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 화 발각되다
벌을 받기 위해 미시에 맞춰서 자경전에 든 도아는 파리한 안색의 대비 조 씨를 마주하고 앉았다.
밤새 앓았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 듯 나이답지 않게 좋던 피부는 잔뜩 까칠해져 있었다.
엄 상궁은 작은 서안을 가지고 와 도아 앞에 내려 주고, 그 곁으로 지필묵을 주었다. 필사를 시키겠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기운이 없는 듯 기대어 앉아 있던 대비 조 씨는 미리 준비해 둔 서책을 꺼내 들었다.
“????삼강행실도????다. 어떤 책인지 알고 있느냐?”
“자세히는 모르오나 군신과 부자 그리고 부부의 삼강에 모범이 될 만한 행실을 모아 편찬한 교훈서라 알고 있사옵니다.”
“까막눈을 면하려 천자문을 겨우 뗐다더니 잘만 알고 있군.”
“그저 뜻만 알 뿐 세세한 가르침은 모르옵니다.”
도아가 새침하게 일갈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곁에 앉아서 먹 갈 준비를 하던 무이가 앞으로 나아가 서책을 받아 왔다.
“외명부 부인들에게 귀인이 필사한 것이라며 나눠 주면 좋아들 할 것이다. 설렁이지 말고, 정성을 다하도록 하라.”
“예, 대비마마.”
그저 버리고 말 것이 아니라 외명부에 나눠 줄 책이라며 무게를 더했다. 도아는 곧장 얇은 붓을 들어 필사를 시작했다.
한 치 흔들림 없이 꼿꼿이 앉아서 필사하는 도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비 조 씨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두 시진이 되어 갈 무렵이었다. 슬슬 손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입술에 힘이 들어가려던 때였다.
“마마! 대비마마!”
먹을 묻히려던 붓이 허공에 멈췄다. 엄 상궁의 절규 가까운 비명에 도아의 시선이 보료에 앉아 있던 대비를 향했다.
“뭘 멀거니 보고 있는가? 어서 어의를 불러오시게!”
“예? 예! 귀인마마.”
대쪽 같던 대비가 힘없이 쓰러져 서안에 널브러져 있었다. 엄 상궁이 우왕좌왕하자 도아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후 곧장 자리를 펴서 대비의 머리를 푼 뒤 눕혀 주었다. 어의가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둘러 들어온 어의가 대비의 맥을 짚고, 의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도아는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중전마마 오셨사옵니까?”
“귀인이로군. 어마마마께서는?”
“어의가 보고 있사옵니다.”
다음으로 급히 들어온 사람은 은하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들어와 도아에게 대비의 안위를 묻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은하는 가까이 나서지 못하고 어의가 하는 것을 살피다가 조용히 도아를 향해 돌아섰다.
“어의 말로는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고 했사옵니다. 그러니……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으응, 고맙네. 알겠네.”
파르르, 미세하게 떨던 은하는 이내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도아가 그 곁에 따라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안쓰러운 기색으로 곁을 돌아봤다. 모든 게 자기 탓이라는 듯 죄인이 되어 눈을 감고 있는 은하가 보였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은하의 손등을 덮어 주었다. 그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죽어서야 볼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읽을 수 없었던 은하의 고통, 그 진실된 마음이 고스란히 피부로 전해졌다.
‘사무친 그리움에 마음의 병이 너무 깊어.’
이내 멋대로 마음을 읽은 것이 미안해서 서둘러 손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은하의 곁을 지켜 주었다.
* * *
안채 너머에 오래전에 만들어져 방치된 작은 연못 앞에 선 시현은 한 시진이 넘도록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전쟁통이라도 된 듯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중심에는 검은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채 앉아 있는 도아의 환영이 있었다.
‘인어의 저주를 받은 가문이라니 누구도 생각지 못했겠지. 그러니 그 오랜 세월을 숨기고 살아왔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눈으로 보는 것이 확실할 텐데.’
이것 하나만으로 도아의 가문은 치명상을 입히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홍씨 가문에서도 자손을 독자로 낳아 비밀을 지켰을 것이다.
‘미치신 겁니까?’
적대적으로 굴던 도아의 눈빛이 떠오르자 뜻을 모를 쾌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약점, 이게 도아를 굴복시킬 열쇠를 쥔 것 같았다.
‘내 곁에 있어. 나는 왕처럼 너를 가둬 두지 않을 거야.’
무력을 행해서라도 도아를 쟁취할 작정이었다. 거짓으로 짓이겨진 마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 * *
일하다가도 홀로 있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멍하니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아 거동이 어렵다니 맘이 쓰였다.
할머니를 위해 선택한 궁녀의 길이 뼈저리게 후회됐다. 어린 마음에 굶지 않는다는 말에 홀린 것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저벅저벅, 전각 뒤로 걸어간 란희는 조심스레 천 조각을 펼쳤다. 인어 비늘이 모래사장에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대비께서 그러셨지.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아 내는 거라고.’
좁은 목욕통 밖으로 물소리를 내며 솟아오르던 인어 꼬리가 떠올랐다.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내게 친절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구박하거나 홀대하지도 않으셔.’
자신이 가진 것과 본 것을 대비에게 고하면 엄청난 포상을 받겠지만 도아는 그 대가를 이룰 것이 자명했다.
더욱이 란희는 도아를 향한 대비의 마음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었다.
“덩그러니 서서 뭘 하는 거야?”
무이의 목소리에 란희는 서둘러 들고 있던 것을 꽉 말아쥐고 등을 돌렸다.
“툭하면 여기 서 있던데 집 생각에 울기라도 하는 거야?”
“네? 그런 게 아니옵니다.”
“사가에 할머니를 홀로 두고 왔다더니 그게 염려되는 모양이군.”
“…….”
“대궐이 잠잠해지면 내가 귀인마마에게 말씀드려서 하루 정도 궐 밖에 다녀올 수 있게 해 줄게.”
갑작스러운 호의에 란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궐 밖에 내보내겠다는 말에 눈물마저 맺혀 들었다.
“저, 정말이세요?”
“그래, 그런데 지금은 대궐이 어수선하니까 조금만 참아.”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니 귀인마마께 잘해.”
그 말이 마치 란희의 생각을 꿰뚫기라도 한 것 같았다. 괜히 양심에 찔린 란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란희는 손에 쥔 것을 땀이 나도록 꽉, 세게 쥐었다.
* * *
이번에는 제대로 축배를 올렸다. 대제학과 도총관은 궁지에 몰린 은하의 처지를 보란 듯 비웃으며 잔을 허공에서 부딪쳤다.
“애초에 없는 사실을 만든 것이 아니니 전하께서도 어쩌지 못하시겠지.”
“그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계신 게 아닌가?”
“그렇지. 괜히 벌집을 들쑤셔 놔 봤자 벌들만 성질이 날 테니.”
“부디 현명한 길을 고르셔야 할 텐데.”
말을 마친 대제학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소문에 관련된 사람을 추포했으나 건진 것은 확실시된 정혼이었다.
미리 대제학이 수소문해서 섭외했던 주민들은 일제히 은하의 추문에 대해 진실이라 한목소리로 외쳤다.
“만약 중전께서 이대로 모르쇠로 일관하면 그땐 어찌하나?”
“진흙탕 싸움이 되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리인가?”
“혼인할 시기를 훌쩍 넘기도록 전국 팔도를 유랑하고 있다는 정혼자를 추포해야지.”
“아? 그리되는 건가?”
“그렇지, 이 사람아.”
이미 그다음을 생각하고 있던 대제학은 마치 광대놀음이라도 보듯 신명 나게 웃어 재꼈다.
“중전이 되겠다고 평생의 정혼자를 내팽개친 중전의 얼굴이 어떨지 궁금하군.”
“그자에겐 어떤 죄목이 맞으려나?”
“감히 왕을 능멸하지 않았는가?”
“그, 그렇지!”
“반역일세.”
헉! 도총관이 입을 벌린 채 말을 맺지 못했다.
“그놈이 왕명으로 추포되는 날이, 제삿날이 될 것일세.”
“허, 허허…….”
“그래도 중전이 자리를 지키겠다고 늘어지면 별수 없지. 명예를 바닥에 떨어뜨린 것에 만족하고 물러나야지.”
다시 차오른 술잔은 찰랑이며 빛을 냈다. 대제학은 쓴 술을 넘기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술맛 좋구나!”
상 위로 잔을 부서질 듯 세게 내려놓았다. 만조백관의 칭송을 받으며 중전이 될 청아의 모습이 취기에 아른거렸다.
* * *
초도 밝히지 않은 채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둔 은하는 처연히 보료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쓰러진 대비는 도통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모두 연기라 할지라도 이는 은하의 숨통을 조였다.
모두가 자신을 힐끗거리며 수군덕거리는 것 같았다. 지친 몸은 죄책감에 편히 누울 수도 없었다.
은하는 어둠에 둘러싸인 전각을 둘러보았다. 부와 명예를 가진 여인만이 가질 수 있는 곳, 그러나 지금은 감옥같이 느껴졌다.
‘소문이 팔도를 삼켰으니 들었으려나…….’
정절이 없는 여인이라 손가락질받는 제 소문을 인겸이 진작 들었을 수도 있다고 여겼다.
어쩌면 그에게 은하는 정절이 없는 여인일지도 몰랐다. 남녀 간의 감정을 모르는 어린 시절에 만나 정을 쌓은 정인을 저버렸으니 그럴 만했다.
간택을 앞두고 굶어 죽겠다고 버틸 때 차라리 죽고 말 것을. 이리 욕보이는 삶을 살 바에 그 길이 나았다.
쾅!
해괴한 생각에 다다랐을 때, 굳게 닫혀 있던 처소 문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전하?”
어둠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는 강을 보다가 은하가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는 작은 감정조차 깃들지 않은 담담한 얼굴로 은하를 쏘아보았다.
“잘 들으시오, 중전.”
“예?”
“날이 밝기 전에 당장 궐을 떠나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떠나라고? 은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강을 쳐다보았다.
“궐을 떠나라 했소.”
이해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말에, 강은 쐐기를 박듯 다시 같은 말을 뱉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강의 얼굴을 살폈으나 어떤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