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 화 천불이 떨어지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도아의 모습에 강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눈이 마주치자 도아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맑게 웃어 주었다. 열흘 만의 고비를 넘기고 깨어난 사람 같지 않았다.
“전하.”
그 부름에 강의 눈물이 기다렸다는 듯 떨어졌다.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가까이 다가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꿈은 아니겠지.”
현실을 믿지 못한 채 떨고 있는 강을 바라보던 도아는 그의 손을 잡아서 제 뺨으로 가져왔다.
“보세요, 꿈이 아니에요.”
“…….”
“보고 싶었어요.”
다시는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나누지 못하리라 여겼다. 절망과 죄책감에 얼룩져 고통에 짓눌려 있던 바위가 치워지는 것 같았다.
보고 싶었다는 말에, 강은 팔을 뻗어서 도아를 품 안에 가두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도아의 한쪽 어깨가 모두 젖도록…….
“눈물이 이리 많으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래서 돌아왔습니다. 이리 눈물 많은 전하를 두고 갈 수 없어서요.”
“그게 지금 말이라고…….”
그러면서도 열흘 동안 보냈던 지옥 같은 시간에 강은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도아는 그런 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 우셨습니까?”
그를 연신 토닥여 주던 도아가 장난을 치듯 물었다. 품에서 벗어난 강의 눈이 눈물 때문에 붉어져 있었다.
도아는 손을 뻗어서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을 닦아 주며 다정스레 웃어 주었다.
“그날 내리던 비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아시오?”
“가뭄은 해소가 되었나요?”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화내지 마세요. 비가 내렸고, 제가 돌아왔으니 된 겁니다.”
“그 빗속에서 죽고 싶었단 말이오!”
작게 언성을 높인 강은 원망의 눈을 한 채 이를 꽉 물었다. 자신을 위해 그런 것을 알았지만 죽으려 했다는 것이 못내 용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사내의 모습에 눈물을 보이는 여인을 보고 있으니 서운하고 미웠던 마음은 연기처럼 사그라지고 말았다.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누워 있느라 많이 야위기는 했으나 여전히 무엇에 비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눈이 부실 만큼.
“다시는 그러지 마.”
“…….”
“정말 다시는.”
“…….”
“네가 없으면, 나도 없고 이 세상도 없어.”
열흘 남짓, 강은 매일같이 살아 있는 몸으로 지옥을 오갔다. 산 사람이 겪을 수 없는 고통에 매일 몸부림쳤다.
“대답해.”
“…….”
“그러지 않겠다고.”
“네, 약속할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을 하자 그제야 마음이 놓인 강이 다시금 도아를 세게 끌어 와 안았다.
“입 맞추고 싶어요.”
누워 있으면서 대담해진 건가. 강은 코가 닿을 듯 떨어진 거리에서 놀란 눈으로 도아를 바라봤다.
순간을 견디지 못한 도아가 먼저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처음은 부드럽게 시작되었으나 갈수록 농도가 짙어졌다.
도아는 가쁜 숨을 헐떡이며 두 팔로 강의 목에 매달려 그를 받아 냈다. 어느새 강의 아래에 눕혀진 도아는 한껏 흐트러졌다.
“아……. 어의를 불러야 할 것 같은데.”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강이 그리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도아는 다시 그를 잡아 어디도 가지 못하게 했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겠소?”
다시 묻는 말에 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모습에 한껏 취한 강이 다시 붉어진 입술로 돌진했다.
그간의 갈증에 시간이 지날수록 강은 더욱 거세게 도아를 몰아붙였다. 마셔도 마셔도 가시지 않는 갈증, 강은 끝없이 도아를 갈구했다.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도아는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그를 밀어내지 않고, 온전히 받아 주었다.
“하…….”
“아프게 한 것이오?”
숨을 몰아쉬며 강을 밀어내자 그가 안절부절못하며 되물었다. 거칠게 달아올라 밀어붙일 때는 언제고, 도아는 픽 웃었다.
“당신이 주는 고통은, 아프지 않아요.”
“깨어나서는 줄곧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소.”
“그래서……. 싫으세요?”
“그럴 리가.”
그는 다시 웃으며 도아의 헝클어진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강은 도아의 손을 잡아서 제 가슴에 가져다 댔다.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의 움직임에 도아의 심장마저 덩달아 튀어 오를 듯 따라 뛰었다.
한참을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서로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 * *
날이 밝은 뒤의 도아의 처소는 축제의 현장이나 다름없었다. 무이는 울며불며 도아를 얼싸안았고, 평소처럼 입궐한 어머니도 오열을 멈추지 못했다.
도아의 맥을 살핀 어의는 기적과도 같은 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도아의 몸은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기만 했다.
숨이 멎은 채 궁녀에게 발견되어 죽을 날만 기다린다는 해괴한 소문을 물리치고, 도아는 보란 듯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주상 전하 납시오.”
저고리 차림으로 자리에 앉아 막 죽을 먹으려던 도아는 상선의 외침에 반가운 듯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곁을 지키던 어머니와 무이도 함께 일어나 어느 때보다 환한 용안의 강을 함께 맞이했다.
“수라를 받던 참이었군.”
“예,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그가 처소를 나간 지 한 시진밖에 안 되어 도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러자 강은 어깨를 들썩이며 도아를 보료에 앉혀 주었다.
“급한 용무는 하고 오는 것이니 걱정할 것 없소.”
“그래도…….”
“죽이 다 식겠군.”
이따가 먹을 생각으로 도아가 상을 물리려 하자 강이 도로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어의 말로는 귀인의 상태가 어느 때보다 좋다더군.”
“예, 그러니 이제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며칠 더 보고.”
강은 말을 이어 가며 한 손에는 죽 그릇을 들고, 다른 손은 숟가락으로 죽을 헤집으며 입김으로 식히고 있었다.
그 뒤에 누가 있다는 것을 생각지도 않고, 대뜸 수저로 죽을 떠서 도아의 입에 가져다주었다.
“소, 소첩이 먹겠습니다.”
“당분간은 무리하지 말라 들었소.”
“수저 들 힘은 있습니다.”
“아.”
그는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붉어진 얼굴로 주변을 살피던 도아는 작게 입을 벌려 죽을 받아먹었다.
“얼마간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음식이 속에 부담을 줄 수 있다더군.”
“이제 그만…….”
“하루는 물리더라도 죽을 드시오.”
만류하는 도아를 물리고, 강은 그릇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죽을 떠먹여 주었다. 손수 물을 건네 먹는 모습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손수건을 들어서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 주었다.
“아이참…….”
도아의 얼굴이 홍시가 되든 말든 그는 애정 행각을 멈추지 않았다.
의녀가 탕약을 가져오자 그것을 먹기 좋게 식혀서 남김없이 먹는 모습을 기다렸다가 달금한 사탕을 입에 넣어 주었다.
“어찌 아니 가시고 소첩을 이리 민망하게 하실까.”
“그대가 쓰러지던 날에도 과인은 정무가 우선인지라 대전에 가 있어야 했소.”
“…….”
“닷새가 지나도 깨어나지 않는 그대를 보며, 그날이 죽을 만큼 후회스러웠지.”
“전하…….”
“그러니 가라고 하지 마시오.”
축축하게 젖어 있는 목소리에 도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도아가 바다를 헤매고 있을 때 강은 지옥을 거닐고 있었다.
“답답하지는 않소?”
“음, 조금요.”
“활발한 그대가, 오랫동안 누워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잠깐 나가서 걸을까요?”
착 가라앉은 강의 기분을 살피려 도아가 웃으며 말하자 그는 따라 웃었다. 그러고는 둘 사이에 있던 서안을 가볍게 밀어냈다.
가까이 다가온 강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도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저, 전하!”
“잠깐은 괜찮을 것이오.”
“이, 이렇게는 시, 싫습니다.”
그 채로 몇 걸음 걸어 나가자 문이 자연스레 열렸다. 밖에 있던 모두가 그 모습에 고개를 숙이고 못 본 척했다.
마루를 지나 신을 신고 밖으로 나가자 제법 차가워진 공기가 도아를 훑고 지나갔다.
“춥소?”
“아니요.”
“곧 눈이 올 것 같소.”
“첫눈은 함께 맞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리 말하며 도아는 부끄럽다는 듯 강의 가슴팍에 이마를 묻었다. 살을 간지럽히는 숨결에 강은 흡족하게 웃었다.
치마 너머로 보일 듯 말 듯 흰 버선을 신은 발이 빠끔히 나와 있었다. 그것마저 귀엽다는 듯 강은 힐끔 보고 웃었다.
“정말 아프지 않소?”
“예, 이제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믿을 수가 있어야지.”
“참, 무이에게 서찰은 전해 받으셨어요?”
“받았소.”
죽어 가는 사람이 남긴 서찰, 그 얘기를 꺼내자 강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찢어서 태워 버렸소.”
“굳이…….”
“그걸 쥐고 있으면 그대가 깨어나지 않을 것 같아서, 갖고 있을 수 없었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강은 괴로움에 얼굴이 무너졌다. 도아는 그 감정을 고스란히 전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에 도아는 두 팔을 벌려서 강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다시는, 곁을 떠나지 않을게요.”
“부디 그래 주시오.”
“네……. 약조 드리겠습니다.”
살며시 품에서 벗어난 도아는 강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얼굴이 벌게져 다시 품에 얼굴을 묻어야 했다.
* * *
의식이 없던 도아의 곁을 배회하던 열흘 동안 시현이 미친 듯 매달린 일은 도아 가문의 과거를 밟는 일이었다.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알아내는 것에 애를 먹었으나 돈을 쥐어 사람을 풀자 과거에 인어 사냥으로 먹고살던 이의 자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는 도아의 가문과 손을 잡고 일하던 가문도 만날 수 있었다. 양반으로 사는 이들도 있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이도 있었다.
단연 먼저 손을 뻗어 온 쪽은 먹고살기에 급급한 이였다.
“저도 제 아버지에게 어릴 적에 지나가는 말로 들은 것입니다. 이런 것이라도 도움이 될는지요.”
“상관없으니 아는 대로 말하라.”
“별것은 아니고, 그……. 증조할아버지가 한창 인어 사냥으로 돈을 벌던 시기에 배를 타던 분이라 들었습니다.”
우물쭈물 망설이던 중년의 사내는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시현은 눈을 번뜩이며 한자도 빼놓지 않고 들으려 애썼다.
“그런데 그 시기에 인어 사냥으로 이름 높이던 홍가네가 있었는데 그 댁이 황금 인어를 잡겠다고 몇 년을 바다를 이 잡듯 뒤지고 다녔다고 했습니다.”
인어 사냥으로 이름 높이던 홍씨 가문이 도아네를 일컬음을 시현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바다를 항해하고 돌아온 홍가네 어선이 육지로 돌아왔는데 그 후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고 했습니다.”
“이상한 일이라니?”
“어선에 탔던 사람들이 모두 비명횡사를 했다고 합니다.”
“……비명횡사?”
뜻밖의 소식이었다. 시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중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게 누구인가?”
“……홍가였습니다.”
어선에 탔던 모든 사람이 비명횡사로 목숨을 달리했으나 도아의 가문 사람만이 살아남았다는 얘기는 꽤 흥미로웠다.
“당시 떠도는 소문으로는 죽은 인어가 저주를 했다니 뭐니 말이 많았다고 합니다.”
“저주?”
“예, 허나 그게 전부 사람들이 죽어 나가니 떠도는 소문이었는지, 그것까지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
“소인이 아는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모두 어릴 때 부친에게 뜨문뜨문 들은 것이라 두서없이 들렸을 수도 있습니다.”
왜일까, 어째서 도아의 가문만이 살아남았을까?
“어디를 가야 이 얘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는지 알고 있는가?”
“그게 워낙 오래된 일이라…….”
“주기로 한 돈의 곱절을 쳐서 줄 것이네.”
“소인도 알면 알려 드리고 싶지만 이 이상은 모릅니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자손들도 죽고 아는 이가 없습니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던 시현은 돈을 기다리는 앞의 사내에게 가져온 것을 모두 넘겨주었다. 꽤 두둑한 양의 돈이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나리!”
“혹시라도 이 일에 대해 더 아는 것이 생기거든 날 찾아오게.”
“아, 예.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 말고, 꼭 내게 털어놔야 하네.”
“예, 명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연신 꾸벅거리며 인사를 하던 중년의 사내가 사라지고도 한참을 시현은 뇌리에서 도아를 지울 수가 없었다.
별당 호수에서 발견한 인어 비늘, 홍가네를 둘러싼 죽음의 비밀, 모든 것에서 도아가 중심이 될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 * *
“맙소사…….”
목욕을 하러 소복 차림으로 곁방에 들었던 도아는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대전에서 쓰는 것과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전하께서 명하신 일이야?”
“예……. 마마가 쓰시던 목욕통을 보시고 한참을 한숨만 뱉으시다가 보낸 것이옵니다.”
“그래도 그렇지.”
다른 처소보다 곱절은 큰 목욕통을 써 왔지만 강의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덕분에 도아는 눈앞에 놓인 어마어마한 목욕통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곁방을 가득 채운 직사각형의 나무로 만들어진 목욕통은 도아가 들어가 앉으면 가슴을 가릴 만큼 깊었다.
향기가 넘치는 물속으로 들어가 앉자 무이가 미리 뿌려 두었던 꽃잎이 찰랑이며 도아의 살결을 간지럽히고 지나갔다.
긴 꼬리는 더 이상 목욕통에 닿아 구부러지지 않았다. 크기도 꽤 넓어서 헤엄을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란희에게 근처로 얼씬도 하지 말라고 일러두긴 했는데 혹시 모르니 소인이 나가 있겠습니다.”
“으응, 다 되면 부를게.”
“예, 귀인마마.”
모두 나가고 혼자 남은 도아는 수증기로 가득 찬 허공을 응시하며 나신 위로 물을 끌어 올렸다. 따듯하고, 좋은 향기에 절로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었다.
찰랑, 꽃잎을 가로지르며 끝으로 유연하게 헤엄을 쳤다. 물속에 머리를 넣고 잠수를 해도 좁지 않았다.
“하…….”
물 위로 올라가 산뜻한 공기를 흡입했다. 길게 풀어 헤친 머리를 양쪽으로 내려 가슴을 가렸다.
그 순간 다른 기운을 감지하고 서둘러 뒤를 돌자 몰래 문을 닫고 있는 강이 보였다.
“저, 전하……!”
도아가 다급히 외치자 강은 머쓱한 듯 양쪽 볼을 붉히며 어색하게 웃었다.
“선물이 마음에 드는지 물어보려고…….”
“그, 그럼 밖에서 물어보셔야죠!”
“나인이 안 그래도 시중들 사람이 필요할 거라고 해서 들어왔소.”
“무이 이것을…….”
안 그래도 두 사람이 합방을 하지 않은 일로 내심 머리를 쓰고 있던 무이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원치 않으면 나가겠소.”
“…….”
“나갈까?”
그런 얼굴로 물어보면 거절하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저러는 것이다. 도아는 차마 말로 하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수줍은 허락이 떨어지자 뒤에서 찰랑이는 소리가 나더니 가득 차 있던 물이 밖으로 흘러넘쳤다.