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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왕을적시다 (61)화 (62/93)

제 61 화 발각되다

누각에서 내려오던 영의정은 하마터면 정신 줄을 놓아 굴러서 내려올 뻔했다. 적잖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도아의 말대로 전각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영의정은 그 자리에 시현이 없기를, 모두 거짓이기를 바랐다.

전각에 다다르자 큰 나무를 오가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성거리는 시현이 보였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아, 아, 아버지가…….”

“조용히 따라라.”

“아버지.”

“입 닥치거라.”

그는 이 자리에서 더 큰 소란을 끌고 싶지 않았다. 이목이 두려웠던 영의정은 말을 마친 뒤 빠른 걸음으로 궐을 빠져나왔다. 

사저로 가는 내내 부자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작은 숨소리 하나 비추지 않으니 죽은 건가 싶을 정도였다.

부자가 나란히 퇴궐했다며 반기는 하인을 매서운 눈초리로 무시하고, 사랑채로 들었다. 뒤로 따라 들어온 시현이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매서운 따귀가 연속으로 두 번 날아들었다. 두껍고 커다란 손에 자비 없이 매질당한 시현의 입가는 찢어져 피를 보였다.

“차라리 기방을 들쑤시고 다니는 것이 나았다! 네놈에게 관복을 입히겠다고 헛된 마음을 먹은 나를, 하늘이 보란 듯 저주하는 것이로구나.”

“귀인마마가 모두 말하셨군요.”

“오죽했으면 날 찾아서 이런 말을 다 했겠느냐! 오죽했으면!”

그는 길길이 날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제 풀에 지친 듯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시현은 그 앞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뭘 잘못했는지는 알고 있느냐?”

“아버지께는 그저 송구스럽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라고 해라. 내가 귀인마마께 들은 말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해!”

“학문에 정진하여 전하의 눈에 들기 위함도 모두 궐에 들어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귀인마마를 만나기 위해 그런 것이냐?”

“예…….”

모두 드러난 마당에 더는 숨기고 말 것이 없었다. 영의정은 앞에 보이는 물건을 집어서 시현에게 무자비하게 집어 던졌다.

날아오는 물건을 피하지 않고 모두 맞고 있으니 이마가 찢기기도 하고, 볼기짝에 흠집이 나기도 했다. 

“이 미친놈아! 네 주둥이에서 나오는 말이 무슨 뜻인 줄 알고 나불거리느냐?”

“처음부터 줄곧 제게는 그분뿐이었습니다.”

“하…….”

“귀인마마도 저와 같은 마음입니다.”

“뭐라고?”

“그러나 제 안위가 걱정되어 차마 숨기는 것일 뿐입니다. 아버지가 알게 되셨으니 차라리 잘됐습니다. 부디 아버지께서 도와주십쇼.”

맙소사. 생각보다 더한 상황에 영의정은 이마를 짚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시현아.”

“예, 아버지.”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어느 때보다 살벌한 시선을 비췄다. 

“내 손으로 너를 사지로 몰아붙이게 하지 마라.”

“…….”

“다시 한번, 귀인마마의 주위를 얼쩡거리면 그 발을 분질러서라도 한 곳에 앉혀 놓을 것이다.”

“…….”“앞으로 입궐과 퇴궐을 함께 할 것이고, 전하를 알현하는 일 외에 내 눈 밖을 벗어나지 마라.”

끝내 시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가 말뿐인 것으로 무게를 잡는 것이 아님은 잘 알고 있었다. 

* * *

날이 추워져서 처소 안에만 있자니 답답해졌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러 밖에 나온 도아를 발견한 란희가 등불을 갖추고 다가왔다.

꽃을 잃는 화단을 지나가 달을 보기 위해 끝에 다다르자 란희는 조용히 방해되지 않게끔 등불만 내밀어 주었다.

“란희라 했지.”

“네?”

“네 이름 말이다.”

“예, 예……. 그러하옵니다.”

이름을 읊어 보던 도아가 고개를 돌려서 란희를 응시했다. 아직은 응석을 부리며 부모 품에서 사랑을 받아 자라야 할 아이였다.

버거워 보이는 새앙머리를 향해 어느새 손이 뻗어졌다. 그러자 란희는 화들짝 놀라 흠칫하며 뒤로 몸을 뺐다.

“내가 널 해칠 것 같으냐?”

“아, 아니…… 그것이 아니옵고…….”

이미 도아가 사람이 아니라 영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손이 닿는 것이 두려웠다. 예부터 인어는 사람의 기억을 지우고 조작할 수 있다 했다.

또한 마음을 읽히기라도 하면 큰 낭패였다. 란희는 고개를 내젓다가 이내 푹 숙였다.

“네가 날 해치려 하지 않으면, 나도 널 해치지 않는다.”

“…….”“너는 어떠하냐?”

“예? 무, 무엇을…… 말이옵니까?”

“날 해칠 생각이 있느냐?”

너는 대비가 보낸 사람이다. 그러니 내 너를 끝없이 의심하는 것은 마땅한 이치다. 도아는 뒷말을 목구멍에 삼켰다.

“소, 소인이 감히 마마를…….”

눈동자가 파도를 만난 듯 세차게 흔들렸다. 도아가 한 걸음 다가서려는데 저만치 상선이 우렁차게 외쳤다.

“전하께서 납시셨나 보옵니다!”

대화할 순간을 놓친 것이 아쉬웠지만 어차피 물어도 대답하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날이 몹시 추운데 어찌 나와 있소?”

“처소에만 있었더니 하도 답답하여서요.”

“그럼 따듯하게라도 입어야지.”

“잠깐은 괜찮습니다. 중전마마의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어느새 강의 손에 이끌려 따듯하게 데워진 처소에 들어갔다. 강은 마주 잡은 손을 멀거니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오늘은 무얼 했소?”

“자경전에 가서 필사를 하고, 돌아와 무이가 다과를 만들기에 조금 거들었습니다.”

“필사를 하는 일은 힘들지 않소?”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야참을 들이라 할까요?”

“다음에. 오늘은 됐소.”

강은 웃고 있었지만 바닥에 가라앉은 흙처럼 어딘지 모르게 무거워 보였다. 도아도 애써 교태전 일은 입에 담지 않았다.

자리를 깔고 하나처럼 딱 붙어서 서로를 끌어안은 두 사람은 서로의 숨소리를 들었다.

“답답하지는 않소?”

“뭐가요?”

“바다에 가고 싶을 것 같아서.”

“아……. 사가에서 지낼 때도 그렇게 자주 간 것은 아니라 괜찮습니다.”

“사가에는 좌상이 만들어 준 호수가 있다고 하질 않았소.”

그건 그랬다. 바다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깊고 넓은 호수가 있어서 별당에서도 답답하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대 전각에 연못이라도 만들어 주고 싶은데…….”

“그랬다간 궁녀들에게 발각될 것입니다.”

“그러려나.”

“네, 괜찮으니 염려 마세요.”

그의 품에 이마를 기대며 작은 소리로 웃어 주었다. 강은 손을 뻗어서 이불을 잘 덮어 주고, 한동안 도아의 등을 쓸어 주었다.

“얼굴빛이 좋지 않던데 어디가 불편하시오?”

“그런 것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믿어도 되는 것이오?”

“그럼요……. 이제 아프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소, 이만 잡시다.”

잠이 오지 않았는데 강의 손길이 거듭되자 도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러나 강은 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자정이 넘고 새벽은 오지 않은 시각이었다. 강은 품에서 세상모르고 잠든 도아를 잘 눕혀 놓고 조용히 대전으로 건너왔다.

그는 처소로 들어서면서 상선에게 도승지를 부르라 명했다. 잠이 묻어난 도승지가 얼마 뒤 대전에 들었다.

“도승지는 들어라.”

“예, 전하.”

안으로 가까이 든 도승지가 강의 말을 적기 위해 상에 앉아 붓을 들었다. 

“중전은 천성이 어질고 현숙하여 줄곧 백성들을 품 안의 자식으로 보듬어 왔다. 이번 가뭄으로 백성들이 혼란을 겪을 때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일처럼 나서 헐벗은 백성들을 보듬어 주었다. 허나,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국모로서 마땅히 모범이 보여야 하는 자리에 있음에도 민심을 잃어 원성을 사기에 이르렀다.”

고뇌와 갈등, 오래 끌고 가면 갈수록 은하가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갈 수 있었다. 그랬기에 강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럼에도 중전은 평소 국모로서 최선을 다했던바 자비를 받아 마땅하다. 중전은 사찰에서 돌아오는 즉시 교태전을 비우고, 어명이 있기 전까지 낙선재에 기거하도록 하라.”

어명을 써 내려가던 도승지가 움찔하며 멈칫했지만 이내 줄줄이 적어 나갔다.

“과인의 이러한 의중을 헤아려 살피고, 앞으로 이 일에 대해선 함구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날이 밝는 즉시 과인의 뜻을 알리라.”

“예, 전하.”

말을 마친 강은 일이 끝났거든 물러가라 하며 도승지를 내보냈다. 

* * *

사찰에 온 날부터 은하는 소박한 차림으로 염주를 들고, 일천 배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나오지 않고 있었다. 

“마마…….”

“…….”“이러다 쓰러지시옵니다. 물이라도 한 모금 드시옵소서.”

하루가 되도록 도무지 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김 상궁이 문 앞에서 눈물로 청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고, 다리가 떨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느려질지언정 은하는 절대 일천 배를 멈추지 않았다.

길었던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 절을 올리고 일어선 은하는 눈을 감은 채 쓰러질 것 같은 육신을 정신으로 다잡았다.

문으로 걸어가는 짧은 길마저 버겁게 느껴졌다. 힘겹게 문을 열고 나가자 짙은 어둠과 거센 바람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하…….”

땀으로 젖어 있던 몸에 찬 바람이 닫자 즉각 소름이 돋았다. 신발을 신고 내려와 제대로 걸음을 디디려는데 쥐가 나고 말았다.

“윽……!”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이는데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힘없이 늘어지는 몸을 단단히 잡아 준 손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숨이 멎고 말았다. 몸을 채 펴지도 못하고 남의 손길에 의지한 채 고개를 올렸던 은하는 시야에 가득 찬 사람을 보고, 모든 생각이 무너지고 말았다.

차마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은하를 내려다보던 이는 조심스레 자리에 바로 설 수 있게 도와준 뒤 반걸음 물러났다.

“가서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멍하니 충격에 휩싸인 은하를 두고 돌아서려던 사람을, 다급히 붙들었다.

“왜…….”

죽어서야 볼 수 있는 사람이라 여겼다.

“왜 이곳에 계십니까?”

숨을 토해 내며 힘겹게 뱉어 낸 첫마디에 그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 냈다. 

“왜! 왜…….”

이윽고 인겸을 그리움으로 바라보던 은하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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