두 사람의 진심이 껍데기로 이루어진 것이라 속단하고 있었다.
대비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지만 도아는 애써 무시한 채 필사에 집중하려 했다.
* * *
준비된 가마에 오르기 전 은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항상 뒷모습만 보여 주던 인겸이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은하를 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은하는 제 심장이 돌처럼 단단히 굳어지는 것만 같았다. 인겸은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할 뿐이었다.
재회를 한 뒤로 은하에게 다가오지 않는 그가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밉기도 했다. 이제 가면 평생 못 볼지도 모르는데 애석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가 좋았다. 때로는 얄미울 정도로 올곧은 사내라, 애를 태우기도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래서 마음을 주었던 것 같았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아 준 뒤 가마에 올랐다. 대궐로 돌아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으나 깊은 시름에 잠겨 있다 보니 당도해 있었다.
“중전마마.”
김 상궁의 말소리에 기척을 내자 가마 문이 열렸다. 오래 앉아 있어서 몸이 주눅이 든 듯 굳은 것처럼 느껴졌다.
부축을 받으며 몸을 곧게 펴 자리에 섰다. 을씨년스러운 겨울바람에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지 않은 낙선재가 보였다.
“전하께서 중전마마가 낙선재에서 지내시는 것에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미리 궁녀를 보내셔서 모든 조치를 취하셨사옵니다.”
“내 대신 전하께 송구한 마음을 전해 주시게.”
“망극하옵니다, 중전마마.”
길에 동행했던 상선이 인사를 마치고 조용히 돌아갔다.
“들어가세.”
말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대궐이 아닌 듯 생소한 공간이 드러났다.
낙선재는 대궐의 화려한 전각들과 다르게 단청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대궐 안에서 유유히 존재를 드러낼 수 있기도 했다.
앞으로 은하가 지내 될 방으로 들어가자 지내던 처소를 옮겨 놓은 듯 그대로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늑하구나.”
“…….”
“전하께서 신경 써 주신 게 보이는구나.”
“마마…….”
“오히려 이런 상황에 교태전으로 돌아갔더라면 마음 편히 지낼 수 없었을 것이다.”
교태전과 비교하면 절반 정도 되는 크기였지만 은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마음 편한 공간이었다.
“모두들 낯선 공간이라 힘들겠지만 김 상궁이 잘 다독여서 소란이 나지 않도록 궁녀들을 잘 통솔하도록 하게.”
“예, 중전마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소인이 잘 살피겠사옵니다.”
“고맙네.”
“당의를 내오라 하올까요?”
“아닐세, 오늘은 이대로 지내고 싶네.”
은하가 편안하게 미소를 짓자 김 상궁은 쫓겨났다는 생각에 짓눌렸던 마음이 씻은 듯 사라졌다.
* * *
매일같이 자경전에 가서 몇 시진씩 필사를 하느라 손목이 혹사를 당하고 있었다. 처소로 돌아오자 무이는 천을 따듯하게 데워서 도아의 손목에 올려놓고 주물러 주었다.
“몸은 정말 괜찮으세요?”
“응,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나 무이의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귀인마마.”
그때, 밖에서 란희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지평이 귀인마마를 뵙고자 하십니다. 어찌하올까요?”
“무이 네가 나가서 돌려보내도록 해라.”
“예, 마마.”
부친에게 말했으니 이제 됐겠거니 생각을 했는데 꽤 끈질긴 작자였다. 곧이어 내보냈던 무이가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이것을 보여 드리라 성화를 하길래 가지고 왔사옵니다.”
“이깟 것을 뭐 하러 가지고 와.”
도아는 한숨을 쉬며 무이가 준 것을 펼쳐 보았다. 비단에 숨겨져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인어 비늘이었다.
안에 든 것을 보고, 흠칫 놀란 마음에 손까지 떨렸다. 이럴 걸 알고 무이에게 들려 보냈을 것이다.
“지평을 들여라.”
“예? 하오나 마마.”
“네가 밖을 잘 살피고 있어라.”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시현이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의 별당 호수에서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요?”
“민심을 살피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갔을 때 바닷가를 지났습니다. 마마가 바다를 좋아하시던 것을 생각나서 바라보다가 이 비늘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묻지 않은 것에 대해 읊기 시작했다. 도아는 두려움에 떨리는 감정을 애써 숨긴 채 그를 내다봤다.
“빛이 사라지지 않는 비늘, 이것을 본 백발의 어부가 말했습니다.”
“…….”
“인어 비늘이라고 했습니다.”
도아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초점으로 시현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무너질 수 없었다. 물러나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마마의 가문이 오래전 인어 사냥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혹시 더 파헤쳐 보면 뭔가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것에 매진했습니다.”
“그래서요?”
“과거의 일을 아는 자에게 막대한 포상금을 주겠다고 했고, 돈 앞에 안 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 알량한 부를 베풀어서 무엇을 알아냈습니까?”
조소를 지으며 그를 비웃어 주었다. 한심하고, 무례하고 쓸모없는 사내.
“인어의 저주.”
“……!”
“귀인마마의 가문에 태어난 여인은, 인어가 될 것입니다.”
“얼토당토않은 말이군요. 더 들을 필요 없겠습니다.”
“마마를 해치려고 꺼낸 말이 아닙니다. 저는 마마를 누구보다 온전한 모습으로 지키고 싶은 사람입니다.”
어째서 이런 자가 가문의 비밀을 알게 됐단 말인가. 도아는 피가 나도록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히 소신의 말을 모두 거짓으로 몰아가겠다면 이 모든 증좌를 세상에 알릴 겁니다. 그리되면 진위 여부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거짓말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팽팽하게 당긴 가야금의 줄처럼 분위기는 싸늘하기만 했다.
“도대체 이러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오랜 침묵을 깨고 도아가 꺼낸 말이었다. 이자는 지금 눈에 뵈는 것이 없었고, 거리낄 게 없었다.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몰라 묻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평생 단 하나였습니다.”
시현은 평생을 들먹이며 협박하던 눈을 치우고, 아련함으로 잔잔히 물든 눈을 들이댔다. 어차피 소름 끼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귀인마마를 원합니다.”
“나는 죽은 육신마저도 전하의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온전한 정신으로 진심을 다해 말하고 있었다.
“폐출이 되면 됩니다.”
“…….”
“그리되면 저도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릴 겁니다.”
“함께 떠나기라도 하자는 겁니까?”
그는 짧은 대답만을 내놓았다. 도무지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후궁에게 떠나자고 제안하는 신하라니 미친 일이었다.
“저를 위해 더는 억지로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두 들었습니다.”
“듣다니 뭘요?”
“숙의마마에게 진실을 들었습니다. 소신에게 해가 될까, 그것을 염려하십니까?”
“김 숙의를 말하는 겁니까?”
“예, 마마가 쓰러져 계실 때 그분이 모든 진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이미 저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셨습니다.”
이 사람이 왜 이토록 미쳐 버렸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쓰러지기 전에도 제정신은 아니었지만, 그 후로 뭔가 확신이 생긴 듯 말했다.
청아, 그것이 나서서 도아가 마치 시현을 사랑하는데 후궁이 되어 마음을 단념이라도 한 듯 꾸며 놓은 모양이었다.
“생각하실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이후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경황없이 치른 일에 머리가 어지러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 * *
가벼운 차림으로 갈아입고 앉아 타들어 가는 촛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강이 찾아왔다. 일이 일단락되어 그런지 그는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중전마마께서 낙선재로 돌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조용히 입궐했는데 대궐 안의 소문은 정말이지 가늠할 수 없이 빠르군.”
“비록 마마께서 낙선재로 가시긴 했지만 일이 이리 마무리되어 다행입니다.”
“말이 새어 나오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는데 조용하니 다행이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도아를 도로 자리에 앉히며 앞에 앉았다. 씻고 나와서 분단장으로 가렸던 파리한 안색이 드러났다.
“안색이 좋지 않군.”
“처소가 어두워서 그럽니다.”
“그런가?”
“네, 저……. 청이 하나 있습니다.”
“뭐든 말만 하시오.”
“바다에 다녀오고 싶습니다, 전하.”
안 그래도 도아의 정체를 알고 난 후부터 좁은 곳에 가둬 놓는 것이 마음에 쓰였다.
“날을 잡아 봅시다. 알겠소.”
“대궐이 답답한 것은 아니고 그저 바다가 그리울 뿐이니 마음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레 걱정하여 도아가 말하자 강은 부드럽게 웃어 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강은 치마에 담겨 있던 손을 끌어와 잡았다.
어느새 그의 손이 도아의 얼굴을 쓰다듬고, 입술이 다가와 눈과 코에 따스하게 입을 맞추었다.
도아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그의 품을 찾아와 파고들었다. 마음의 안정을 찾아주는 그 만의 냄새를 흠뻑 들이마셨다.
“안아 주세요.”
품에서 나온 도아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강을 올려다보며 사랑을 갈구했다. 그에게 안겨 쾌락에 젖을 때면 모든 것이 잊혔다.
거칠게 와락 다가온 입맞춤에 도아는 눈을 감은 채 강의 목에 두 팔을 걸었다. 애틋하게 매달리며 그의 숨결을 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