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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왕을적시다 (55)화 (56/93)

제 55 화 왕을 적시다

며칠간 바람이 요란스럽게 부는 턱에 바깥 외출은 꿈도 꾸지 않았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맑게 갠 하늘은 퍽 따사로운 햇볕을 내려 줬다.

이날을 놓칠 수 없었던 도아는 교태전을 찾아가 활쏘기를 제안했다.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했던 은하도 곧장 따라나섰다.

“자네 정말 괜찮겠는가?”

“어느 때보다 좋으니 염려 마시옵소서.”

“그렇다니 다행일세.”

“활은 오랜만에 잡는 것 같습니다.”

그간 오랫동안 누워 있기도 했고, 날이 추워져서 활은 잡을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은하는 제법 나오는 입김을 의식하다가 손에 익은 활을 집었다. 

“내기라도 하겠는가?”

“송구하오나 아직은 소첩이 더…….”

라고 말끝을 흐리며 도아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얕보지 말게. 내 처소에서도 손이 녹슬지 않게 연습을 꾸준히 했네.”

“음, 무엇을 거시겠습니까?”

“흠……. 벌주?”

“예?”

뜻밖의 말에 도아가 당황하여 되묻자 은하는 전과 다르게 호탕하게 웃었다. 자기가 말해 놓고도 웃긴 모양이었다. 

“벌주가 좋겠네.”

“좋사옵니다, 마마.”

그렇게 벌주를 걸고 시작된 내기가 팽팽하게 이어졌다. 은하의 실력은 그 자신감처럼 일취월장으로 좋아져 있었다.

“와……. 벌주 드시겠사옵니다.”

“중전마마께선 참으로 못하시는 게 없구나.”

멍하니 은하가 쏘는 화살이 명중하는 것을 바라보던 무이와 도아가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세 발을 물려 주겠다던 귀인의 호의는 유효한 것인가?”

“실은 물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스승 된 체면에 그럴 수는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내 한 발을 빼고 모두 명중했으니 어찌 되는 것이지?”

“소첩이 벌주를 받으면 될 것 같사옵니다.”

이리하여 이 승부는 은하의 승리로 돌아갔다. 도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많이 활달해진 은하는 기쁨에 젖어 크게 웃었다.

“오랜만에 활을 잡으니 몸에 활기가 도는 것 같네.”

“소첩도 그러하옵니다.”

“당분간은 활을 잡기 힘을 테니 넉넉히 즐겨 둬야겠네.”

그렇게 말하면서 은하가 화살을 다시 집어 들었다. 자신감 있게 시위를 당기고 초점을 맞추려는데 활시위 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아……!”

“중전마마! 괜찮으시옵니까?”

은하의 외마디 비명에 깜짝 놀란 도아와 김 상궁이 한달음에 달려갔다. 줄이 끊어지면서 손가락에 작은 흠집을 내놓았다. 

“어의를 부르겠사옵니다!”

“김 상궁, 소란 떨 것 없네. 그저 줄에 스친 것뿐이네.”

“하오나 마마의 옥체에 흠이라도 졌다간…….”

“됐네. 그만 처소로 돌아가 쉬라는 뜻인 게지.”

모두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으나 은하는 애써 넘기려 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끊어진 활을 내려놓았으나 마음이 석연치 않았다.

“귀인은 벌주를 들어야 할 것일세.”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허면 가세.”

눈에 밟히는 끊어진 줄을 눈앞에서 치워 버렸다. 말을 마친 은하는 손수건으로 손가락을 꽉 누르며 자리를 빠져나갔다.

* * *

밖에서 도는 한기와 다르게 처소 안은 아늑하고 따듯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차 드세요, 아버지.”

“고맙습니다, 마마.”

나란히 앉은 부녀는 여유롭게 차를 들었다. 청아는 진한 파랑색 당의를 입어서인지 어느 때보다 인상이 차갑게 보였다.

“이제 곧 교태전이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세요?”

붙잡고 있던 잔을 내려놓은 청아가 대제학을 뚫을 듯 응시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자세히 말해 보세요.”

“중전께서 국혼을 치르기 전에 정혼자가 있으셨답니다.”

“예?”

정혼자란 소리에 청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껏 봐 온 은하는 거꾸로 들고 흔들어도 먼지 한 톨 나올 것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저 밑바닥에서부터 추문이 돌기 시작했으니 대궐에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일 겁니다.”

“그렇다면 아직 대궐에는 소문이 닿지 않았다는 거군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조용한 것을 보아 아직인 것 같습니다.”

“흠…….”

“허나 궐 밖에서는 이미 떠들썩한 이야깃거리가 되어 너도나도 중전의 흠을 잡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은하가 도아를 끼고, 아끼는 것 같아서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다. 적당한 때 좋은 묘수가 나온 것이다.

“중전마마의 추문이라…….”

“사대부가에서 이 일을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진 않을 것입니다.”

“물론이겠죠. 여인의 정절을 무엇보다 강요하는 자들이니 중전마마라고 예외는 아닐 겁니다.”

청아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려놓았던 잔을 들어서 목을 축였다. 아무 맛도 나지 않던 차에서 향긋한 향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 * *

차게 식은 차를 내가라 이르고, 귀하게 여기던 찻잎을 우려 내왔다. 그러자 청아의 부름에 나은이 자리를 틀고 앉았다.

“어서 오세요, 안 숙의.”

“무슨 일로 찾았습니까?”

“우선은 차를 들면서 숨부터 돌리세요. 얘기는 차근차근합시다.”

라고 말하면서 환하게 웃는 얼굴에 나은은 숨이 멎었다. 저 얼굴, 저 표정은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사과로 계략을 짤 때도 저렇게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궐 밖에 재미난 소문이 나돈다고 합니다.”

“소, 소문이요?”

“네, 아마 안 숙의도 들으면 깜짝 놀랄 겁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청아는 다시 양쪽 입꼬리를 반듯하게 올렸다. 

이어진 이야기에 나은은 믿기지 않아 입이 반쯤 벌어지고 말았다. 아녀자들이 돌려 보는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전하께서도 이 일을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만일 헛소문이라면 허언을 일삼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진위 여부는 모두 따졌습니다.”

“…….”

“우리가 대전을 찾아가 이 일을 전하께 말씀드리면 시각을 달리 보실 게 뻔합니다.”

이미 두 사람은 강에게 신임을 잃었으니 투기를 한다며 무시하고 말 것이 뻔했다. 나은이 고개를 숙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대궐 안에 소문을 퍼뜨리면 머지않아 전하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네…….”

“그 일을, 안 숙의가 해 줬으면 합니다.”

“네……. 네?”

“무얼 그리 놀라십니까?”

제 부친이 도총관에게 했듯 청아는 이번에도 제 손을 더럽히며 나설 생각이 없었다.

“왜, 못 하겠습니까?”

“…….”

“부친에게 들으니 이번 일에 도총관이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던데 아닙니까?”

“아…… 아버지가요?”

“네, 그래서 내 숙의를 부른 것인데.”

고요한 침묵 속의 미소였다. 

“제가 뭘 어찌하면 되는 것입니까?”

“어려울 것 없습니다. 그저 숙의의 전각 궁녀들의 입을 통해서 소문만 퍼뜨리면 됩니다.”

“그러다 발각되기라도 하면…….”

“소문을 쫓을 겨를은 없을 겁니다. 궐 밖에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지난번처럼 실수가 생겨선 안 됩니다. 은밀하지만 빠르게, 퍼뜨려야 합니다.”

지난 일을 얘기하니 나은은 더욱 풀이 죽었다. 죄책감에 떨던 것을 생각하면 죽기보다 하기 싫었지만 부친을 떠올리면 그럴 수가 없었다.

나은은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잡은 채 두려움의 숨을 삼켰다. 

* * *

교태전에 합방을 제외하고 술상이 차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박하지만 깔끔하게 차려진 상차림이었다.

도아는 떨리는 마음으로 합환주를 마시고 처음으로 술잔을 집었다. 벌주로 은하가 따라 주는 술 석 잔을 마셔야 했다.

과일로 담근 술은 향긋하니 입맛을 간지럽혔다. 그 맛에 끌린 도아는 겁도 없이 석 잔을 벌컥벌컥 넘겨 버렸다.

술을 우습게 여긴 대가는 참혹했다. 은하가 한 잔을 비울 동안 총 석 잔을 연달아 마신 도아는 얼굴이 벌게져 실실 웃다가 고꾸라지고 말았다.

“어?”

은하가 당황할 새도 없이 도아는 심하게 취해 버리고 말았다. 처소로 갈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도아는 웃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주상 전하 납시오!”

그리고 딱 좋을 때 맞춰서 강이 등장해 주었다. 들어온 강은 술에 취해 자신도 못 알아보는 도아를 당황스럽게 쳐다보다가 은하를 응시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벌주를 준다는 것이 그만…….”

민망함에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은하도 술 한 잔에 비틀거리는 꼴이었다. 김 상궁이 황급히 은하를 붙잡아 주었다.

강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헛웃음을 흘린 채 고개를 내저었다.

“귀인은 과인이 데려갈 테니 중전께서는 쉬시구려.”

“송구하옵니다.”

행여나 술에 취해 꼬인 말이 나갈까 은하는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말하며 말을 아꼈다. 

“이봐, 귀인.”

장난스레 말을 걸며 도아의 곁에 앉았다. 인사불성으로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자 강은 혀를 차다가 도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양 볼이 발그레해진 채로 강의 품에 안겨서 나오는 도아의 모습을 쳐다보던 아랫것들이 일제히 놀라 고개를 숙였다. 

“전하, 가마를 가져오라 하올까요?”

“됐다. 동온돌로 갈 것이다.”

말을 마친 강은 행여나 도아를 떨어뜨릴까 봐 손에 힘을 주었다. 교태전에서 도아의 전각까지는 거리가 멀기에 동온돌을 택한 것이다.

“흐음…….”

그의 품에서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아이처럼 가슴을 파고드는 도아를 잠시 내려다보던 강은 끙, 하며 신음을 삼켰다. 

동온돌에 들어 잘 깔린 이불을 거둬 내고, 도아를 잘 눕혀 주었다. 시중을 들겠다는 아랫것들 모두 물리고 강이 손수 옷을 벗겨 주었다.

갑갑할 것 같아서 당의며 치마를 모두 벗겨서 한쪽에 놓고, 소복 차림으로 눕혀 주었다.

“잔뜩 취했군. 인사불성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이불을 단단히 덮어 주었다. 

“석 잔에 이렇게 되다니 놀랍군.”

“전하……?”

“정신이 드는 것이오?”

꾸물꾸물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도아는 멀거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는 양을 보니 아직 정신이 든 건 아닌 모양이었다.

“물을 마시겠소?”

“네……. 목말라요. 물…….”

한마디에 강은 한쪽에 두었던 물그릇을 집어서 도아의 입에 가져다 댔다. 꿀떡 하고 삼키는 소리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도아가 다 마셨다는 듯 물그릇을 손으로 밀자 강이 그릇을 떼어 내려놨다. 도아의 입술에 물기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강은 순식간에 도아의 입술을 삼키며 묻어 있던 물기를 쪽쪽 소리가 나도록 빨아 먹었다. 

“숨……. 막혀.”

그럼에도 강은 달콤한 과일주 향이 나는 입술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다시 입술을 탐하자 버둥거리던 몸이, 강을 붙들고 매달렸다. 

가녀린 두 팔이 그의 목을 두르며 적극적으로 입술을 벌렸다. 뜻밖의 행동에 강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사냥감을 놓치지 않고 머금었다.

“……강.”

강은 흠칫 놀라 얼얼하게 빨던 입술을 내려놓았다.

“이……강…….”

“불러 주는 사람이 없어서, 꽤 낯설군.”

“가앙…….”

“풋……. 그대는 정말 사랑스러워.”

술기운에 불러 보고 싶었던 그의 이름을 중얼거린 도아 덕분에 강은 미칠 듯한 환희에 차올랐다. 

덕분에 아주 오랫동안 동온돌에서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곧 예감은 현실이 되었고 헐떡이던 도아는 서서히 술기운에서 깨어났다.

술에서 깬 도아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땀에 흠뻑 젖은 채 신음을 흘리는 강이었다. 

“깼소?”

“이, 이게 무슨…….”

“그대가 유혹해 놓고 이런 얼굴은 반칙이오.”

“제가 언제……. 옷은 다 어디 가고…….”

나신으로 그의 손아귀에 붙들린 채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그럼 다시 시작하면 되겠군.”

“네?”

그는 도아의 온몸에 입술 자국을 선명하게 남기고,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끝없이 입을 맞췄다.

어느새 도아의 온몸은 쾌락으로 젖어 강의 품 안에서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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