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 화 발각되다
일천 배를 올리느라 다리에 모든 힘이 빠진 듯 기운이 없었으나 눈앞의 사내를 보고 있으니 온몸의 피가 바닥으로 빠져나가는 듯했다.
“왜 이곳에 계십니까?”
그리움으로 환영과 꿈속에서 헤매며 찾았던 사람이었다. 죽어서야 만나겠다는 생각에 사무친 그리움이 산을 이루었다.
눈물을 보이는 인겸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봤던 그 모습과 겹쳐서 가슴이 만 갈래로 찢기는 듯했다.
할 수만 있다면 다가가 너른 품에 안겨도 보고, 야윈 얼굴을 어루만져 보고 싶었다. 모두 생각에 그쳐야만 했다.
“전하께서 이곳에 머물라 하셨습니다.”
“……전하께서요?”
“예, 해서 어명에 따라 이 사찰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 교태전으로 찾아와 자신이 하는 사찰이 있으니 그곳에 가 있으라 말하던 강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슨 생각으로, 어떤 뜻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어찌 지내고 있는지 얘기를 들었습니다.”
“예, 아시겠지만 워낙 입신양명에 뜻이 없는지라 그리되었습니다.”
“…….”
“그저 소박하나마 마마의 평안함을 빌었습니다.”
끝내 나를 울리십니까. 속절없이 한길밖에 모르는 인겸의 마음에 은하는 고개를 돌린 채 흐느껴 울었다.
“그게 욕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
“그러니……. 이리 야윈 채 울고 있는 마마를 만났겠지요.”
“…….”
“그리 우시면 눈이 아프십니다.”
다정한 말투, 따듯한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눈을 감으면 귓가에 맴돌던 그 소리가, 바람을 타고 은하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나보다 더 많이 울고 있는 사람이, 오히려 나를 걱정했다.
‘나는,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시린 가슴에 빛줄기가 들었다. 지나가는 길이라도 그저 보기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 안으로 인겸의 모습이 담겼다. 몇 시진이고 이 자리에 서서 바라보고 싶었다.
결국 은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슴에 억지로 밀어 놓았던 눈물을 토해 냈다.
* * *
동이 트자 도승지는 받아 적었던 어명을 모두에게 선포했다. 삼삼오오 모여서 강이 내린 결론에 대해 토론을 했지만 누구 하나 시원하게 답을 내놓지 않았다.
마지막에 이 일을 함구하라 명한 것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폐위를 바랐던 이들은 은하가 교태전에서 쫓겨나는 것에 불만 섞인 목소리를 냈다.
“너무 얼렁뚱땅 넘기려는 것 같아서 영 찝찝하네.”
소식을 접한 도총관이 턱을 긁적거리며 대제학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하여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찌할 텐가?”
“자네와 내가 너무 나서도 전하의 눈 밖에 날 수 있네.”
“그건 그렇지만…….”
“폐위가 되지 않은 것이 아쉽지만 교태전에서 쫓겨난 것에 만족해야겠네.”
은하가 새벽에 사찰로 떠난 일을 두고 동정론이 거세져서 삐걱거리던 찰나였다.
“우리가 더 큰 무리수를 뒀다가 오히려 역으로 공격을 받을 수 있으니 이쯤 하세.”
“그렇다면 후일을 도모해야겠군.”
“그러세. 낙선재로 쫓겨났으니 그다음은 친정 사가겠지.”
“허허허, 그러려나?”
“더 물러날 곳이 없지 않은가.”
이들의 다음은 폐위였다. 두려울 게 없는 두 사람은 앞으로 거침없이 나갔다.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멈출 생각이 없었다.
* * *
한양을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던 추문이 일단락되었다는 소식은 부원군 댁에도 전해졌다.
“뭐라고? 아니, 우리 마마가 잘못하신 게 뭐라고 쫓겨난단 말이냐!”
“됐으니 나가 보게.”
“예, 부부인 마님.”
소식을 가져온 하인을 내보낸 부부인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부원군을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봤다.
“마마께서 폐위는 면하셨지만 낙선재로 쫓겨나셨으니 이런 때 후궁이 득세하기라도 하면 우리 마마는 설 자리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요?”
“모르시겠습니까? 이게 다 저들이 우리를 얕보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어쩌시려고요?”
길길이 날뛰던 부원군은 이내 차가운 반응을 보이는 부부인의 태도에 숨을 마셨다.
“화근이 되는 후궁을 또 해치실 겁니까?”
“아니, 그…….”
“아니면요?”
“…….”
“한 번은 전하께서 마마의 체면을 생각하셔서 넘어가 주셨지만 두 번은 없습니다.”
눈앞에서 한시도 떨어뜨리지 않고 감시를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안했다. 부원군은 도무지 반성을 모르는 사람이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았다.
부부인은 한쪽에 밀어 놓았던 자수 거리를 앞으로 가져와 펼쳐 들었다. 날카로운 바늘에 붉은 실이 꿰여 있었다.
“마마께서 비록 낙선재로 물러나게 되셨지만 큰 화는 면하게 되셨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마의 앞날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지내는 것만이 마마를 위한 길이 될 것입니다. 탓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오직 대감 스스로를 탓하세요.”
스스로를 탓하란 말을 꺼내며 부원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면 서책이나 마저 보시지요.”
“어린애도 아니고 매일 갇혀서 책이나 보고 있으니…….”
부원군은 우물쭈물거리면서 반항을 시도했으나 옷고름을 자르겠다는 으름장이 떠올라 더는 말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바늘을 집어 든 부부인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한숨을 뱉었다.
* * *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경대 앞에 도아는 벌써 반 시진째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낯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열흘이 넘도록 누워 있다가 깨어났을 때도 이보단 혈색이 나았다. 늘 양 볼이 불그스름하여 복숭앗빛을 띤 채 활기가 가득했던 양 볼은 보이지 않았다.
백옥 같던 얼굴은 푸르스름하여 아픈 사람의 낯빛이었다. 푹 자고 일어나도 눈 밑의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았다.
‘전하께서 보시면 줄행랑치시겠다.’
그리고 식탐은 없어도 잘 먹던 음식들이, 달갑지 않았다. 하루 한 끼를 먹어도 될 만큼 식욕이 없어지고 있었다.
“아직도 그러고 계세요?”
“응…….”
잘 익은 홍시를 들고 들어온 무이는 여적 경대 앞에 앉아 있는 도아를 보고 놀란 눈을 하고 앉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얼마 전에 크게 앓고 나셨으니 혈색이 없으실 만도 하시옵니다.”
“…….”
“괜한 걱정 마시고, 이 홍시 좀 드셔 보세요. 달달하니 맛이 제대로 들었사옵니다.”
“이상해, 얼굴이.”
“그렇게 신경 쓰이시면 소인이 분 좀 발라 드릴까요?”
빨간 홍시를 들고 있던 무이가 서둘러 내려놓고, 분을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잠잠해졌다고 생각했던 고통이 온몸에 퍼졌다. 도아가 괴로움에 심장을 부여잡으며 허리를 숙이자 무이가 놀라 달려왔다.
“마마! 왜 그러세요?”
“조…… 조용히, 조용히 해.”
밖에 있는 란희가 들을까 봐 도아가 서둘러 짓이겨진 얼굴로 무이를 당부시켰다.
“어의를 불러오겠습니다. 소인이 다녀오겠습니다.”
어의를 부르겠다는 말에 무이가 가지 못하도록 팔을 세게 잡았다.
“가, 가만히…… 있어.”
“도대체 어쩌려고 숨기세요. 대체 왜…….”
온몸을 집어삼킨 고통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아 사라졌다. 고통에 시달리느라 녹초가 된 도아가 무이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전하께서는 알고 계세요?”
“아니…….”
“어디가 크게 안 좋으신 거죠? 그렇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작은 얼굴에는 식은땀마저 맺혀 있었다. 무이는 그것을 연신 닦아 주며 눈물을 훔치고, 코를 훌쩍였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으신데 이렇게 숨도 못 쉴 만큼 힘들어하세요.”
“내 몸은 내가 알아. 심각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런 거면 소인이 전하께 말씀드릴게요.”
그러자 도아는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꽤나 날카롭게 무이를 응시했다.
“내 허락 없이 전하께 말했다간, 너라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
“이대로 두면 좋아질 거야.”
“거짓말…….”
“정말이야. 그러니까 너랑 나 둘만 알아야 해.”
무이의 대답을 듣고서야 도아는 다시 몸을 뉘었다. 눈앞이 어지럽게 돌자 눈을 감았다.
어릴 때 처음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가 떠올랐다. 자비 없이 몰아치는 파도에 머리가 빙빙 어지럽게 돌았었다. 마치 그것과 같았다.
* * *
그의 말처럼 이 사찰은 참으로 고요했다. 산속에 마련된 고요한 별장처럼 목탁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재회를 한 뒤 두 사람이 만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은하는 사찰에서 거의 절을 올리거나 조용히 탑을 돌며 시간을 보냈다.
그럴 때마다 인겸은 아무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거나 등을 지고 앉았다. 그럼 은하가 그의 등진 모습을 바라보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나날이 하고 싶은 말은 늘어만 갔지만 결코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서로가 누구보다 원했지만 결코 가까이할 수는 없었다.
“중전마마, 밖에 상선이 왔사옵니다.”
여느 때와 사찰안에서 절을 올리고 있던 은하는 김 상궁의 전갈을 받고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망극하옵니다, 중전마마.”
염주를 두 손에 꼭 쥔 채 아무 무늬도 없는 은비녀에 색도 깃들지 않은 옷차림의 은하는 그저 사찰에 상주하는 아녀자 같았다.
“전하의 어명을 전하러 왔사옵니다.”
“말하시게.”
“전하께서 마마의 입궐을 명하시었사옵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아 다른 명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상선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마마의 거처를 낙선재로 옮기라 명하셨사옵니다.”
“마, 마마! 낙선재라니요!”
뒤에서 듣고 있던 김 상궁이 분개하여 목소리를 높이자 은하는 눈짓으로 주의를 주었다.
“그것으로 이번 일을 일단락 지으셨사옵니다, 중전마마.”
가만히 서 있던 은하는 이내 두 손을 고이 겹쳐 이마에 가져왔다. 그런 후 대궐이 있는 방향으로 큰절을 올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장내는 바람이 나부끼는 소리만이 요란했다. 바삭하게 마른 낙엽이 휘몰아치며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