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 화 발각되다
어둠이 삼킨 교태전 안으로 거칠게 들어온 강은 제게 걸어오는 은하를 차갑게 바라봤다.
“날이 밝기 전에 당장 궐을 떠나시오.”
“그게 무슨……. 전하.”
떠나라고? 은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강을 쳐다보았다.
“궐을 떠나라 했소.”
폐위를 시키는 것도 아니고 떠나라는 말이라니, 은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강을 쳐다봤다.
그러자 강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은하를 두고 저벅저벅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은하는 조용히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마마마께서 중전을 사지로 몰아넣으려 안간힘을 쓰고 계시질 않소.”
“…….”
“뭣도 모르는 남들 눈에 시어머니를 쓰러뜨린 며느리로밖에 보이지 않겠지.”
“모두 신첩의 허물인 것을요.”
자리에 선 채로 그리 말하며 은하는 쓰디쓰게 웃었다. 그림자도 없이 어둠을 뒤집어쓴 은하의 모습이 처연했다.
“과인의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중전이 궐을 떠나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친정에 가라는 말씀이시옵니까?”
“그럴 리가. 과인이 세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찰이 있소. 그곳에 이미 연통을 넣어 놨으니 지내기에 부족한 것은 없을 것이오.”
그가 떠나라 한 말은 사찰로 가라는 뜻이었다. 이런 상황에 사찰로 회피라니, 더 큰 원성만 나올 것 같았다.
“대비께서 몸져누워 계시니 무사 기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사찰로 떠났다고 할 것이니 다른 걱정은 말고 편히 가도 되오.”
“그래도…….”
“동이 트기도 전에 조촐하게 사찰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중전을 향한 거센 빗발침이 동정론으로 바뀔 것이오.”
자신을 위해 이토록 세심하게 신경 써 준 그의 마음에, 은하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눈물이 맺혀 들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오. 며칠만, 머리를 식힌다고 생각하고 지내다 오시오.”
“신첩이 전하께 짐만 된 것 같아서……. 송구하옵니다.”
“짐이라 여긴 적 없소. 그런 말 마시오.”
“신첩은 어떤 처분도 가볍게 받을 것이니 부디 전하를 위한 길을 택해 주십시오.”
“참고하겠소.”
고개를 끄덕이며 강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하가 길을 터 주며 옆으로 비켜섰다.
“조심히 가시오, 중전.”
“예, 속히 궐을 떠나겠사옵니다.”
은하는 애써 미소로 화답하였다. 강은 말없이 눈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처소를 비웠다.
* * *
날이 밝자 은하의 소식이 대궐 곳곳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강의 말처럼 은하는 대비 조 씨를 위해 사찰로 떠난 것이 되었다.
중전의 행렬에 아무도 없이 조촐하게 가마를 타고 나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예측대로 동정론이 쏟아져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고 교태전으로 문안 인사를 온 후궁들은 뒤늦게 소식을 접했다.
“언제 오신다는 말씀도 없으셨는가?”
“그러하옵니다, 귀인 마마.”
“알겠네.”
세 후궁은 그렇게 교태전을 등지고 나와야 했다.
“대궐이 어수선하다는 것을 알 것이네. 그대들의 부친이 조정에서 한 자리씩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소란을 만드는 일이 없도록 유의하시게.”
“걱정 마시옵소서, 귀인 마마.”
“그대 부친인 대제학은 참으로 열성적으로 대전을 두드린다더군.”
“정치는 소첩이 모르는 일이옵니다.”
이번 일을 두고 얘기하자 청아는 되바라지게 웃으며 전혀 모르는 일인 듯 꾸몄다.
“앞으로 그러길 바라네.”
“예, 심려 마시옵소서. 귀인마마.”
“먼저 가 보겠네.”
껄끄러운 자리를 먼저 벗어난 도아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마주치는 것만으로 이런 불쾌감을 줄 수 있다니.”
“예?”
“아니다.”
도아는 괜히 세게 부는 바람에 불쾌감을 털어 버리려 고개를 저었다.
“귀인마마.”
“나도 보고 있다.”
저만치 우뚝 솟은 나무 사이로 전각을 기웃거리는 시현의 모습이 보였다.
“어찌하올까요?”
걱정스레 묻는 무이의 말에 도아는 혀를 차며 돌아섰다.
“너는 당장 가서 영의정 대감을 누각으로 모셔 와라.”
“예? 여, 영의정 대감을요?”
“그래, 서둘러라.”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도아는 입술을 앙다문 채 서둘러 누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결연한 모습에 무이도 길을 틀었다.
* * *
여전히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누워 있던 대비도 은하가 사찰로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콧방귀를 끼며 분노를 표출했다.
자리에 앉아서 얘기를 듣고 있던 차에 강이 문안 인사차 들렀다.
“중전께서 이 사람을 위해 사찰로 납시었다고요?”
“예, 안 그래도 그것을 말씀드리러 온 것입니다. 중전이 어마마마를 염려하는 마음이 깊기에 사찰에 가는 것을 윤허했습니다.”
“날 위한 것이라 했습니까?”
강은 고까운 듯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대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이 모든 문제를 회피한 것이 아니고요?”
“중전은 오직 어마마마의 무탈함을 기원하기 위해 사찰로 향한 것입니다.”
“아주 애처가 나셨습니다, 주상.”
“부디 중전의 마음을 곡해하지 마십쇼.”
애초에 대비가 거들고 나서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강은 차마 비웃지 못하고 억지로 병석을 차지한 대비를 싸늘하게 훑었다.
“총명한 주상께서 어찌 이러십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상께서 이 시국에 중전을 싸고돌면 돌수록 모두에게 비웃음거리만 될 뿐입니다. 그걸 진정 몰라서 이럽니까?”
“만조백관 앞에 혼인을 치르고 부부라 살라 하신 분은 어마마마이십니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대비가 버럭버럭, 화를 이기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이 모습만 본다면 누가 아픈 사람인지 전혀 모를 것이다.
“중전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신망을 잃었습니다.”
“하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하세요, 주상.”
“혼인을 코앞에 둔 사람들을 결탁하여 헤집어 놓은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잘만 말하던 대비 조 씨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소자가 정녕 아무것도 모르고, 국혼을 치른 줄 아십니까?”
“…….”
“중전은 결코 이런 혼인 따위 원치 않았습니다.”
“부원군이 가증스럽게도 중전에게 정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내게 숨겼습니다.”
놀랍지 않았다. 대비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니까. 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주상.”
“오늘 찾아온 것은, 그저 앞서 말씀드린 것을 알려 드리러 온 것이었습니다.”
“계속 이 어미에게 적대적으로 구실 겁니까?”
“그럴 수밖에요.”
적대적이란 표현에 강은 절대 부정하지 않고, 단번에 받아들였다.
“어마마마는 자식이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철저히 개인의 사리사욕으로 짓밟고자 하십니다. 이미 간곡히 청한 바 있었거늘 그마저도 외면하셨습니다. 이런 마당에 뭘 어쩌겠습니까.”
자경전에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강은 할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의를 통해 어마마마의 소식을 들을 것입니다. 쉬십시오.”
“모두 주상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물러가옵니다, 어마마마.”
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며 엄 상궁에게 대비를 잘 모시라는 말 한마디만 남겨 놓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 * *
누각에 오른 도아는 손님이 올 때까지 저 멀리 삭막하게 식어 버린 풍경을 눈에 담았다.
“소신을 찾으셨다고요?”
기척이 들리자 도아는 몸을 돌려 의아한 얼굴의 영의정을 쳐다봤다. 아마 그럴 테지. 일절 왕래가 없던 사이니까.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간 이 사람도, 영의정 대감의 가문도 무사하지 못할 성싶어 불렀습니다.”
“소신의 가문이 무사하지 못하다니요?”
가문을 위협하는 말에 영의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가까이 다가와 섰다.
“영의정 대감의 아드님이 관직에 올라 대궐을 드나들고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만 그게 이 대화에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사가에 있을 때부터 그 사람이 줄곧 엄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엄한 마음이라니…….”
그러다 문득 도아와 혼인 얘기를 꺼냈던 날을 떠올렸다. 설마 하는 얼굴로 그간의 일을 떠올리다 보니 온몸에 바늘이 꽂히는 것 같았다.
“또한 후궁 간택을 앞둔 사람에게, 겁도 없이 청혼까지 했었습니다.”
“…….”
“뭐 어쨌든 입궐 전의 일이니 그것으로 문제를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그것으로 끝이었다면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궐을 들락거린 후로 줄곧 제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위험한 일을 일삼고 있습니다.”
바위를 머리 위로 던진 것 같은 충격이었다. 영의정은 벌겋게 오른 얼굴로 충격의 숨을 내뱉다가 고개를 숙였다.
“내 힘으로는 도무지 지평을 막을 길이 보이지 않아 부득이하게 영의정 대감을 부른 것입니다.”
“소신이……. 입이 있어도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대궐이 이런 때에, 더는 다른 말이 나와선 안 됩니다.”
하필 지금 시기가 좋지 않았다. 만약 궁녀 중 시현과 도아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다면 일이 커질 것이다.
“군왕을 기만한 죄는 가볍지 않을 겁니다. 지평의 두 손 두 발을 묶어서라도 다시는 내 눈앞에 보이지 않게 해 주세요.”
“예, 앞으로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없게 하겠사옵니다.”
“그 말 믿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이 보지 못했던 곳에서 시현이 이처럼 무서운 짓을 벌이고 있었다니, 영의정은 앞이 캄캄하여 어지러웠다.
‘망신을 줘도 유분수지. 네 이놈을!’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돌아가려는데 도아가 다시 그를 불러 세웠다.
“내 처소를 배회하고 있을 겁니다.”
“…….”
“보는 눈이 없도록 부탁합니다.”
“예, 알겠사옵니다.”
그는 창피함으로 물든 얼굴을 하고,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누각을 내려갔다.
폭주 기관차처럼 질주하는 시현을 과연 영의정이 막을 수 있을지 미지수였지만 마지막 수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