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58)화 (59/93)

제 58 화 발각되다

모든 하인이 별당에 출입하는 것을 금하던 일은 여인이니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딱히 유난스럽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별당에 숲을 옮겨 놓은 것처럼 호화스러운 화원을 만들었을 때도 그저 바다를 좋아하는 도아를 향한 애정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자 이 모든 것이 도아의 비밀을 숨기고자 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시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년의 사내는 침을 삼켰다. 자신에게 떨어질 포상을 기대했다. 

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를 뒤지더니 주먹만 한 금덩이를 사내 앞에 내놓았다.

“날 만났던 일은 이 자리에서 털고 가야 할 것이다.”

“이, 이…… 이것을 진정 주시는 겁니까?”

“물론이네.”

“그, 금을…….”

금덩이를 눈앞에 둔 사내는 눈이 멀 것 같은 황홀한 표정으로 감히 제대로 만져 보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다.

“잘 듣게.”

“예?”

“날 만나 나눈 이야기를 밖에 나가서 떠벌리고 다닌다면 내가 자네에게 준 것의 곱절을 쳐서 받을 것이네. 알겠는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고 가겠습니다.”

이윽고 사내는 두 손으로 금덩이를 소중히 감싸 쥐며 품에 안았다. 시현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손에 쥔 일지를 응시했다.

“그만 가 봐도 좋다.”

“고맙습니다. 참말로 고맙습니다!”

몇 번이나 거듭 인사를 하던 사내가 모습을 감추었다. 

“설마…….”

문득 기우제를 지내고 비가 내리던 날이 떠올랐다. 도아는 갑작스레 의식을 잃었고 후로 열흘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인어는 예부터 영물이라 불렸다. 전혀 없는 이야기라 생각되지도 않았다. 머리가 복잡해진 시현이 손으로 이마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도아가, 저주를 받아 태어난 인어였어.’

* * *

하루아침에 얼굴이 반쪽이 다 된 은하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사가에서 부부인을 입궐시키란 것이었다. 

명이 떨어진 지 몇 시진이 채 되지 않아 부부인이 혼비백산을 한 채로 입궐했다.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그런 말을 듣자고 어머니를 모셔 오라 한 것이 아닙니다.”

“…….”

“이 일로 그분에게 어떤 파편도 튀어선 안 됩니다.”

그분이 누구를 말하는 건지 부부인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은하를 바라봤다.

“마마……. 혹 아직도……!”

“저를 아홉 달 배에 품고, 낳아 길러 주신 분이 저를 그리 모르십니까?”

“…….”

“태어나 줄곧 한길이었습니다. 그리 살라 명하신 분은 두 분이십니다.”

부부인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입을 막았다. 잊었으리라 막연히 생각하며 스스로 안심하고자 했던 안일함이 칼날이 되었다.

“어머니를 부른 것은 아버지가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감시해 달란 부탁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찌하시려고…….”

“대문을 걸어 잠그고, 숨죽이고 계세요. 절대 누구도 집으로 들여선 안 됩니다.”

“…….”

“아버지가 허튼 마음을 잡숫지 못하게 해 주세요.”

철로 만든 말처럼 은하는 단단하게 말했다. 부부인은 두 손으로 얼굴에 묻은 눈물을 거칠게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것은 걱정하지 마세요. 마마의 뜻에 따를 것입니다.”

“부디 그리해 주세요.”

“그런데 어찌하실 생각이시옵니까?”

걱정스러운 부부인의 눈길을 마주한 은하는 꽤나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저들이 바라는 것을 내주어야겠지요.”

“마, 마마……!”

“내가 버티면 버틸수록 저들의 시선이 그분에게 향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찌! 아니 되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목에 핏줄이 드러나도록 부부인이 울며 만류했지만 그럴수록 은하는 평정심을 되찾는 듯 의연하기만 했다.

“나는 말입니다, 어머니.”

“…….”

“처음부터 이런 날이 오리라 알고 있었습니다.”

“마마…….”

“폐비로 살지언정 그분을 나락으로 끌어들일 순 없습니다.”

서릿발 같은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물러설 생각 없는 은하의 단호함에 부부인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은하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바람처럼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더는 희생을 바랄 수 없었다. 

* * *

은하를 향한 추문에 대해 신료들은 꽤나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항상 다른 의견을 밝히던 당파들이 합세하여 한목소리를 냈다.

수그러들길 기다린다거나 윽박질러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강은 즉시 영의정을 불러 독대를 청했다.

“경의 생각은 어떻소?”

“송구하옵니다.”

“편히 하시오. 내 오늘은 경의 생각을 듣고자 부른 것이니.”

“소문의 큰 축인 중전마마의 정혼자에 대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러시옵니까?”

침묵이 이어지자 영의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얕은 숨을 뱉었다. 

“경은 저들의 생각에 동의하시오?”

“사대부 사내를 떠나 없이 사는 사내들마저 여인의 정조를 당연시하는 시대이옵니다. 외간 사내와 말을 섞기만 해도 구설에 휘말리는 그런 시대지요. 그런 때 중전마마께 국혼전의 일일지라도 정혼을 맺었고, 그 사내와 정을 주고받았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간 쌓아 온 모든 것이 무너지기 마련이옵니다.”

알고 있었다. 유난스럽게 여인에게만 고집하는 정절, 순결……. 모든 것을 떠안고, 입 닫고 귀 막고 살아야 하는 그런 시대였다. 

“더욱이 중전마마께서는 모두의 본이 되어 섬겨야 할 대상이시옵니다. 사대부의 머리 위, 전하와 함께 앉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받들어야 할 사람에게 큰 오점이 있다면, 저들은 자존심과 체면을 두고 끝까지 중전마마를 외면할 것이옵니다.” 

“역시 그렇군.”

“바로잡으려 할수록 진실이 부각되어 중전마마께 힘든 싸움이 될 것이옵니다.”

모든 것이 욕심으로 생긴 일이었다. 처음부터 대비 조 씨와 부원군이 순리를 거스르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우습게도 일을 벌인 당사자들은 제3자로 빠지고, 그들에게 희생됐던 이들만 수렁에 빠졌다. 

* * *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매일 새로운 길을 밟았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정처 없이 지냈다. 

그런 그도 떠도는 생활이 퍽이나 고단했는지 보름을 한 주막에 머물게 됐다. 짐을 꾸려서 떠나기 위해 주막을 나서던 인겸이 멈춰 섰다.

“그럼 참말 중전마마께 정을 통한 사내가 있다는 거야?”

“아 이 사람아! 그러니까 한양에서 예까지 소문이 퍼졌지!”

“말세구먼. 양반댁 규수가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도 모르나?”

“들은 말로는 아주 대궐이 발칵 뒤집혔다는군.”

공들여 쌓은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이런 삶은 살았는지 인겸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애썼는데 도대체 왜, 누가……. 은하를 비하하는 사내들을 향해 쥐어진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당신들 같은 사람을 두고, 배운 사람은 인면수심이라 하는 것일세.”

“뭐요? 지금 우리더러 하는 소리요?”

“두 눈은 멀쩡한가 보군. 자네들 중전마마께서 해마다 굶는 이가 넘치는 겨울이면 곡식을 풀어 자비를 베푸신 것을 잊은 것인가?”

“중전이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 아니지? 이제는 곧 폐비가 될 것이니……!”

태연하게 은하를 폐비라 칭하던 사내를 향해 인겸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순식간에 주먹을 날렸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손이 근질거리던 차에 잘됐다! 네 이놈!”

얻어터지고 바닥을 나뒹굴던 사내가 우악스럽게 소매를 걷어붙이며 인겸을 향해 달려들려는데 순간 장검이 불쑥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장검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검을 든 이는 날카로운 인상으로 인겸을 훑어보았다.

“검에 피를 묻히기 싫어서 하는 말인데 그냥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검을 든 사내는 싸늘한 눈빛으로 소매를 올리던 사내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자 동공을 뒤흔들던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꼬랑지를 뺐다.

“뉘…… 뉘시오?”

흥분을 가라앉힌 인겸은 자신을 보호라도 하듯 지켜 준 사내를 향해 눈을 굴렸다. 

* * *

소문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어명이 떨어졌다. 그리고 이 일에 관련된 자들을 추포하여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되었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은하의 정혼 사실을 알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들고일어나 반발을 했다.

결국 아수라장이 되어 강의 우려대로 은하의 명예만 더럽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노을을 등에 업은 강이 교태전에 들었다.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신첩의 추문으로 전하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할 죄인이옵니다.”

“과인은 혼인을 하고도 후궁을 셋이나 뒀소. 그런 마당에 부모끼리 약속으로 맺은 정혼을 들먹이는 꼴이라니 우습소이다.”

그는 진심으로 흥분하여 들고 일어난 신료들을 조롱했다. 은하는 고개를 숙이며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중전에게 미리 말해 줘야 할 일이 있어서 온 것이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어마마마께서 마치 중전의 정혼을 몰랐다는 듯 두 손 놓고 방관하고 있질 않소? 그것부터 바로잡으면 실마리가 풀릴 것 같아서 하는 말이오.”

“신첩의 아버지를 심문하신다는 말씀 같은데 맞으시옵니까?”

“맞소. 진실을 아는 사람은 부원군뿐이오.”

어차피 모진 고문으로 심문을 하겠다는 말이 아님을 알았다. 제 부친이 그 수모를 견디면서 입을 다물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신첩이 끝내 이 자리를 지키고자 한다면, 저들은 다른 먹잇감을 물어 올 것이옵니다.”

“다른 먹잇감이라니?”

“정혼했던 사내를 심문해 달라 청하겠지요.”

“…….”

“감히 왕을 능멸했다는 죄목으로 옭아맬 것이옵니다.”

이제 은하가 원하는 것은 교태전 안주인 자리가 아니란 것을 강은 비로소 깨달았다. 

“폐위되어 폐비로 불려도 좋습니다.”

“중전…….”

“감히 그분을 지킬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옵소서.”

말을 마친 은하는 홀연히 처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