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 화 왕을 적시다
철벽같이 도아를 보호하려던 강은 드디어 처소를 나가도 좋다는 허락을 내놨다. 도아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교태전이었다.
다른 후궁들보다 이른 시간에 찾아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은하의 걱정 어린 잔소리를 실컷 듣고 있었다.
“전하께서 단 한 시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하셨네.”
“송구하옵니다.”
“내 자네를 붙들고 이리 잔소리를 하는 걸 보니 나도 퍽 걱정되었던 모양일세.”
“마마께서도 수척해지셨사옵니다.”
“수척은 무슨…….”
애써 감추려 했지만 은하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도아를 아끼던 마음이 컸던 모양이었다.
부끄러워하며 웃던 은하가 넌지시 도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백옥 쌍가락지를 낀 손이 사뿐히 올라왔다.
“항시 끼고 다니는군.”
“단 한 시도 몸에서 떼 놓지 않고 있사옵니다.”
“이 사람의 성의를 그리 아껴 준다니 고맙네.”
“소첩이 드릴 말씀이옵니다. 후궁으로 들어온 소첩을 진심으로 받아 주심에 그저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서로를 향한 그 진심을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총애를 놓고 도아를 시기하던 김 상궁도 이제는 그 마음을 접었다.
“몸은 정말 괜찮은가?”
“예, 언제 아팠는지 모를 정도로 말끔히 나았사옵니다.”
“자네의 화사하게 핀 옥안을 보니 그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일세.”
“예? 아, 아…….”
“얼굴 붉힐 것 없네. 대궐에서 자네가 꽃보다 곱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는 것을.”
외모 칭찬에 얼굴을 붉힌 것이라 생각했으나 사실 간밤에 승은을 입어 얼굴이 피었다는 뜻으로 착각하고 수줍어한 것이었다.
“곁에 항시 어의를 가까이 두고, 조금이라도 몸이 좋지 않으면 부르도록 하게.”
“예, 중전마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리자 은하는 잡고 있던 도아의 손등을 비단을 쓸 듯 쓰다듬어 주었다.
이후 두 후궁이 함께 찾아와 오랜만에 화목한 시간을 보냈다. 물론 도아는 다른 후궁들에게 말을 붙이거나 살뜰히 웃어 주진 않았다.
이미 그들에게 마음 빗장을 닫았기에 애써 마음을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살펴 가시게.”
밖으로 나온 도아는 덩그러니 말을 남기고 앞장서서 걸었다.
“귀인마마.”
“내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는가?”
“예,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걸으면서 듣지.”
청아의 말에도 별다른 얘기가 아닐 것이라 여기며 도아는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귀인마마가 혼절하시고, 곧장 처소로 건너가던 길에 젊은 사내가 마마의 전각 앞을 서성이는 것을 보았나이다.”
“젊은 사내라니?”
생각지 못했던 소리에 도아는 걸음을 멈추고, 청아를 신경질적인 시선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청아의 얼굴에 민망함이 서렸다.
“예, 소첩도 그를 수상하게 여겨 다가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영의정 대감의 자제라 하더군요.”
“…….”
“사가 시절에 마마의 오라버니와 벗이었다고 하던데 맞사옵니까?”
이미 다 알면서 괜히 묻는 것이었다. 그 물음에 도아는 다시 걸음을 재촉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 인연으로 마마의 소식을 듣고 걱정되어 달려온 듯 보였사옵니다.”
“그랬군. 그런데 이 얘기를 꺼내는 의도가 무엇인가?”
“의도라니 당치 않사옵니다. 행여나 소첩은 그자의 불성실한 태도에 마마께서 해를 입진 않으실까 걱정이 되어 드리는 말이었습니다.”
“불성실한 태도라니?”
“그자는 계속해서 마마의 전각을 배회했사옵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까지 미치광이라 생각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더 미쳐 있는 것 같았다.
“마마가 누워 계시는 동안 전하께서 그분에게 사헌부의 지평으로 명하시어 관직에 올랐습니다.”
“관직에 등용했다는 말인가?”
“예, 그렇기 때문에 수시로 대궐에 드나들 수 있었겠지요.”
“…….”
“대궐은 말이 많은 곳입니다.”
그 말에 모든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도아의 전각 근처까지 오게 되었다.
이만 물러가겠다고 하려는데 저만치 전각을 서성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두 사람의 얼굴이 한 곳을 응시했다.
“자네의 말뜻을 이해했으니 그만 가 보게.”
“예, 이만 물러가옵니다.”
전각을 서성이던 시현도 두 사람을 발견하고 흠칫하고 굳어 있었다. 청아가 보란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돌아갔다.
치맛자락이 서로 부딪치며 비단 특유의 소리가 주변을 배회했다. 도아는 당의 속에서 손을 빼 동심결 노리개 술을 만졌다.
“내 뜻을 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무탈하신 모습을 뵈니 마음이 놓입니다, 귀인마마.”
“지평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관직에 오른 신하 된 자가, 후궁 처소를 배회하다니 말이나 될 법한 일입니까?”
“마마…….”
“듣고 싶지 않습니다!”
고함을 치면서 치가 떨린다는 듯 쳐다봤는데 시현의 태도가 이상했다. 그는 아련하게 젖은 눈으로 혼자 애달팠다.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미친 행태를 보였다. 도아는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반걸음 물러났다.
“그리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소신을 위해 그러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한 번만 더 이 사람 눈에 뜨인다면 결코 조용히 넘어가진 않을 것입니다.”
너는 떠들어라, 나는 안 들으련다. 딱 시현의 얼굴이 그 지경이었다. 도아는 애써 화를 삼키며 말을 맺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슴의 통증이 종이에 먹이 번지듯 싸하게 온몸에 번져 갔다.
“윽…….”
숨이 막히는 고통에 도아가 비틀거리자 감히 시현이 손을 뻗어 왔다. 이 상황에도 도아는 그의 손을 매섭게 뿌리쳤다.
“소신을……!”
뒤에서 지켜보던 무이가 한달음에 달려와 도아의 손을 잡아 주었다.
“마마, 괜찮으세요?”
“……처소로, 가자.”
“예, 마마!”
도아는 허리를 굽힌 채 무이에게 온건히 기댄 채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났으나 무시했다.
“마마를 잘 모시거라!”
시현의 말에 무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무시하고 전각으로 들어갔다.
“어의를 모셔 오겠습니다!”
“아니다.”
“예?”
“괜찮아졌다. 두어라.”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던 도아는 손을 내저으며 무이를 만류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어의를 불러오겠습니다.”
“정말 괜찮아.”
“또 그러시면 바로 말씀하세요. 소인이 어의를 불러오겠사옵니다.”
도아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잘게 남아 있던 통증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그때 앞에 있던 무이가 혀를 끌끌 찼다.
“이런 말은 하면 안 되지만 시현 도련님 머리가 회까닥……한 것 같사옵니다.”
“제정신은 아니지.”
“사가에서 마마와 무슨 연도 없으셨는데 왜 저렇게까지 집착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러다 대궐에 엄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원.”
“저러다 말겠지.”
도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번뜩이는 그의 눈빛은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사라진 심장의 통증에 도아는 꿈을 돌아봤다. 황금 인어의 마지막 말이, 미칠 듯 온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 * *
기방을 찾은 대제학과 도총관은 기생도 없이 잘 차려진 술상을 앞에 놓고, 술을 주고받고 있었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게 아닌가.”
“그렇지. 귀인이 깨어났으니 미적거릴 필요가 없어졌네.”
먼저 부추긴 것은 마음이 급한 도총관이었다. 이 사건으로 은하를 몰아내고 행여 청아가 중전이 되더라도 ‘빈’ 자리는 나은의 차지가 될 것이라 여겼다.
도총관이 입맛을 다시면서 대제학의 잔에 술을 채웠다.
“어찌 시작했으면 좋겠나?”
“전하께서 중전을 총애함은 물론이고, 깊이 신뢰하고 있으니 이 사건이 터진다 한들 문제 삼지 않으실 수도 있네.”
“그래도 전하께서도 사내인데 투기가 없으시겠는가?”
“그럴 수도 있네. 그러니 방법이 중요할 것이네.”
가득 채워진 잔을 집어 든 대제학이 한 번에 목 안으로 털어 넣었다.
“생각해 둔 방도가 있는가?”
“자네는 사람을 좀 사서 장터 안의 상인들에게 소문이 퍼뜨리게.”
“상인들에게?”
“맞네. 그러면 자연스럽게 오가는 이들이 알게 되겠지.”
긴 수염을 만지면서 대제학이 던진 말을 골똘히 생각하던 도총관의 눈이 반짝였다.
“옳지. 백성들이 모두 알게 되면 청렴하여 고지식한 유생들도 알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신료들이 모두 일어나 중전을 추궁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겠군.”
“발 없는 소문이 천 리를 가는 법이지. 서둘러야 할 것이네. 대궐까지 쉼 없이 달려야 하네.”
“걱정 붙들어 매시게. 말 많은 이들을 불러 모음세.”
“자네만 믿겠네.”
청아가 나은에게 그랬듯이 대제학도 제 손을 쉬이 더럽히려 들지 않았다. 손수 나서서 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대비마마께서 마음을 돌리시진 않겠지?”
“걱정 말게. 이미 대비께서도 중전에게 등 돌린 지 오래되었으니.”
“하긴. 후사도 잇지 못하는 중전을 자리에 둔 것만도 용하지.”
“자격이 없으면 물러나야지.”
“암, 그렇고말고!”
두 사람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떠올리며 시끌벅적하게 웃었다.
* * *
꽃과 파릇했던 색감이 사라지자 대궐의 풍경은 삭막하기만 했다. 대전 뜰에 나와 찬바람도 무시한 채 반 시진을 거닐던 강이 상선을 불렀다.
“찾아 계시옵니까, 전하.”
“부탁할 것이 있다.”
“예?”
부탁이라는 단어 앞에 상선이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과인과 상선, 우리 두 사람만 알아야 하는 일이다.”
“하명하시옵소서. 목숨을 걸고, 입을 닫아걸을 것이옵니다.”
“네가 직접 궐 밖을 나갈 수 없으니 자세한 사정을 말하지 말고, 믿을 만한 이를 써도 좋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강이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것일까. 상선은 마른침을 삼키며 가까이 다가갔다.
강은 소매에 넣어 두었던 종이를 꺼내서 상선에게 은밀하게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주위로 말이 새어 나가지 않게 낮춰 말했다.
상선이 놀라는 기색을 애써 감추려 했다. 강은 예상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말을 이어 갔다.
* * *
오늘은 원래 쓰던 작은 목욕통에 물을 받아 들어갔다. 잦은 합방으로 도아의 몸이 여간 뭉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한눈에 알아차린 무이가 피로를 풀어 주려 작은 목욕통을 꺼내 물을 받았다.
“아……. 살 것 같아.”
“시원하세요?”
“응, 녹아내리는 것 같아.”
도아가 얇은 소복을 두르고 물속에 들어가자 무이는 뒤로 가서 뭉친 어깨며 팔을 야무진 손으로 주물러 주었다.
주인의 반응에 흐뭇해진 무이가 목덜미를 잡고 본격적으로 피로를 풀어 주자 도아는 눈을 감은 채 얕은 신음을 내뱉었다.
항상 밖에서 란희의 눈치를 살피며 망을 보던 무이가 오늘은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기회를 엿보던 란희는 어느새 물소리가 들리는 곳에 다다랐다.
안에서 무이가 흐뭇하게 웃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란희는 고양이보다 더 살금살금 다가갔다.
침을 꿀꺽 삼키며 문 앞으로 다가가 살짝 열린 문틈으로 눈을 들이밀었다. 작은 틈새로 도아와 무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애써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폈지만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뒤로 물러나려는데 무언가 반짝거리며 물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촤아…….
‘말도 안 돼.’
목욕통 안에 감춰져 있던 꼬리가 펄럭거리더니 이내 사라졌다. 란희는 두 손으로 놀란 입을 틀어막았다.
‘귀인마마가 인어였어.’
충격에 휩싸인 란희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뒷걸음질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